효열부(孝烈婦)유인(孺人)완산최씨(完山崔氏)行狀

열부(烈婦) 유인(孺人) 최씨는 나의 이모(姨母)이다. 그 선조는 완산인이니, 고려 때의 시중(侍中) 문성공 아(阿)가 시조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수지(水智)는 도승지를 지냈고, 균(均)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이 분은 임진난 때 아우 강(堈)과 공을 세워 원종 이등공신이 되고 의민(義敏)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곧 세상에서 일컫는 소호(蘇湖)선생이시다. 그 후 상린(祥麟)이 철성(鐵城)의 학동으로부터 무이산(武夷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행의(行誼)로 소문났는데, 이 분이 유인의 고조다. 증조의 휘는 필형(必亨)인데, 호가 돈재요, 조부의 휘는 봉진(奉鎭)인데, 호가 송죽헌이다. 선친의 휘는 영순(永淳)인데, 일찍 돌아가셨다. 선비는 함안 이씨인데, 차사 병태(秉泰)의 따님이다. 유인이 1861년 3월 17일에 출생하셨다.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겨우 말을 할 수 있었을 때 모친에게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아버지가 있는데 나만 그렇지 못합니까?」하니, 이는 유인이 유복(遺服)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백부(伯父) 휘 광순(匡淳)이 어여삐 여겨 사랑하고 어루만져 기르기를 자식같이 하여 글을 가르치니, 소학(小學)과 열녀전(烈女傳)과 관수시와 도연명(渡淵明)의 귀거래사(貴去來辭)와 소동파(蘇東坡)의 전적벽부(前赤璧賦)같은 것을 그 구절(句節)을 다 해득하셨다. 선비도 역시 가르쳐 기르는 법도를 지니시어 항상 이르기를 「여자는 음식 범절을 주로 해야 하나니, 글은 힘쓸 바가 아니니라」하시니, 이에 한결같이 베 짜고 바느질하며 술 빚고 반찬 만드는 일에만 종사하였다.

17살에 선비가 돌아가시니, 유인께서 애통하기가 심하여 목숨을 잃을 것 같았으나 초하루 보름의 제사를 반드시 몸소 청결하게 모셨다. 23살에 진양 하용도(河龍渡)에게 출가하였는데, 용도는 곧 태계(台溪)선생의 후예이다. 유인이 시집가자마자 예용(禮容)을 정숙히 하며 모든 일을 법도에 맞게 하고, 시부모님 섬기기에 성의를 다하며 항상 말씀하기를 「내가 부친의 유복(遺腹)으로 태어났고 또 모친도 돌아가셨으니, 지금은 다만 시부모님 섬기기를 친부모님같이 하리라」하셨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본래부터 노력으로 살아 가던 터이라 예의에 익숙지 못한 점이 많았으므로, 유인이 곧 어른들에게 아뢰어 어두운 점을 정돈하게 하니, 집안에서 경중(敬重)하였다. 남편이 혹 글 읽기를 태만히 하면, 유인이 간하기를 「집안의 종손이 되어 책임이 가볍지 않거늘 배우지 않아 무식하게 되면, 종사(宗祀)와 자손에게 어찌 하리요?」하고, 몸을 삼가고 힘써 길쌈하여 학자(學資)를 마련하셨다.1886년에 모두 전염병에 걸렸을 때 유인이 힘을 다하여 마침내 온전하게 살리셨는데, 후에 우연히 병을 얻어 10년동안 치료되지 않으므로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남의 아내가 되어 이 병에 걸렸으니, 법(法)으로 마땅히 내침을 당해야 한다」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책임을 다하여 마침내 1남1녀를 얻으셨다. 어느 날 남편이 바다 구경을 나갔다가 우연히 태풍을 만나 정박한 곳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유인이 밤이면 반드시 목욕하고 탈 없기를 비셨다. 이와 같이 하기 수 년 뒤에 과연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므로, 지금도 유인의 지성(至誠)의 소치로 된 일이라고 일컫는다.

