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공 20세손 휘 만리(萬里)의 효행을 기린비 전북 임실군 둔남면 방주골
 

孝子 하만리(河萬里)

용성(龍城) 부편 둔덕(屯德)의 위쪽에 옛날 처사 하공이 계셨는데 휘는 만리(萬里)요 자는 자장(子長)이요 호는 양진당(養眞堂)이다 포의(布衣)로서 돌아가셨는데 오수(獒樹)시장 사람들이 그 죽음을 듣고 시장을 파하고 마을 앞에 모여 곡(哭)을 하였다. 하니 아! 어떻게 수양하였으면 남들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을까? 무릇 세상에서 남의 선대를 일컬을 때 반드시 그 명성과 벼슬을 들어 말하는데 공은 궁(窮)한 사람이로되 많은 세대가 지난 지금에도 자손들을 남이 반드시 양진당의 후예라고 일컬으니 또 어떻게 수양하였으면 후세 사람들이 그와 같이 할 수 있었을까? 대개 공이 학문에 전심하고 사우(士友)들과 사귀어 덕을 보탬이 많았고 몸소 덕행을 실천하여 군친(君親)의 윤리를 독실히 하여 맑은 지조가 족히 풍속을 깨우치고 아름다운 가르침이 남에게 미침이 있어 비록 자신은 궁색하였으나 능히 남으로 하여금 의를 칭송하게 함이 무궁하였으니 이것이 그 소이연(所以然)이다 어찌 불의로 부귀한자와 비하리요?

후손 한협(漢浹)과 달원(達源)이 옛 징사(徵士) 동강(東岡) 최시옹(崔是翁)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 나에게 명(銘)을 청하는데 내가 이 고을 원으로 와서 이미 처사(處士)의 풍범을 들었거늘 하물며 최징사(崔徵士)의 글로 징신(徵信)됨이 있음에랴? 드디어 행장을  살펴 이 글을 쓰노라. 하씨는 진양을 관향으로 하는 대성(大姓)인 바 휘 중룡(仲龍)은 안렴사로서 처음으로 남원에서 살 게 되었고 휘 여덕(如德)은 현감인데 청백리(淸白吏)로 일컬어졌고 휘 귀종(貴淙)은 통덕랑인데 이 분이 공의 고조이시다. 조부님 휘는 자렴(自濂)인데 효행이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셨고 황고의 휘는 극윤(克潤)인데 도사(都事)를 지내셨다. 선비(先비)는 남원 양씨(南原梁氏) 만성(萬成)의 따님인데 1597년 7월 2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이 일찍 황고를 여의었으나 성품이 밝고 총명하여 스스로 글을 사랑할 줄 알아 한 번 보면 곧 외웠으며 성리학을 좋아하여 일찍부터 고을에서 칭송되었다. 유시남(兪市南)과 종유(從遊)하였는데 시남(市南)이 말하기를「자장(子長)이 나를 따른 지가 오래나 일찍이 단아하고 방정(方正)한 말을 아니 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박현석(朴玄石) 윤명재(尹明齋)와 더불어 함께 계(契)를 만들어 나이를 잊고 사귀게 되었다. 성만 최행(崔荇)과 폄재 최온(崔蘊)과 천묵 이상형(李尙馨)은 모두 한 고을에서 그 어짊으로 추중받던 분들인데 공이 이웃하여 살면서 막역하게 사귀어 서로가 덕을 쌓는 자료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 바 학문에 전심하고 사우(師友)에게 보탬이 많았다고 한 소이이다.

공이 부모 섬김에 효성을 다하여 음식과 의복을 모두 손수 공봉(供奉)하였다. 나이 열일곱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님에게 병환이 있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어진 일이라 하였다. 모친이 병중에 생선을 먹고싶다 생각하시는데 때가 추운 겨울이라 공이 물가를 따라 얼음을 두드렸으나 고기를 잡을 도리가 없어 돌아오면서 마을 앞우물 가를 지나는데 샘물이 갑자기 파동치기에 구부려 살펴보니 한 자가 넘는 큰 고기가 있는지라 잡아다가 봉양하니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이 고기는 원래 이 샘에 있을 것이 아니니 이것은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일이라」고 하였다. 1632년 가을에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게 되자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니 종 돌동과 여종 율례가 또한 감동하여 차례로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렸네 이것은 효성이 남을 감동시킨 것이다.

드디어 상(喪)을 당하게 되자 슬퍼함이 법제에 지나쳐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끝까지 게을리 함이 없었다. 집 뒤에 단(壇)을 쌓아 매일 새벽에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다음으로 가묘(家廟)에 나아가 분향하고 재배하기를 늙도록 항상 일과로 삼으니 이것이 이른 바 몸소 덕행을 실천하여 임금과 어버이에의 윤리를 독실히 하였다 함이라.공이 젊었을 때 정인홍(鄭仁弘)이 공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하고 발을 들이게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미리 꿰뚫어 보는 식견에 감복하였다. 만년에 향시에 응시하였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천묵(李天默)이 당시 시험관이 되어 그 여러 번 실패한 것을 아깝게 여겨 가만히 그 정권(呈卷:시험 답안지)을 살펴보므로 공이 물색(物色:고르는 것)으로 얻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그가 움직임을 엿보아 정권을 올려 마침내 불합하니 이것이 이른 바 맑은 지조가 풍속을 깨우쳤다. 함이다, 늘 향당(鄕黨)에서 글 짓기를 위해 벗을 모을 때는공을 추대하여 강장(講長)으로 삼을새 한결같이 백록동규(白鹿洞規:중국의 유명한 서원의 규칙)를 좇아 교회(敎誨)함에 방소(方所)가 있었다.

공의 이름자(萬里)가 사람들이 말하는 사이에 말하기 쉬웠는데도 모든 생도들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백 리천리는 말하되 한 번도 감히 우연히라도 공의 이름자를 범하지 않았다, 사림(士林)들에게 추중됨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이른 바 아름다운 가르침이 남에게 미침이 있었다 함이다. 1671년 8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75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사림(士林)들 중 통석(痛惜)해하지 않는 자 없었고 저자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였으니 인성(仁聲)이 남에게 미침이 어찌 그리도 넓었던고? 배위 장수 황씨(長水黃氏)는 정언(廷彦)의 따님이다, 기일은 정월 23일이며 사동 사당동 간좌에 합장 되셨다. 4남 3녀를 두었는데 네 아드님은 이도(以道) 취도(就道) 기도(旣道) 홍도(弘道)이고 세 분따님은 조세명(趙世鳴) 정화주(鄭華胄) 한비(韓비)에게 출가하였다, 이에 명(銘)한다.

살아서는 고을에서 명망을 추앙하였고 죽음에는 저자를 파하고 곡하였네. 아름다워라 덕행이여! 사람의 심복(心服)함을 이루었네. 징사(徵士:崔是翁)가 실기를 기록한 바 그 말 속임 없도다 공의 가슴 속은 환하게 맑고 깨끗하였네 여기 이 한 말이 공을 새긴 말이라 할 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