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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陽河氏 司直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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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승묘의 얽힌전설


문효공 휘 演 할아버님 묘소

 

조선조 제4대 임금인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재 하연 정승의 묘는 소래산 기슭에 있다 그런데 뱀내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부터 소(牛)시장도 번창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뱀내장에서 거래되는 소와 양은 전국에서도 유명하여 소시장 하면 뱀내장을 이를 만큼 대단하였다.

그런데. 전하 는 바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의 일인데 하루는 이 소래면(부천군) 면장이 잠을 자는데 비몽사몽간에 하연 정승이 나타났다. 면장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머뭇거리니,

놀라지 말라. 나는 이 장터 앞에 있는 하연이다."

하고 말했다. 면장은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재 하연이라면 그 유명한 세종 때의 정승을 일컬음이요. 이미 500년 전에 인물 인데다가 그분은 바로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소래면에 묻혀 있는 분이 아닌가?

소래산을 뒤로 하여 펑퍼짐한 언덕에, 이른바 명당자리라고 여겨지는 장소에 몇백 년 전의 하연 정승께서 잠자고 계시다는 것을 이미 이곳 소래면 만이 아니라 시흥 일대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비몽사몽간에 자기 앞에 바로 그 하연 정승이 서 있는 것이다. 면장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네.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

"음… 놀라지 않고 정신을 제대로 가누는 것을 보아하니 대장부로다. 다름이 아니라 내 그 사이 조용히 잠자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문전이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도다."

면장은 다시 한번 의아하였다. 문전이 시끄럽다니 무슨 일인가? 그러나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경재 하연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소시장이 서기 전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하였는데. 소시장이 서면서부터는 그저 아침부터 밤중까지 떠들고 술마시고, 싸우고, 소리지르고 거기에 황소울음, 송아지 울음 뒤범벅이 되어 한시도 조용하지가 않다. 그뿐인가? 쇠똥이나 쓰레기가 코를 찌른다. 자네가 어디 소시장을 다른곳으로 옮겨 주기 바라노라"

면장은 더 들을 말도 없었고, 그저 머리를 조아리면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미천한 저희가 미처 뜻을 받들지 못하온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면서 거듭거듭 용서를 빌었다.

"그러면 나는 자네만 믿고 소시장이 옮겨갈 때를 기다리겠노라."

말을 그치자 하연 정승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튿날 면장은 아침 일찍이 하연 정승의 묘로 가보았다. 원래는 그 묘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 소시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날로 번창하는 소시장의 발전으로 조금씩 조금씩 그 터가 넓혀져, 아닌 게 아니라 하연정승의 묘 앞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거기에 쇠똥이니 쓰레기 같은 것이 분묘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면장은 그 현장을 직접 보고서야 돌아가신 분의 넋일망정 괴로웠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고, 또한 간밤에 분명히 약속한 것도 있고 하여 새로운 소시장을 물색하여 소래면  사무소 앞으로 옮기고 하정승 묘주위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성을 다하여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면사무소는 그 후에 늘어나는 사무행정의 폭주로 지금의 대야동484-5(옛 시흥시 청사)로 옮겼고 소시장 역시 터가 넓은 뱀내천 곁으로 옮기었으나 다시 대야동 대우통신 앞으로 이전되었다가 도시화로 1970년대에 이르러 폐시되었다.

홰나무

신천동 소재 하우명 효자정각과 수인산업도로 사이에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의 나무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재 하연(河演)선생이 심었으나 그 뒤 고사되었고, 그 곁가지에서 나온 나무도 이미 고사된 채 서있고, 현재의 나무는 원목의 손자에 해당된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원목은 경재 하연선생 의 후손들에 의해 소금장수에게 팔렸으나 톱을 가지고 와서 베려고 하면 그때마다 나무 아래에서 졸음이 와 끝내는 베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홰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높이 18m, 가슴높이의 둘레 2.6m, 면적 10㎡이고 수령은 약 500년이다.이 나무 주변의 열악한 환경요건(뿌리부분 복토, 도로포장, 답압) 등으로 수 년간 뿌리기능에 영향을 받아 와 수세가 쇠약해졌고, 뿌리의 기능(호흡작용, 흡수작용)이 점진적으로 마비되어 뿌리가 고사되었고, 수간생장이 부진한 상태로 생육하여 온 데다가 수간 및 지제부의 심한 부패로 부후균이 진전, 확대되어 양분 및 수분의 상승이 차단된 관계로 고사되었다