1903년에 남편이 불행하게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고 두 아들 딸도 이어서 죽었으므로, 유인이 명(命)이 박하고 운수(運數)가 궁(窮)한 것을 알고 울면서 말씀하기를 「예(禮)에 여자가 세 가지 따르는 법이 있으니, 친정에 있을 땐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자식을 따른다 함이 그 것인데, 내 홀로 이에 이르렀으니 따를 곳이 어디인가?」하셨으니, 이로 보아 유인은 반드시 따라 죽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돌려 살펴보니 법제 지키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고 곡읍(哭泣)을 절도있게 하면서 말씀하기를 「남편을 위한 복제(服制)는 참최 3년이거든 하물며 자식없이 승중복(承重服)을 입음에서랴?」하니 이로써도 집안 사람들은 깊이 염려하지 아니하였다. 대상을 지내고 담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겨우 일을 끝내자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 몇칠 만에 돌아가시니, 이 때가 1905년 3월이었다. 아, 열렬한지고! 어쩌면 그렇게도 종용(從容)하여 급박하지 않았는고? 이에 의장(衣藏)을 열어 보니, 모든 염습(斂襲)할 도구와 눈가릴 수건과 악수(握手:손에 끼우던 토지) 할 것과 손톱과 머리 담을 주머니와 현(絃), 훈의 두 폐백을 손수 갖춰 두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세 봉함서를 써서 형제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나의 모친에게 드린 글에서 이르기를 「아우는 죄가 중(重)하고 악이 극하여 하늘 아래 있지 못할 일이므로, 이제 삼종(三從)의 예(禮)를 따라 지하(地下)로 돌아가니, 형님만은 동생 때문에 상심하지 마시고 더욱 인륜의 즐거움을 누리시어 우리 부모의 이름을 전하소서」하시고, 나에게도 하신 말씀이 「나를 염습하는 것도 너만 믿으며 나의 뒷일에도 오직 네가 있을 뿐이다」라는 것이었다.이에 앞서 유인이 나에게 물이시기를 「3년의 상례는 대상(大祥)에서 끝나는 것이어늘 담제(譚祭)란 무엇하는 것인가?」하시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담제의 담(譚)은 곧 담(覃:생각이 뻗어 나감)이니, 대상(大祥)으론 갑자기 길(吉)하여지는 것이 아니요, 담제를 지내서야 점점 길하게 되는 것이라는 게 선왕(先王)이 예법을 제정한 뜻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유인은 이미 자신이 한 가지로 정해진 뜻을 지니셨으나 그래도 혹 예에 실수함이 있을까를 두려워하여 이것을 말하여 살펴 헤아리신 것이다.

아! 어쩌면 그렇게도 종용(從容)하여 급박하지 않으셨는고? 이에 고을과 도(道)의 선비들이 계속하여 포상을 요구하는 글을 올리니, 도백(道伯)이 장하다 여겨 임금에게 품달하였으나, 마침 나라에 큰 변란이 있어 정려(旌閭)의 은전이 실행되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이 또한 유인의 명(命)일지로다. 유인은 흰 살결에 달과 같은 모습을 지니셔 바라본 사람으로 복스러운 분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평생에 부친의 모습을 뵙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삼아 부모에 대한 언급이 있을 땐 창연(愴然)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집안에서 사위를 고를 때 반드시 양친이 계신 곳을 택하였고, 또 반드시 자매가 이웃해 있는 곳을 택하였으므로, 드디어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게 된 것이었다.

유인은 형님 섬기기를 어머님같이 하여 경계시키는 말씀을 반드시 깊이 새겨 돈독하게 행하여 혹 꾸짖음을 당하여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개 몸을 죽여 절개를 세우고 절개를 세워 예를 다하는 것은 당세(當世) 사대부들도 매우 이루기 어려운 바이로다. 슬프다! 유인의 어짊으로도 복(福)누림이 남과 같지 못하여 외로이 쓸쓸히 질병에 빠지고 이별하여 애태우다가 몸소 순절(殉節)함에 이르렀으며, 또 자손으로 그 뒤를 천양(闡揚)할 자 없으니, 하늘이 유인에게 보답함이 어찌 한결같이 어긋났는고? 성태리 전동의 간좌에 장사되셨다. 유인이 지금 비록 아들이 없느나 9세의 종통(宗統)은 스스로 이어 갈 날이 있으리라. 내가 유인의 이질(姨姪)이 되고 뒷일을 부탁받은 터에 돌아보건대 엷은 자품으로 이미 만분의 일에도 부응시키지 못하고 다만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후대 군자의 채취(采取)함을 바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