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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陽河氏 司直公派

 

 

 

 

 

 

진양하씨 기원  |  분파  |  발상지  |  경류재  |  경모단

진양하씨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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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공 생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여사촌 예담마을 전경

남사마을  여사촌(餘沙村)

진양하씨 사직공파(晉陽河氏 司直公派) 발상지로 알려지고 있는 여사촌(餘沙村)은 晉州(진주)에서 서쪽으로 4십5리 되는 곳에 있으니 지리산 東쪽의 단구(丹丘)의 지역 이구산(尼丘山) 밑이요, 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여사촌 민속마을 이다  남사 예담촌 이라고도 한다 단속(斷俗)의 물이 앞뒤로 보호하듯 둘러 있고 신안강(新安江) 하류가 동남쪽을 지나가는 곳이다.진천 부원군(晉川府院君) 원정공(元正公) 송헌(松軒)선조님께서 이전부터 그 곳에 세거(世居)하셨으나 처음 어느 대부터 터를 잡으셨는지 는 자세히 알지못 한다.


쌍대석

남사마을 원정공(楫)선조님 유적비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하씨의 전성기에 예의가 노나라의 궐리(闕里)와 같았던 고로 산을 이구(尼丘)라 이름하였고, 동네 어귀 개울가에 쌍대석이 있는데, 감여(堪與:음양학)가 이르되, 「하씨가 귀현(貴顯)하는 것은 이 쌍대석 때문이다」고, 하니, 아전의 무리가, 받드는일이 고되므로, 가만히 꾀하여 무너뜨리니, 이때부터 하씨가 여사촌에서 거주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한다.


남사 원정공생가 사랑채

원정공께서 송악(松岳)에 거주하셨음과 고헌공(苦軒)께서 개경(開慶)과 양정(凉亭)에 거주하셨음은 모두 당시에 잠시 계셨음이요, 여사촌의 옛집은 그대로 있었으므로, 원정공께서 이 곳에서 돌아가시고, 문효공의 다섯 형제분과 네 분의 종형제께서 모두 이 곳에서 탄생하셨다. 통정공 강회백(通亭公姜淮伯)의 행장(行狀)에 문효공께서 젊으셨을 때 진곡(晉曲)에 집을 지으셨다 하였는데, 역시 여사촌의 옛터를 가리킨 것 같다.목옹공(木翁)께서 한양에서 사심으로 써 여사촌의 옛집이 외손 강씨(外孫姜氏)에게 속하게 되었고, 여러 대를 내려와 다른 사람에게 전매되었는데, 인조 때 후손 태계공 진께서 되돌려 받으셨다.

집 뜰에 매화나무(2011기준 수령 695여년)한 그루가 있는데 원정공께서 손수 심으셨다고 한다. 또 감나무 (2011기준 수령 630여년)한 그루가 있는데, 문효공께서 일곱 살때 손수 심으신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은 산청군 보호수로 지정 되어있다 송헌(松軒)은 송악산(松岳山)의 동쪽 기슭에 있었다 하나, 지금의 어느 곳인지는 상세하지 알지 못한다.원정공이 여환(旅宦)하실 때 지으신 것인데, 진양연고(晉陽聯藁)에, 「정연하지 못하나 정남을 향하여 있어서,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며, 소나무와 대나무가 심기어 족히 깊은 회포를 풀 만하다」고, 하였다. 공암 허형(孔巖許衡)과 더불어 도의계를 맺어 서로 늘 모여 한가히 즐겨 노시었다. 원정공께서 고향 집에서 돌아가신 후 오래 되어 송헌이 퇴폐해지므로, 목옹공께서 다시 수리하여 영모재(永慕齋)라 이름하고 자손에게 경계시키시되, 「비록 뒤에 다시 고쳐 짓더라도 반드시 옛 법을 지켜, 사치하게 하지 말라.」하시고, 사직 최저(司直崔渚)를 시켜 병풍을 만들게 하시어 선대의 검소한 덕풍을 보이시었다.


 남사 원정공 식수 원정매


 문효공 식수 감나무

개경은 진주의 동쪽 2리에 있으니, 비봉산(飛鳳山) 밑이요 옥봉(玉峯)의 입구이다. 촉석루가 서쪽에 있고 청천강(菁川江)이 그 남쪽을 지나 흐르는 바, 그 곳의 개경원(開慶院)은 고헌공(苦軒)께서 지으신 것이다. 고헌공께서 원수(元帥)로 계실 때 집을 생각하여 지으신 시(詩)에 양성정(養性亭)의 서쪽이요 촉석루의 동쪽이라 하신 곳이 이 곳이다. 교은 정 이오(郊隱鄭以吾)가 지은 개경원 기문(記文)에 경산 부사(京山府使) 하공 호보(河公浩甫:봉산군 유종 부군의 자)가 일찍이 옛 집 옆에 한 집을 세우고자 하였다고 하였으니, 개경에서의 거(居)함이 봉산군께 전하여진 것이다. 상고하건대, 봉산 부군의 묘소가 양주 땅에 있으니, 생각해 보면 그 아드님 지평공 윤(潤)께서 본조에서 벼슬하셨으니, 봉산군 역시 경성에 계셨던 것이 목옹공과 같았던 것 같다.