홰나무 전설

하연(河演, 1376-1453)선생은 조선 전기의 상신으로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옹( 新稀翁),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문장이 전아(典雅)하며 고학(古學)을 좋아한 분이다. 또한 인물이 누구보다도 출중 하였으며, 연세가 76세에 벼슬을 내놓고 낙향을 하여 시흥시 신천동 계란 마을에서 여생을 안락하게 보냈다.

그러다가 그는 천수를 다하고 별세하였는데, 일찍이 그는 자기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 놓은 곳에 쓰게 했으며, 또한 그 주위에는 홰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었다. 그 후 하연선생이 돌아간 지 수백 년이 흘렀으며, 하연선생 의 산소 주변에는 그가 심은 홰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큰 숲을 이루었고, 이 숲은 보는 사람마다 탐을 내게 되었는데,어느 때부터인가 그 후손들은 홰나무를 팔아 없애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무렵 인천관아 에서는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는데, 부사(府使)로 내려오는사람은 도임(到任)하는 그 날로 원인도 모르게 횡사(橫死)하는 것이었다. 벌써 여러 번이나 같은 일이 되풀이되자 조정에서는 괴이하게 여겨 힘세고 담력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부사로 내려보내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부사는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곧 육방관속(六房官屬)을 모두 불러서 명령하기를, "내가 밤을 새워볼 터이니, 동헌(東軒) 곳곳에 불을 훤하게 밝혀 놓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 뒤에 한밤중이 되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듯하더니, 재상(宰相)의 조복(朝服)을 입은 사람이 부사 앞에 나타 나는 것이었다.

부사는 뜻하지 않은 일에 순간 놀랐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뜰로 내려가서 그 재상을 맞으면서 동헌 위로 오르도록 안내한 다음 허리를 굽혔다.

"신임 부사 문안드리옵니다."

"고맙소. 나는 세종 때의 재상, 하연이오, 내게 한 가지 소원이 있어서 부사에게 이렇게 오면 모두가 놀라서 죽고 말았는데, 이제 그대에게 내 원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쁜 일이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힘 자라는 데까지 거행하겠사옵니다."

"소래산에 있는 내 무덤 주위에는 내가 살았을 때 심어 놓은 홰나무가 많이 있어서 나는 가끔 밤에 그것에서 놀았는데, 못난 자손들이 그 홰나무를 팔아 버려서 거의 다 베어지게 되었소. 그러니 부사는 그 나무들을 베지 못하도록 하여 주오."

"명심해서 이르겠습니다."

부사는 옛날의 재상이었던 하연선생이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이 튿날 손수 자손들을 찾아가서 홰나무를 베지 말도록 하고, 벤 자리에도 더 심도록 단단히 일렀는데, 그런 일이 있는 후부터는 하연선생 의 혼이 때때로 나타나 그 부사와 노시다 가시곤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게 되니 부사도 점차 귀찮아졌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부사가 생각하기를 하연은 재상이었기 때문에 상대하기도 거북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귀신과 자주 접촉을 한다는 것은 언젠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였다.

