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하씨 열녀비(晋陽河氏烈行碑)

소재지 : 창녕 반포 신전리(상대포 구제)

남편(차형규)이 도둑의 횡포로 인하여 죽자 두 달 후 남편을 따라 자진한 진양 하씨의 열행을 기려 세운 비다. 비는 당초 비각 안에 있었는데 6 25때 포탄에 맞아 파손되어 복구치 못하고 비만 보존되고 있는데 비석의 높이는 150cm로 크기는 22.5cm×43.5cm이며 옥개석이(높이 40cm) 있다.
1923년(癸亥) 9월 하순에 건립된 이 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진양 하씨는 의령군 의령면 중마리에서 태어났는데 가세가 가난하였으나 인물이 출중하여 반포리 반개에 살았던 만석꾼의 가문인 연안 차씨의 장남인 차형규와 15세에 결혼하였다. 하씨는 시부모에게 효성이 있어 항상 시모의 머리를 빗질하여 주고 지성껏 모심에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부곡 지이다리{茵橋}에 근거를 둔 도둑 떼들이 아지에 있던 차형규 조모의 무덤을 파서, "너희 조모의 머리를 우리가 갖고있으니 대구 고기 한 짝과 술 한 통 그리고 돈을 가져와서 머리를 찾아가라." 하였다.

차씨 집에서는 그 외침에 놀라 이튿날 밤 시키는 대로 가져갔더니 숲 속에 가져온 물건을 두고 가라하여 그대로 내려놓고 돌아 왔다. 그 다음날 차형규가 조모 산소에 가보니 과연 시신의 한 삽 정도 자른 머리 부분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수 묻어 놓고 돌아오다가 너무나 심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그로 인하여 큰 병을 얻어 두 달 동안 고생을 하는데 백약이 무효라 결국 사망하였다. 진양 하씨는 남편을 잊지 못하여 매일 남편의 무덤에 가서 통곡함에 가족들이 찾아가서 데려오곤 하였다.

그때 차씨 가문은 성사리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는데 남편의 무덤은 성사리 뒷산에 있었고, 진양 하씨는 이 뒷산을 밤에도 혼자 올라가서 무덤에서 통곡하였던 것이다. 남편이 죽은지 2개월이 되던 어느 비오는 날, 소복 단장을 하고서 간수를 마시고 미역을 입에 물고 남편 빈소 제상아래 곱게 누워 자진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남편 묘소 맞은 편 산에 있다.
차씨 가문에서 열녀비를 세우기로 작정하고 영산향교의 승낙을 요청하니 딸 넷을 둔 어미가 남편만 그리워 했다하여 일부 반대를 했으나 결국 목숨을 바쳐 남편을 사랑한 그 뜻을 칭찬하고 열녀비를 세워도 좋다고 승낙하였다. 비문과 서류를 다 갖추어 준비중이었는데 이 일을 담당하였던 차형규의 동생이 갑자기 사망하고 이에 놀란 차형규 아버지도 한달 후 사망하자 그만 집안이 몰락하여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김기봉이 신영규 이주목 김연동 등과 합심하여 추진하여 비를 세우고 정려각도 지었다. 정려각의 이름을 순열각(殉烈閣)이라 했다. 이 순열각안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소변을 하면 반드시 아이가 병을 얻었으므로 인근 마을 사람들도 두렵게 여기고 스스로 제사도 모시었다 한다.
(증언자 : 마산리 홍포 차갑이 1906년생 하씨의 시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