고헌공의 외손인 지평공 정기(持平公鄭其)가 경주에서 와서 개경에 살았는데, 그의 묘비(墓碑)에 「공은 예문관 제학 고헌공 하 윤원(河允源)의 외손인데, 그 모친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진양에 와서 살았다」고, 하였고, 또 그의 부인 강씨(姜氏)의 묘지(墓誌)를 살펴보니, 지평공이 늘 개경에서 살았다 하였으니, 개경 집 역시 외손에게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만력 병오보에 봉산군은 후손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숙종 경인년에 부사공 휘 덕휴(府使公諱德休)선조께서 함흥에 순찰사 일행으로 가셨을 때 함종(咸從)에 거주하시는 종씨를 만나 그 선계를 상고하니, 곧 봉산군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정조 계묘년에 은암공 휘 정익(隱庵公諱廷益)선조께서 관서 지방에 가신 일이 있어 함종에 사시는 하종협(河宗浹)씨를 만나시어 그분이 간수하신 계첩을 보시니, 봉산군의 아드님에 지평공 휘 윤 선조님이 계셨고, 그 아드님에 안주 목사 휘 한우(安州牧使諱漢佑)선조님이 계셔 세조 때 함종으로 귀양가셔 토민이 되셨다. 하였으니. 만력보가 임진왜란 후에 이루어졌고 함종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당시의 족보에 참여하지 못하였음이 당시 사정상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 친필


양정(凉亭)은 단성현 제 6 방(坊) 신안강 가에 있으니, 이구산과는 10리도 못 되는 거리에 있다. 단구지(丹邱誌)를 살펴보면, 진산 부원군 하윤원 선조님께서 양정을 강가에 지어 노년을 보내셨다 하였다. 아드님 군사공 휘 계종(郡事公諱啓宗)선조님께서 음관(蔭官)으로 문경 군사(聞慶郡事)를 지내시고, 고려가 망한 뒤 정대창담(鄭大昌潭) 가의 산골에 이거하셨기, 후세 사람들이 문경동이라 불렀으니, 실은 고헌공께서 노년을 위하여지으신 것인데, 율곡(栗谷:땅 이름)에서 어머님 시묘(侍墓)를 하실 때 돌아가시니, 강변의 양정은 막내 아드님 군사 부군에게 전해진 것이다. 문경공의 장자(長子) 중정공 숙(潚)의 후손이 여러 대에 걸쳐 진주 서쪽 신풍(新豊)에 거주하셨는데, 어느 대에 양정에서 옮겨 왔는지는 상고 할 수 없다. 차자(次子) 현감공 척(滌)에게 문효공께서 경상 감사로 계실 때 창녕 옥야에 터를 잡아 주시니 그 후손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안렴공 중룡(仲龍) 역시 문경공 아드님이신데, 진주에서 남원 둔덕으로 이주하시어 자손이 거주하게 되었다.