그래서 어느 날 하연선생이 찾아왔을 때 부사는 물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물건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귀신이나 영혼은 복숭아를 싫어해서 복숭아 나무 근처에는 가지를 않는다"고 했다(귀신을 찾아내는 목살경을 읽을 때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도토마리를 치면서 읽음). 이 말을 들은 부사는 어느 날 하연선생이 찾아 왔을 때 복숭아를 깎아서 내놓았다.그러자 묵묵히 앉아 있던 하연선생이 부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로군. 나는 그대가 사람이 큰 줄 알고 정이 들어 자주 와서 세상 경륜을 함께 나누었는데, 오는 것을 싫어하니 다시는 안 오겠다"

고 하더니, 그 후부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본시 하연선생 에게는 생전에 아들이 셋 있었는데, 막내 아들의 그림솜씨가 좋아 아버지의 영정을 한 점 그려서 사당모셔놓고 있었는데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였다. 후손이 영정을 산소 앞에 있는 사당에 두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

얼마 후에 왜군이 그곳으로 쳐들어와서 하연선생의 사당에 모시어 있는 영정을 보고는 탐이 나서 그것을 가져가려고 하였다.그런데 가져가려고 막상 그 영정을 드니, 한갓 종이에 불과한 그 족자가 무거워서 가져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저히 가져갈 수가 없으니까, 분통이 난 일본군사들은 그 영정을 바위틈에다 쑤셔놓고 가버리고 말았다. 난리가 끝난 후 자손들이 돌아와서 사당에 모셨던 영정이 없어진 것을 알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하연선생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왜놈들이 내 영정을 가져갈려고 해서 못 가져가게 하려고 무겁게 했더니 바위틈에다 쑤셔놓고 갔다" 하므로 그 자손들은 바위틈에서 영정을 다시 찾아서 모셨다는 것이다.

 

운흥정(雲興亭)과 경재비각(敬齋碑閣)


운흥정(雲興亭)


경재비각(敬齋碑閣)

운흥정은 1926년 지역의 선비들이 문학단체인 시사계(詩社契)를 조직하여 지역의 미풍양속 과 시의 기풍을 발전시키기 위해 구례군 산동면 시상리 와 외상리의 경계지점인 운흥용소 위에 만든 정자 로 우리나라 전형적인 정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운흥정 맞은편에는 세종 4년(1422년) 경재 하연할아버님께서 전라도 감사로 있을 때 꿈에 용을 보았다는 일화를 새겨둔 경재 하연 비가 있으며, 운흥용소 또는 용견지(龍見址)라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때 문효공 할아버님께서 즐겨 노시던 바위에는 龍興詞(용흥사)라는 글과  용견죽하(龍見竹下)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문효공 할아버님의 친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926년 운흥정 건립 내역을 알 수 있는 상량문과 이를 기록한 글(記文), 그리고 시사회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제영문(題詠文) 등이 운흥정 안에 걸려있다. 아직도 이 곳에서  해마다 선비들이 모여 몇 차례식 문효공 할아버님의 추모(追慕) 시회(詩會)를 열고 있다고 한다

 

문효공할아버님과 용견설

세종 4년(1422) 경재 하연(河演)선생이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병마도절제사(全羅道都觀察黜陟使兵馬都節 制使)로 있을 때 남원 중방현(中坊縣) 객사에서 유숙한 일이 있었는데, 꿈속에 어떤 백발신옹(白髮神翁)이 나타나 말하기를, "제 손자 다섯이 대감의 반찬거리로 잡혀갔으니 죽이지 마시옵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하며 시(詩) 한 수를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시는,

"용문산을 아홉 번 오르고 (九登龍門上)

 큰 바닷물을 세 번 마셨는데도 (三天海水)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때 (未及成龍時)

 장유자라 하는 자에게 잡혀갔나이다." (命付發孺子)

라는 내용이다.

경재 하연선생이 놀라 잠을 깨어 좌우를 살펴보니, 그 노인이 간데 없어 너무나 괴이한 일이라 사령들을 불러 명하기를, "나를 대접하기 위하여 준비해 놓은 물건은 빠짐없이 그대로 대령토록 하여라." 하니, 꿈속 노인의 말에 맞는 물건을 찾았는데, 그 속에 다섯 마리의 잉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생명이 위급하여 서둘러 잉어를 잡아 온 장본인을 속히 찾아오라고 명하자 곧 어부 한 사람이나타났다. "이 고장에서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어부 장유자(張孺子)입니다." 어부의 말에 놀란 경재 하연이 잉어를 잡아온 산동(山洞) 못에 지체없이 갖다 넣으라고 명하자

