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공 24세손 휘 하립과 배위인 삼의당 김씨의 시비(詩碑)와 영정을 봉안한 곳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 도립공원


하립과 배위인 삼의당 김씨

 

조선조 영조때 뛰어난 시풍과 탁월한 문장으로 근세 한국 여류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삼의당 김씨는 1776년 (영조 44년)  남원의 서봉방에서 태어났다. 1786년(정조 10년) 같은 나이에 생일까지 똑같은  한동네  사람 하립과 결혼하여 그들의 나이 서른 세살되던 1801년 (순조 1년) 마령 방화리로 이사와  여생을 마쳤다. 삼의당은  나이  일곱살이  되면서부터  글방을  기웃거리며 귀동냥으로 글을 익혔으며 철이 들면서  명심보감을  비롯하여  소학을  통달했고 그것을  응용하여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한다. 남녀 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적 유교인습에 얽매어 있어 감히 글공부를 할 수 없었던 여자의 몸으로 이처럼 어려서부터 글과 더불어 자라난 삼의당은 용모 또한 빼어나서 그를 사모하는 총각들의 애를  태우게하기도 했다. 삼의당의  남편  하 립 또한 김부인에 못지않은  문장가이자 사내 대장부였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한 마을에 살면서  정이 들고  문장을  잘 하는 점이  이심전심으로 그들을 결합하게 햇따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로 만나다 보니
       달나라의 선녀이구려
       전생의 인연으로
       분명 이밤 가져온 걸
       속세의 중매란 분분할 뿐
       우린 천정의 배필이여 >

결혼 첫날밤에 남편 립이 이러한 시를 아내에게 주었고 삼의당은 다음과 같이 화답시를 지었다.

       < 신랑과 선녀
       한날 한시 한마을에 나서
       다시 화촉의 인연을 맞았거늘
       어찌 다 이밤의 기쁨이
       한낱 우연이리오 >

삼의당은 시와 문장에 뛰어난 여류이면서도 한 아내로서도 손색이 없는 후덕한 아내의 도리를 다한 여인이었다. 가난한 남편의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과 또 남편으로 하여금 보다 훌륭히 부모네들을 봉양케  하기  위해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도록 돕는 피나는 노력은 가녀린 한 여심의 비상한 정성과 효심이  스민  것이었다.  그러나  비범한  문재를 지닌 립은 어쩐 일인지 향시에는 자주 뽑히면서도 회시에는  번번히  실패하기가  일수였고  그럴때마다  아내인  삼의당은 남편을 위로하며 마이산에 들어가  과거 공부  하기를  권하였고 노자를 마련하여 서울의 풍물을 관광케 하여 견문을 넓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립은  관운이 없었던 탓인지 아내의 애절한 기대에의 보람도 없이 끝내 과거에 급제할 수 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의당내외가 진안 마령으로 삶의터전을 옮긴것은 그들의 중년 이후로 모든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삼의당 김부인  유고에  의하면 「그들  내외는 선영을 수호하기 위해 중년에 이르러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들은 선영을 위할 줄 아는 가도에 따름도 있겠지만 산수좋고 인심좋은 진안땅을 밟는데 대한 묘미와 풍류가 있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이야기다.

더욱  마령에서  진안을  꿰뚫는  도상에  하늘을 뚫듯 쭝긋 선 말의 귀를 연상하는 마이산의 위용과 칼날을 세워놓은 듯한 숫산, 그리고 거기에 비해 어딘지 단아한 교태를 먹음은  듯한 암산의 영봉은 이들 부부시객들의 더없는 시류를 자아내게 하였을것도 물론이다. 이렇듯 삼의 부부는 시를 읊고 시와 더불어 일생을 해로한 부부였다.그들에게 시와 글이 있음으로써 모든 인생의 열락을 거기에서 찾았으며  어떠한 고난과  난관이 앞을 가렸다해도 그것은 또 그들의 숭고한 예술로 해서 항상 깊은 이해와 아름다운 사랑으로 충만되곤 했던 것이다.

