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열부(孝烈婦)유인(孺人)安東 권씨(權氏)

무주 풍동(豊東)에 사시는 선비 하재만(河在晩)의 아들 범보(範甫)가 그 족형의 부인 권씨(權氏) 포열장(褒烈狀)이 겨우 먼지와 좀 속에서 남은 한 두 가지를 모아 가지고 내 집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권유인열행(權孺人烈行)이 앞서 이미 위로 상신하는 길이 막혀 정려를 짓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고, 이제 또 후손이 영락하여 이 행적이 인멸하여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우려가 있는지라, 서로 모여 의론하기를 비석을 선조 문효공 영당 곁에 세워 썩지 않게 하기를 도모하노니, 그대는 은혜스럽게 한 말씀을 써 주오」하므로, 내가 그 실정을 듣고  장하다 여겨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권씨의 세계(世系)는 안동(安東)이요, 시조(始祖)는 국재(菊齋) 휘 부(溥)인데, 이 분의 충성스런 공훈으로 아홉 분이 군(君)으로 봉하여졌었다. 고조는 춘당 휘 중희(重凞)인데 효행으로 죽림사(竹林詞)에 배향되셨다. 충효로운 그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예의에 맞도록 하여 집안 사람에게도 살을 보이지 않으셨다.

장성하여 이름이 높으신 영상(領相) 경재 휘 연(演)의 후손 휘 영조(永朝)의 아드님 재익(在益)에게 시집가서 효순하고 온혜(溫惠)롭게 부도(婦道)를 다하셨다. 낭군님이 말병(末病)으로 앓게 되시자, 밤낮없이 노심초사하여 깨끗이 씻고 약을 잘 조절하며 산신과 황천에 기도하기 6년을 하루같이 정성을 드렸으나, 끝내 효력을 보지 못하여 별세하니, 통곡함이 도에 넘쳐 몇 번이나 운명할 뻔하였다. 염습할 모든 자료를 손수 점검하여 빈소를 다 이루신 뒤에 아드님을 어루만지며 길게 통곡함이 이르기를 「네가 아직 장가는 들지 않았으나 나이가 너의 부친 제사를 맡길 만은 하니, 내 구차히 살고자 하지 않는다」하고 한 모금 물도 마시지 않고 7일만에 돌아가셨다.

슬프다,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사람의 상정인데, 유인(孺人)같은 분은 부인으로서 능히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取)하여 죽음보기를 온 길 돌아가듯,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타고난 특이함을 지니고 가정 교육에 깊이 젖은 분이 아니더면 어찌 능히 쉽게 이를 판별하였으리요? 살아서 할 도리를 다하고 죽을 때도 또한 몸을 던져 순절(殉節)한 분이 고금에 어찌 없으리요마는, 한결같이 지극한 성심으로 슬퍼하고 화한모습으로 자진(自盡)한 분 중에도 유인과 같은 분은 없었을 것이다.
아, 어쩌면 그렇게 갸륵하시던고? 참으로 열녀로다. 또, 하씨의 모든 종중이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의(義)로써 결속하여 한 핏줄로 없는 처지를 위해 각기 스스로 재물을 내어 오직 떳떳한 유적을 없어지지 않게 함을 도모하니, 이는 특히 헤아려 감동한 소치이어서, 시전(詩傳)에 적힌 바, 아름다운 덕을 좋아함은 백성의 본성이다 라고 한 말에 맞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