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도(再圖)선조님의 효행을 기리는 유적비 청주시 강내면 석화리 석담
 

孝子하재도(河再圖)

서원 하재도(河再圖)는 진산부원군 윤원(允源) 호 고헌(苦軒)의 11세손이요, 병부상서 증 좌의정 휘 자종(自宗) 호 목옹(木翁)의 10세손이다. 5대조 휘 운(雲)은 참봉인데 임진난에 공을 세우셨다. 증조 동지중추부사 휘 덕원(德源)은 효성이 출천하여 부친 병환이 위중할 때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깨어 피를 드리셨다. 시묘살이와 거상의 사실이 효행록에 실려 있다. 공이 충효 고가에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효우가 순독하여 주경야독으로 부모의 뜻과 몸을 봉양하였다. 부친 병환이 위중할 때 목욕재계하여 하느님께 출원하여 회생을 얻었다 그 후 양친상을 당하여서는 꼭 법을 따라 하고 지나치게 애통함이 시종여일 하였다. 壬辰(1712)년 흉년을 당하여서는 가산을 방매하여 원근 친척을 구휼하니, 향중 사람들이 효선비(孝善碑)를 세워 이르기를 「부모를 사랑한 남은 혜택이 남에게 뻗쳤다」하니 공이 듣고 놀라 부끄러이 여겨 그 비를 뽑아 없애서 겸양의 뜻을 나타냈다.

공의 아드님 첨지공 용택(龍宅)이 역시 이런 조부의 손자, 이런 아버지의 아들이어서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효성이 어릴 때부터 특이하더니, 부친상을 당함에 이르러 장례의 절차와 거상의 예법을 선친과 같이 하여 삼 년상 내내 날마다 반드시 성묘하여 잣나무를 잡고 애통하더니, 하루는 심신이 홀연 놀라 떨려서 집에 돌아가서도 심정이 가라앉지 아니하므로, 이장하기를 결심하고 택일도 아니 하고 즉시 파묘(破墓)한즉 과연 벌레의 해가 미쳐 관구를 둘 수 없었는지라, 이에 애훼기절(哀毁幾絶)함이 초상때와 같았다. 부모의 체백(體魄)이 혹 편하지 못하면 자손의 심신이 놀라 떨림은 신도가 감림하여 그 효성에 감동하여 도와줌이 아니겠는가? 또, 그 편모님을 받드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편모님이 병중에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잉어회만 생각났는데, 때가 마침 엄동설한이라 구할 길이 없어 앞 냇가에 가서 얼음을 두드리며 호곡하니, 문득 잉어 떼가 그물 속에 뛰어들기에 이를 잡아 즉시 공양하여 마침내 효과를 얻었으니, 이 효감소치(孝感所致)를 누가 흠경하지 아니하리요? 그 후 상을 당함에 초종장례를 전상과 같이 하여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피나게 3년을 울며 나날이 성묘하여 애통함을 한결같이 하였으니, 생사장제(生死葬祭)에 정성과 예를 다함이 이와 같았다.

임계 양년의 흉년을 당하여는 재산과 곡식을 모두 기울여 가난한 사람을 구원함으로써 효우의 덕을 사람에게 끼쳐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다. 향인들이 또 효선비를 세우니, 공이 듣고 즉시 비를 빼 치워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우리 부친도 오히려 기뻐하지 아니하셨거늘, 어찌 내가 감히 이를 받으리요? 이것은 나의 불초지죄를 보태는 것일 뿐이다」하셨다. 한 가정에서 부자 효선지덕이 전후로 서로 이어져두 비의 찬송을 사람마다 일컬었으니, 어쩌면 그토록 아름답고 성하던고? 또, 5대조 첨정공의 충절과 증조 동지사공의 효성이 저렇듯 탁이하였으므로 4대의 충과 효와 선을 사람들이 조정에 호소하였으니 실적을 가히 알지라. 합하여 정포지전(旌褒之典)을 내리기를 애원하였더니, 비답(批答)에 「소장(疎壯)을 보아 사실을 알았는 바, 양대의 효행이 탁이하니 정포를 베풂이 의당한 일이라」하고 1834년에 정려(旌閭)를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