마령면  방화  마을에는  삼의당 부부가 글을 벗삼아 기거하던 초옥이 기울어진 서까래에 겨우 의지하고 쓸쓸히 서 있으며 그들의 후손인 하씨 일가가 인근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의  문집으로는  삼의당고가  전하여 오며 이 유고는 1930년 「오상철 교열(校閱)  정희택 편집 정일섭 발행」의 석판본으로 출간되었다 1747년(영조 23년)안서(岸曙) 발행의「이조규수한시선집(李朝閨秀漢詩選集) 금잔디」에 삼의당의 시가 32편 수록되어 있다.

「내 또한  호남의  한  우부(愚婦)라  깊은  안방에서만 자라나 비록 경사를 널리 궁구(窮究)하지는 못했지만  일찌기  언문으로  소학을  해독하고  미루어  문자를  통하여  제가(諸家)의 시서를 대략 보았는데  그렇다고  하여 어찌 짧은 글과 무딘 솜씨를 들어 세상사람들의 나무람을 받으리오. 다만 호정 (戶庭) 안에서 본대로 들은대로 또 지내는 대로를 혹은 말로 혹은 시로 남겨 느낀 정대로 맡겨 써 놓는 것은 내 스스로 뒷날에 좋은 거울과 법도를 삼고져 함에 있다 할지라」이 글은 삼의당김씨가 남긴 유고150여편중 첫머리에 나오는 자서(自序)의 글이 다음 몇편의 시문을 소개한다.

    높은 뜻 / 아니시면 / 어이타 / 남가시리
    오늘의 / 이별잔은 / 물에잠긴 / 저 달이나
    오실댄 / 낙양구름을 / 부디몰고 / 오소서

    천리길 / 달리시고 / 구만리를 / 나시려든
    하물며 / 하챦은 몸 / 님 가슴에 / 두시오리
    낭군님 / 그 크신 뜻을 / 한사코 / 이루소서

    하챦은 / 이 몸두고 / 못잊어 / 하시릿가
    입은옷 / 던진일은 / 나라위한 / 큰일이나
    책지고 / 떠나신 뜻은 / 더욱 크신 / 일이라오

    삼춘의 / 따스한 날 / 즐거이 / 떠나시니
    늙으신 / 어버이도 / 장히여겨 / 기쁘시다
    기필코 / 금의환향을 / 두손모아 / 비옵니다

사실 세속적인 안일을 포기하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어려운살림을 혼자꾸려가면서도 항상 낭군의 입신양명만을 손꼽아 비는 생활로 좋은 청춘을 다 보낸 삼의당 김씨이기에 자연 그의 문학적 주제는「은근한 기다림이나 설움」이 아닐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추규사(秋閨詞)>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호올로 / 사창(紗窓)가를 / 함없이 / 거니노니          
    어느듯 / 밤도이제 / 깊을대로 / 깊구나
    헝클진 / 머리만지며 / 등신(燈心)만 / 적셔보오

    저멀리 / 떠나신채 / 기별없는 / 무정한 님
    그리운 / 심사(心思)만은 / 어이할 수 / 없구나
    열두줄 / 골라잡고서 / 그리운 정 / 띄어보오
 
    수탄(獸炭)을 / 피워보니 / 저다지 / 잘타오
    한줄기 / 저 연기가 / 차거움을 / 더하노나
    내 홀로 / 지새는 이밤 / 한해처럼 / 길고녀

    오동잎에 / 떨어지는 / 처량한 / 저 빗소리
    시름젖은 / 이내맘을 / 더욱더 / 섧게하오
    살며시 / 병풍두르고 / 잠을 청해 / 본다오

    가을밤 / 깊고 깊어 / 오경에 / 가까운데
    잠잃은 / 이내몸이 / 창밖을 / 보옵나니
    빈 뜰악 / 온가지마다 / 밝은 달만 / 가득하오
   
    빈 이불 / 부여안고 / 님찾아 / 헤매노니
    님께서 / 바란대로 / 웃고들어 / 오시이다
    좋아라 / 깜짝반기니 / 허망코나 / 내의 꿈

    깊은밤 / 밝은 달만 / 저녁재에 / 가득하고
    님그리는 / 이맘을 / 하소할길 / 없는데
    그뉘 / 옥피리불며 / 성을너머 / 가는가?