구경당(具慶堂)은 서울 돈의문(敦義門)밖에 있었다. 문효공께서 젊으실 때 진곡(晉曲)에 집을 지으신 바, 통정 강 회백이 장차 크게 쓰일 인물이심을 알고 서울로 가시기를 권하므로, 드디어 서울의 주동(鑄洞)에 사시게 되었다. 문효공 5형제님께서 조정에 벼슬하심으로 목옹(木翁)공께서 서울에 사시게 되었으나 고려 유신(高麗遺臣)으로 의리상 성안에 들어가지 않으시려 하여 돈의문(서대문)밖에 계셨으므로, 문효공께서 어버이 옆으로 이사하시어 구경당을 지어 봉양하시었다. 그 때 목옹공께서 마나님 정씨와 같이 80세가 넘으셨으나 강녕(康寧)하셨으므로, 세상이 영화롭다 여기고, 교은 정이오와 양촌 권근과 제학 최흥효와 판원사 조말생과 참판 신인손 등이 시(詩)로써 노래하였고, 청향 윤 회(淸香尹淮)가 그 일을 기록하셨다. 목옹공 내외분이 돌아가시고, 삼년상이 끝난 뒤, 문효공께서 수리하시되, 띠짚으로 하시고 그 곳에 거하시며 편액(扁額)을 고쳐 영모당(永慕堂)이라 하시었다. 모든 자질(子姪)님들이 기와로 바꿀 것을 청하니, 문효공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되, 「선대의 사시던 곳을 후손에 전함에 검소한 덕풍을 밝히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하시었다 문효공께서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장자(長子) 참판공 효명(孝明)께선 문효공보다 먼저 돌아가셨고 승사손(承祀孫) 현감공 복산(福山) 이하 오 세까지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승지공 태수께서 호서 문의(湖西文義)로 이주하셨고 참판공 계자(季子) 형조참판공 맹윤(孟潤)께서는 용인(龍仁)에서 거주하셨고 문효공 중자(仲子) 좌랑공 제명(悌明)의 자손은 인천(仁川), 부평(富平) 등지에 거주하였고 또 1670년경 제명(悌明)의 6대 후손인 계손(사직공파 19세)께서 무주 무풍(茂朱茂豊)으로 이거하여 살다가 돌아 가셔서 묘를 쓰신 이후 현재 340년간 면면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진산(辰山)은 정읍(井邑) 남쪽 십 리 거리에 있는데 대간공께서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휴양하시던 곳이라 대간공의 농장이 정읍에 있었으므로 아들 참의공 금(襟)께서 서울에서 자주로 내왕하셨다 하니 문효공 시(詩)에 모(某)가 호남에서 서울에 왔다 하신 것과 같다. 단종(端宗)때 문효공께서 돌아가셨고 선조(先朝) 대신들이 많이 피살하여 인심이 요란하니 대간공께서 기미를 예찰하시고 진산에 물러나 계시다가 돌아가시어 우산곡(牛山谷)에 안장되셨다. 참의공께서 칠 남(七男)을 두셨는데 모두 현달하셨다. 진산과 우산 사이에 칠송정(七松亭)이 있었는데 대개가 손수 심고 노시던 곳이었으므로 그 곳 주민들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당시에 여러 자제들이 벼슬이 높고 집들이 웅대하였으며 진산과 우산 사이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하씨의 소유물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전해지는 말이 진산의 안산에 암석이 홀(笏)을 잡은 듯 서 있는 것을 감여승이 잘못 판단하여 파괴한 후로 자손이 그 곳을 보존하지 못하고 호남 영남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한다.

참의공 자손들은 혹 이웃 고을로 옮기었고 혹 섬으로도 들어갔으며 중추공 여(礪)의 아드님 감사공 자청(自淸)께서는 진주 운곡(晉州雲谷)으로 돌아오셔서 후손이 지금 안계(安溪)에 거주하고 군수공 치(治)께서는 산수의 좋음을 취택하여 동복(同福)으로 이주하시어 자손이 거주하였다 중훈공 추(樞)께서는 일찍 돌아가시어 묘소도 실전 되었으며 거주하신 곳도 알 수 없으나 아드님 사직공 중산(仲山)의 묘소가 진주 땅에 있고 자손이 지금 진주에 거주하니 중훈공께서 서울에서 돌아가셨으면 대간공께서 정읍으로 내려가실 때 사직공의 연세가 십 세(十歲)가 못 되셨으니 서울에 두고 내려가시지는 아니하셨을 것이요 또 서울에서 진주로 바로 돌아오시지도 아니하시고 반드시 진산에 따라 오셨다가 감사공과 동시에 진주로 오신 듯하다.

연당(蓮塘)은 인천 소래산 밑에 있다. 문효공이 돌아가심에 셋째 아드님 동지공 우명(友明)께서 소래산에 받들어 안장하여 시묘살이하고 상을 마친 후에는 소래산 밑에 집을 지어 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호를 연당이라 하셨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문효공 및 정경부인 화상을 손수 그려 못 북쪽에 영당을 세우니(연산을묘 1495년 공의 화상을 함께 모셨다)문효공 및 공의 충효 정려문이 영당 밑에 있었다. 선조(宣祖) 때 연당과 충효 정려문을 합천 야로에 옮기니, 연당은 지금도 있고 못 위에 공의 효자 비각이 있으니, 부사 최 흔(崔昕)이 세운 비다. 동지공 승사손이 그 곳에 거주했는데 후손이 없다. 차손(次孫) 충순공 한필(漢弼)과 사직공 한우(漢佑)께서는 외가인 합천으로 옮겨 후손이 거주한다. 동지공 차자 현감공 철행(哲行) 후손도 합천에 거주한다. 계자(季子) 내금공 철년(哲年) 증손은 인천에 거주하였다. 여지승람을 상고해 보면 하씨의 거주하는 곳이 40고을이로되 지금 상고할 수 있는 것은 겨우 5.6 곳이니 이 외에 임시로 거주한 것은 다 중엽(中葉)부터 하씨들이 고향을 떠나 흥망(興亡)의 무상함을 알 수 있다. 국조문과보(國朝文科譜)에 강화(江華) 하씨가 있으나 여지승람에는 없으니 생각건대 임시 거주지로 입적(立籍)한 것이요 본관(本貫)은 아니다. 사방에 있는 하씨는 비록 귀천(貴賤)이 다르더라도 모두 진양의 삼하(三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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