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 마을 입구

전절부(田節婦)유인(孺人)사행비(事行碑)

감탄하도다. 이 비석은 유인(孺人) 진양하씨의 사행비(事行碑)이다. 아버님은 곡포공(谷圃公) 휘 항(杭)이요, 경재선생 휘 연(演)의 후손이시다. 유인은 1866년에 태어나셨는데 어릴 때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 부모를 섬기매 순종함이 틀림이 없었다. 장성하여서 담양 전만진(田萬鎭)과 혼인하였는데 시아버지의 휘는 인식(仁植)이며 경은공(耕隱公) 휘 조생(祖生)의 후손이다.

남편(田萬鎭)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신행 전이었음에도 급히 시가로 달려가 보니 흉악한 전염병을 앓고 절명상태에 있는지라 통곡하면서 단지(斷指)하여 피를 입에 흘려 넣었으나 삼키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9일 동안이나 식음을 끊었으나 존경하는 시아버님과 시조부님 등 어른들께서 번갈아 집을 지키면서 간절히 말리셨다. 드디어 그 뜻을 받들어 자진하려는 마음을 돌이켜 스스로 말하기를 「남편을 따르려는 뜻은 후사(後嗣)를 위함인데 하루 아침에 남편을 따르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남편의 후사를 어찌 보내고 마칠고」하였다 제(祭)를 올려 받드는 예절은 반드시 몸소 하였으며 남을 시킨다는 것은 생각지도 아니 하였다. 모든 일은 오직 시어른들의 말씀에 따름이었다. 미망인이라 하여 웃는 일도 없었으며 사람들과도 대하지 않고, 낮에는 호미질로 밭을 가꾸고 밤에는 길쌈하여 게으름이 없었으며 근검절약하여 돈을 모아가니 가업이 조금씩 늘어나고 윤택해졌다.

종자(從子) 용준(溶俊)을 맞아 남편의 후사(後嗣)로 받아들이니 효로써 섬김을 다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용준이 일찍 죽으니 또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어졌는데 시어머님의 뜻을 좇아 행동거지에 있어 동정(動靜)을 지키며 한결같았다. 유인(孺人)은 후에 종질(從姪) 동수(東秀)를 후사(後嗣)로 받아들여 참되고 착하며 옳게 이루어진 고부(姑婦)간이 되었다.남편이 죽음에 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니 빛나고도 빛나는 일이며, 남편이 뜻을 이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 유인이 집안에서 행해야 할 도덕에 급급하고 떳떳한 지난날의 갖춤에 외롭고 고생스러운 바가 없었다면 남편의 승자(承子)를 위한 일은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넉넉함을 잡은 그 마음에 굳셈을 더한 것이다. 그 몸이 이미 죽을 수 있었으나 집안을 돌이켜 일으키고 끊어진 대(代)를 또 이어지게 한 것은 출륭하고 장한 일이다.

어느날 사손(嗣孫) 동수(東秀)와 가까운 친족들이 비천(飛泉)이 지은 公에 대한 문서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문(碑文)을 청하는데 나는 이제 병으로 누워 있으며 사리에 어둡고 마음이 어지러워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거듭 청하매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그 문서에 의하여 이와 같이 쓰고 이어서 명(銘)한다. 유인의 예쁜 시절에 울부짖음 어느 누가 도울 것인가? 비교한다면 같은 종류가 될 만한 한계에 의하여 나누어지게 된 것이 미행(美行)의 칭찬함의 보위(保慰)함이다. 부름의 감개함은 욕심을 하소연하니 일체의 물건은 특별한 원인 없이 있을 수 없다. 하물며 그 부인의 옳은 마음의 부르짖음은 아름다웠으며 또 마을의 양지쪽에 네자 높이의 비(碑), 오직 착함이 전하여지며 마음의 보임은 영원하리라.
1979년 늦은 봄 진양 정관석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