    가엾다 / 외로히 / 홀로새는 / 이한밤
    그리움이 / 사모쳐 / 이리뒤척 / 저리뒤척
    님뵈올 / 단꿈마져도 / 이룰 수 없고녀

    공작그린 / 병풍도 / 비취놓은 / 이불도
    님없는 / 빈방엔 / 하릴없는 / 물건이라
    차가운 / 가을달빛에 / 마음더욱 / 섧으오

    덩그러이 / 솟아밝은 / 청천의 / 저달보고
    님그리는 / 내 정대로 / 님도 날 / 기리시니
    두어라 / 우리 두맘을 / 모두비쳐 / 주옵소서


(시인 부부의 영정)

여류시인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

비록 시골 아낙이었으나, 그 남긴 글이 좋아 각 대학교, 특히 여자 대학의 국문학, 한문학과에서 교과서처럼 채택되어 배워 올뿐만이 아니라, 그 작품을 연구하여 박사학위가 나오는가하면, 그 박사학위 취득자는 현직 교수로 활동하고, 여러 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이 통과되고 있는 조선조 말의 한 시인이 있으니 남원 출신 여류시인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이다.

조선조의 왕으로서 영조는 52년이나 되는 가장 오랫동안 왕 노릇한 임금이다. 그 후반기에 접어드는 영조 42년은 서기 1769년으로 기축(己丑)년이다. 그 해 전라북도 남원에서, 여러 대대로 벼슬을 해보지 못한 향반(鄕班)이었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한 여자 아기가 출생하였는데, 그가 성장하여 가난한 집안 살림을 꾸려가면서 우리 역사상, 여성으로서 가장 많은, 257 편이나 되는 시문을 남긴 삼의당 김씨이다.

전라북도는 고래로 이름난 여성 문인이 여럿 배출된 지역으로, 백제 시대에는 저 유명한 <정읍사>로 유명하고, 조선조에서는 부안에서 이매창이 기녀문학을 일으키였으며, 조선조 후기에는 남원의 가정 주부로서 삼의당 김씨가 있는가 하면, 근년에는 <혼불>로 이름 높았던 최명희 소설가가 있다.  

1. 매화 기르던 후손과 결혼.

삼의당은 직필(直筆) 사관(史官)으로 이름 높았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후손이다. 김일손은 경북 청도 출신인데, 그의 나이 34세 때인 연산군 4년에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이극돈이 역사 편찬의 당상관이 되었는데, 김일손은 춘추관 사관이었다. 이때에 그가 쓴 사초(史草)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과 이극돈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비행을 그대로 쓴 것이, 이극돈측의 훈구파들에 의하여 연산군에게 고하게 되여 영남 학파의 신진 선비들을 대거 숙청한 이른바 무오사화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사화로 이미 고인이 된 김종직은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탁영은 처형되었는데 당시 신진 사류 70여명이 처형되고 혹은 귀양가는 등 역사상 유례 없는 대 참사였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 직필 사관 탁영의 11대손 김인혁(金仁赫)의 따님이 바로 삼의당 김씨이다.

집안은 어지간히 가난하였다. 전해오는 기록, 즉 남원문화원에서 간행한 <남원의 문화유산>에 의하면, 남원시 향교동 유천 마을(당시 지명은 棲鳳)에서 출생하여 자라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 정상적으로 배우지를 못하고 있던 차, 마침 그 마을에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당이 있었다. 그녀는 서당과 향교의 담 벽에 몰래 붙어 서서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언문과 한문을 깨우쳤다. 그리고는 소녀시절부터 시문을 창작하였다. 출가하기 전에 창작한 것으로 보이는 시작품은 <독서유감(讀書有感>등 서너 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삼의당은 자기가 탁영 김일손의 후손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바가 있다. 탁영은 일찍이 28세의 나이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외교사신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 때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많은 서예품과 특히 소학집설(小學集說)등도 탁영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져와 보급된 것으로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한바가 있다.  

삼의당은 죽기전 작품들을 손수 정리하여 한데 묶고 스스로 서문을 썼는데 "일찌기  언문으로  소학(小學)을 읽어 깨우쳤다."고 썼는데 그의 선대 할아버지 탁영이 소학을 처음으로 조선조에 가져온 것을 대대로 내려오면서 들었기에 특별히 소학을 지칭하여 거론하였으리라.

삼의당이 자기 문집에 써 놓은 서문은 매우 간략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한 어리석은 호남의 부인네로서 깊은 안방에서 나고 자랐다. 비록 경전과 역사 서를 널리 배우지는 못했으나,  일찍이 언문으로 소학을  읽어 깨우쳤고, 미루어서 한문을 통달하여 여러 학자들의 글을 읽었다. 그렇다고 하여 어찌 짧은 글과 무딘 솜씨를 들어 세상사람들의 나무람을 받으리요. 다만 호정 (戶庭) 안에서 본대로 들은 대로 또 지내는 대로를 혹은 말로 혹은 시로 남겨 느낀 정대로 맡겨 써 놓는 것은 내 스스로 뒷날에 좋은 거울과 법도를 삼고 져 함에 있다 할 것이다」

어언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그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 같은 나이에, 같은 생일의 진주 하씨와 결혼하였다. 남편의 이름은 하립(河립)이다. 河립의 선대는 오늘날의 경북 산청군의 남사 마을에서 매화를 기르면서 후일을 기약한 하즙(河楫)이다. 하즙이 기르던 매화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아온 매화나무로, 지금도 분양매(汾陽梅)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는 매화나무이다. 오늘도 이 매화나무 아래에는 하즙이 쓴 <매화> 시가 시비(詩碑)에 기록되어 매화나무와 함께 나란히 서있다.

하즙의 증손 하연(河演)은 세종말 문종초기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 후손이 삼의당의 남편 河립이다. 삼의당 김씨 부부의 선대는 이렇듯 당당한 기개를 지녔고, 고관 대작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수 백년을 내려오면서 선대의 고향을 떠나 그 부모들은 전라도 남원에서 살면서 김해김씨의 후손 삼의당과, 진주 하씨의 후손 하립은 부부가 되었다.

2. 소녀시절의 시작품.

어려운 살림에도, 유교사회 체제하의 여자 신분으로서 어려서 언문을 깨우치고, 미루어 한문을 통달하여, 옛 경(經), 서(書)와 여러 학자들의 자(子). 집(集)을 섭렵하였다는 것을 그가 남긴 짧은 서문에서 알 수가 있다. 그녀의 작품은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쓴 서정시 가 많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소녀시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 한편은 다음과 같다.

<비녀 꽂는 나이에 읇다 ( 年吟-계년음)>  

十三顔如花(십삼안여화)- 열 세 살 얼굴은 꽃과 같고,
十五語如絲(십오어여사)- 열 다섯 살 말솜씨는 실타래 같네.
內則從姆聽(내칙종모청)- 내칙 편은 이모 님께 들었고,
新粧學母爲(신장학모의)- 치장하는 법 어머님께 배웠네.

-중략-

早讀聖人書(조독성인서) - 어려서 성인의 책을 읽어 왔기로,
능知聖人禮(능지성인례) - 성인의 가르침을 능히 알겠네.
禮儀三千中(예의삼천중) - 삼천 가지 많고 많은 예의 거동가운데,
最詳男女別(최산남녀별) - 남녀간의 구별 법이 가장 자상하네.

-하략-

위 시 제목의 계년( 年)이란 여자가 15세가 되어 처음으로 비녀를 꽂는 나이를 이르는 어휘이다. 삼의당 김씨가 쓴 소녀시절의 시작품 중에 <가지에 만발한 꽃 (花滿枝-화만지)>, <讀書有感(독서유감)>, 언니가 시집갈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送兄于歸(송형우귀)>등 세 편이 더 있다.  

3. 마음은 선경(仙境)인데 육신이 고달픈 결혼생활.

삼의당은 어렸을 때에도 어려운 가정 생활에 고달픈 나날을 보냈으나, 결혼생활 역시 평탄하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남편을 출세시키려는 욕망과, 없는 살림에 시부모들의 봉양함에 더욱 그랬다. 남편 河립은 여러 차래 과거 시험을 보았으나, 그 때마다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다섯 형제 중에, 남편이 세 째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한 탓으로, 삼의당은 자진하여 시부모를 모시게 되었다.

거기에다, 없는 농촌 생활에 남편의 출세를 위하여  10년 가까이 남편을 서울로 유학시키면서 낮에는 농사일로, 밤에는 길쌈으로 고달팠으나, 근면과 성실을 다하여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였다.  남편을 서울에 보내고 여러 편의 격려문장과 시를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시가  <서울 계신 임에게(寄在京夫子 -기재경부자 )>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女兒柔質易傷心(여아유질이상심) - 여자라서 마음 약해 상심하기 쉬워도,
所以相思每發吟(소이상사매발음) - 그립고 보고프면 매번 시를  읊지요.
大丈夫當身在外(대장부당신재외) - 당신은 대장부라 몸이 밖에 계셔도,
回頭莫念洞房深(회두막념동방심) - 머리 돌려 깊은 규방 생각지 마오.

절망과 좌절 속에 희망으로 자신을 다지면서 서울에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또한편의 시 <추야월 (秋夜月  가을 달밤에)>는 이렇다.

一月兩地照(일월양지조) - 달은 하나로되 두 곳 땅을 비추는데
二人千里隔(이인천리격) - 두 사람은 천리 먼 곳 떨어져 있네.
願隨此月影(원수차월영) - 원하건대 밝은 달 빛 쫓아 갈 수 있다면,
夜夜熙君側(야야희군측) - 밤마다 낭군 곁을 밝혀주고 싶어라.  

고대하던 남편의 벼슬길은 열리지 않고, 마음은 답답한 어느 날 휘황한 달빛을 보고, 할 수만 있다면 이 밝은 달빛을 남편의 공부방에 비춰주고 싶다는 소박한 표현이다. 그러나 삼의당의 여러 시내용을 보면 마음만은 선경에 있다. 시 제목을 <봄날에 읆는 시(춘일즉사)>이다

桃花灼灼滿地開(도화작작만지개)- 복사꽃이 땅에 가득 찬란하게 피었는데,
恰似機頭紅綿裁(흡사기두홍면재)- 배틀 머리 잘려 나온 붉은 비단 흡사하네.
莫遣東風任吹去(막견동풍임취거)- 셋 바람아 마음대로 불어대지 마오,
故敎山鳥好含來(고교산조호함래)- 예스럽게 산새들이 고이 물로 오리라.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내용의 시이다. 그러나 시의 내용이 명쾌하지는 못하다. 그것은 삼의당 시인의 가슴속에 항상 고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다른 한 편의 기 <오월 단오(五月端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黃梅細雨濕輕煙(황매세우습경연)- 보슬비에 노란 매화 가벼운 연기에 젖고
簾外幽禽喚晝眠(염외유금환주면)- 주렴 밖 그윽한 새 울음소리 낮잠 깨우네.
擾亂東 多如盤(요란동린다여반)- 요란한 동역 마을 많은 사람 무리 지어,
綠楊陰裡送 韆(녹양음리송추천)- 푸른 버드나무 그늘 속에 그네 밀치네.

4. 효경(孝敬)과 효순(孝順)의 실천자.

부모와 조상에게 효도하고 잘 공경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 삼의당은 없는 살림에 시부모 봉양하느라 정성을 다 하였다. 삼의당 시인의 평소 시부모 공경하는 마음을 <무제(無題)>라는 시에서 였 볼 수 있다.

朝夕入廚下(조삭입주하)- 밤낮으로 부엌에 드나들지만,
廚下乏甘旨(조하핍감지)- 부엌에는 맛 갈 좋은 음식 없다네.
剪髮非爲賓(전방비위빈)- 머리를 자른 것은 손님 위함 아니고,
堂上有父母(당상유부모)- 안방에 모셔놓은 시부모님 받들기 위함일세.

모자라는 살림에 부모 공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긴 머리를 잘라 팔아서 부모를 봉양하였다는 시내용이다. 삼의당(三宜堂)이란 남편 河립이 지어준 당호였다. `삼의당`이란 마땅한 세 가지 일을 수행한다는 의미였다.  첫째로 아내로서 남편을 잘 보살펴 왔고, 두 째로 비록 세 째 며느리이기는 하나 스스로 자원하여 시부모를 섬기며 잘 봉양하고, 세 째로 형제간에 우애하는데 앞장선다 하여 이러한 당호를 지어 주면서 남편인 河립은 그날 집안 주변을 정리 정돈하고 꽃으로 방안을 단장하여 놓고, 이러한 당호를 지어 주었다고 시인 삼의당은 술회하는 글을 남겼다.

5. 삼의당 시의 시어(詩語)에 관한 깊은 글 맛.

삼의당 시인이 소녀시절에 쓴 작품으로 알려저 오고 있닌 시중에는 <가지에 만발한 꽃 (花滿枝-화만지)>가 있다.

帶方城上月如眉(대방성상월여미) - 대방성의 위에 뜬달  눈썹과 같고,
帶方城下花滿枝(대방성하화만지) - 대방성의  아래 핀 꽃, 가지마다 가득하네.
生憎花開芳易歇(생증화개방이헐) - 피어난 꽃 꽃다우나 얄밉게도 쉬이 지니,
每羨月來長有期(매선월래장유기) - 오래도록 기약 있게 뜨는 달이 탐나네.

남원시와 남원문화원에서는 이 시를 삼의당 김씨의 대표적인 시로 정하고 1991년에 교룡산성 경내에 시비를 세우면서 이 시를 새겨 너었다.(맨 앞 사진 참조).

시인이 어떠한 시어(詩語)로 시를 쓰는가에 따라 그 시인의 글 맛이 깊은가를 알 수가 있다. 위의 시중에 생증(生憎)이란 시어는 "몹시 얄미워서 지극히 한탄 스럽다" 는 뜻으로, 여느 경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당·송 대의 시인이 시어로 쓴 어휘일 뿐이다. 꽃이 피였으나, 쉬이 지고 향기마저 살아져 버리니, 꽃과 달을 비겨서, 그 꽃이 곱기는 해도 얄밉도록 한탄 스럽다 는 이 시어로서의 표현이 꽃을 두고 한 표현으로는 이것만으로도 소녀였던 삼의당의 글 맛이 얼마나 뛰어나고, 깊은가를 알 수가 있다.

생증(生憎)이란 시어는 초당사걸(初唐四傑)의 한사람인 노조린(盧照 )이 그의 시<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시어이다.  초당사걸(初唐四杰)이란 당 태종 년간(627-649)에 출현한 이름난 문장가들로  왕발(王勃:650-676)·양형(楊炯:650-693?)·노조린(盧照 :635?-689?)·낙빈왕(駱賓王:640?-684)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을 약칭하여 王, 楊, 盧, 駱,이라 불러오고 있다.

당나라 초기에 이 네 사람은 육조시대의 시풍을 수용하면서도 개혁과 창조에 노력하여 초당의 시풍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모두 특히 시를 잘 지었고,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이러한 호칭이 붙게 되었다. 유약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당나라 초기의 시풍에 반대하여, 궁중의 향락 생활만을 묘사한 협소한 영역을 벗어나 도시·변방·자연에 눈을 돌렸으며 언어의 단련, 풍부한 문체, 청신한 풍격 등을 중시했다. 시대적인 모습을 반영했고 율시(律詩)의 규격화와 가행체(歌行體)의 성숙을 촉진하여, 성당(盛唐)시대의 시가 발전을 위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 진안 마이산 아래 탑영지 윗자락의 삼의당 부부 시비)

노조린은 병마에 시달리다 물에 투신하여 불행하게 죽었다. 오래 살아 보려는 욕망에서 선가의 단약(丹藥)을 과량 복용한 것이, 단약에 함유 된 수은 중독으로 손발이 마비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질병을 풀어버린다`는 의미의 <석질문(釋疾文)> 3수를 남기고 투신 자살한 인물로, 삼의당이 노조린의 시어를 골라 쓴 것이 고생스러웠든 삼의당의 생애와 무관하지를 않다는 느낌이 든다.

삼의당의 시를 살펴보자면 감동적인 내용이 많다. 특히 시란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야 시다운 맛이 있다. 소녀시절에 썻다고 전해오는 <독서유감(讀書遺憾)>중의 한 시 구절은 다음과 같다.

 鄭衛音何載在詩(정위음하재재시)- 鄭.衛나라의 음탕한 노래 어이 시경에 실려 있을까.
人心懲創莫如斯(인심징창막여사)-사람 마음 경계함이 이만 한 것 더 없다네.
世人不識宣尼意(세인불식선니의)-세상사람들아 공자 님 베푼 뜻을 알지 못하면서,
惹出淫情反效爲(야출음정반효위)-음란스런 꼬투리 끌어 내어, 본 받는 일 뒤집는가.

위의 시에서 징창(懲創)이란 시어는 삼의당 시인 보다 천년 가까이 먼저 살다 간 당나라의 이름난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의 악양루(岳陽樓) 시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시어이다. `예전의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스스로 경계함`의 의미를 압축하여 사용한 시어로 이 시에 써야할 딱 맞는 시어이다. 야출(惹出)이란 어휘 또한 `어떤 일을 사건의 꼬투리로 이끌어 낸다`는 뜻으로 함축성 있는 시를 쓰려고 이러한 시어를 골라 사용하였을 것이다.

6. 처절한 슬픔 속에 절망과 좌절을 초연한 여인상.

몰락한 양반 집의 아녀자로서 남편의 한양공부 뒷바라지, 시부모 봉양하기, 세 명의 딸 키우기, 농사일로 가정 꾸려나가기란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많지도 않던 농토는 이미 가정 살림 꾸리기에 모자라 딴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만은 빗에 쪼들리는 처지였다. 남편이 벼슬욕심에 한양에 올라 간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매번 낙방한 남편도 더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10년 만에 낙향하고 말았다. 남편이 시골집에 돌아 왔으나, 살 길이 더욱 막막하였다.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고향을 떠나 살 것을 제의 받는다. 진주 하씨의 선대 묘소가 있는 진안 땅 내동( 東) 산자락에 가면 선대 묘소 아래 야산을 일구어 밭농사를 충분하게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의당 시인의 나이 32세 되던 1801년, 남원 땅을 떠나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거 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뜻에 따라 삶의 보금자리를 옮긴 이후 나아지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마침 부모상을 당하였는데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빚내어 치렀다.

빚에 쪼들리는 남편은, 돈을 마련하여 오겠다며 눈물로 집을 나섰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남편 河립은 가야산 깊은 계곡에서 산삼 몇 뿌리를 캐게 되어 빚을 갚음으로서 가난을 극복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가정의 평온함은 잠시이고, 모진 액운이 몰아 닥치는 것이었다. 애지중지 키우든 큰딸이 나이 열 여덟에 몹쓸 병에 비명 횡사 하였다. 그 후 일년도 채 안되어, 세 째 딸 마저 몹쓸 병고에 시달리다가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삼의당 시인이 남겨 놓은 시문 속에 모두다 쓰여 있다. 큰딸의 죽음에 남겨놓은 <제장녀문(祭長女文)>은 눈물 없이 못 읽는 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인 삼의당은 처절한 허탈감과 크나큰 슬픔을 초연(超然)하였다. 항상 몸을 단정히 하고, 얼굴을 정색으로 하며 엄연한 자세로 살아갔다. 다음의 시작품 <시골 마을에 살며 읊다(村居卽事)>속에 그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棲鳳村中生長(서봉촌중생장)- 서봉 마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來東山下寓居(내동산하우거)- 내동산 아래에서 타향살이 살고 있네.
蕭灑數間茅屋(소쇄수간모옥)- 몇칸의 초라한 띠 집을 깨끗이 쓸고 앉아,
好讀一床詩書(호독일상시서)- 詩書 읽는 즐거움으로 날을 보내오.  


시인 삼의당의 나이 중년 넘도록 아들이 없어 후사를 염려하던 중에, 참으로 다행스럽게 나이 40이 넘어 아들하나를 두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인 1823년, 시인의 나이 54세에 세상을 마치었다.. 그 아들이 후사를 이여 내려오면서, 오늘날까지 진안 인근에 약 30여 가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전주시에 거주하고 있는 河在敬 (063-278-3855) 후손 대표의 설명이다. 시인 삼의당의 유택은 남편과 합폄으로 전북 진안군 백운면 오정리 마을 뒤에 있다.

7. 삼의당 시인의 자료와 시비들.

삼의당 시인의 생애와 문학을 엿 볼 수 있는 자료는 삼의당김부인유고(三宜堂金夫人遺稿)이다. 이 책은 삼의당 자신에 의하여 글들을 모아 필사본으로 남긴 것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 가까이 되던 1930년에 전남 광주 삼기당(三奇堂)에서 석판으로 출간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다. 이 책은 순 한문으로 2권 1책 30 쪽의 분량이다. 제 1권에는 111편 235수의 한시, 제 2권에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6편을 비롯하여 제문, 서문, 잡문 등 도합 22편이 들어 있어 다양한 문장의 내용과 형식을 였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삼의당의 시는 그 소재(素材)나 주제(主題)가 자연과의 교감적 서정, 농촌생활의 사실적 표현, 세시풍속의 이해와, 전통문화의 고취 등등이며, 시문 속에 윤리 실천을 부르짖었고, 고뇌를 승화시키는 표현을 하였으며, 절제와 극기의 내용을 미학적으로 표현하여, 광복 이후에 여러 여자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에서 교양 과목으로 채택되어 배워오고 있다.

이 시인의 글을 연구하여 1990년 2월에 김덕수(金德洙)박사의 논문이 <김삼의당의 시문학 연구>로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이래에 여러 대학교에서 계속하여 학위 논문으로 연구되어 오고 있다.

1982년에 전북 진안군 문화원에서 주관이 되어 여러 군민의 추렴으로 삼의당 부부의 시비를 마이산 아래 탑영지 윗자락에 세웠으며, 1994년에 진안군청에서 주관이 되어, 부부의 시비 위 편으로 명려각(明麗閣)을 지어 삼의당 부부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명(明)은 낮과 밤의 음양 즉 부부를 의미하고, 려(麗)는 삼의당 시인의 시문이 하도미려(美麗)하여 명려각이라고 명명 하였다는 후손의 설명이다.

1991년에는 남원 문화원에서 주관이 되어, 교룡산성 경내에 삼의당 시인의 시비를 새웠으며, 남원시 향교동 유천 마을이 삼의당 시인의 출생마을로 고증이 되자 고증에 앞장 섯던 노상준 남원 전 문화원장과 임기준 마을개발위원장, 지홍수 통장
등이 주관이 되어 마을 출연금으로 이 마을 회관 앞에도 1999년 5월 28일에 삼의당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이 글은 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간행 <동인>3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