어부가 그대로 시행하였다. 삼일 후 또 꿈속에 백발신옹이 나타나 말하기를, "손자 다섯을 살려 주시니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을 하고, 대감의 소망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경재 하연 생이 본래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부탁할 만한 소망은 없으나 세상사람들이 용(龍)의 형상을 보고자 하나 용의 형태를 본 사람이 없으니 한번 봤으면 한다고 하자 백발노인이 하는 말이,  "소인들은 용체(龍體)를 보면 생명이 감수하는데 대감께서는 대인이시라 용체를 봐도 무방하리라. 날이 밝으면 곧 산동 못가로 나오시오." 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날이 밝자 못가로 가니 갑자기 먼 산 그림자가 와 못 전체를 뒤덮고 안개가 자욱이 끼여 지척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가 될 즈음 황룡(黃龍)이 나타나 물속에서 왼쪽으로 굽이치더니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굽이치다가 마침내 머리를 드러내는데, 머리의 크기가 말(馬)의 머리만하고, 흰 수염에 검은 뿔(黑角)이 있어 한참 동안 익혀 보고 있는 동안에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 고을에서는 어부 장유자의 이름을 가능한 한 거명치 않는다고 하며, 혹 장유자의 이름만이라도 듣고 과거를 보면 그때마다 낙방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산동 못가에 가보면 바위 위에 새겨진 글이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 경재 하연선생이 쓴 「용흥사(龍興詞)」라는 글과 「용견죽하(龍見竹下)」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 이 못가에는 호남 일대의 선비들이 건립한 운흥정(雲興亭)과 견룡유적(見龍遺積)의 비각이 있다. 생전에 경재 하연선생이 지었다는 「용견시(龍見詩)」가 전해진다.

                   용견시(龍見詩)

    "산동의 바윗돌은 크고 높으며 (山洞之石落落)

    산동의 푸른 물은 깊고 깊도다. (山洞之水淵淵)

    황국화로 빚은 술 즐거운 이때 (黃花白酒堪樂)

    구월이라 가을풍경 장히 좋구나. (正値九月風烟)

 

1422년(세종4년)전라도 도관찰출척사 병마도절제사(全羅道都觀察黜陟使兵馬都節 制使)시절 9월에 남원에 도착하여 산동 을 유람하고 바위에 詩를지어 돌에 새겼다

 

원정공 둘째따님과 사위 강시(蓍)의 전설

원정공 두 분 따님들이 강씨문중으로 출가하여 강씨 집안을 번창하게 하였는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진양하씨 사직공 9세손이신 원정공할아버님께서 여사촌에 사실 때에 이웃 동내에 사는 진양강씨 박사공파 문중의 양진당 '강시(蓍)'라는 준수한 총각이 둘째 따님에게 장가를 왔는데 첫날밤에 혼인 의례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고요한 밤중에 문밖의 대청마루에서 이상한 동물이 몸부림치는 듯한 소리가 계속되어 신랑 양진당이 신부에게

"저 밖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가 무슨 소리요?"

하고 물으니 신부의 대답이

"서방님, 그 소리는 저의 어머님께서 사위에게 몸보신용으로 쓰기 위해 덕천강에서 구해 다 놓은 거북이옵니다."

라 하니 신랑이 한동안 생각하더니 신부로 하여금 옷을 챙겨입도록 하여 둘이서 다른 사람이 잠든 틈을 타서 그 거북이를 들고 여사촌 앞에 있는 덕천강으로 가서 방생을 하고 돌아와 자는데 신랑의 꿈에 흰 수염을 한 도사가 나타나 선몽하기를

"오늘밤에 자네가 나의 자손을 죽음에서 구해 주었으니 자네에게 보답을 하고자 하는 데 그대의 소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신랑이 대답하기를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단지 주제넘게 말씀드린다면 소생이 오늘 하씨 집안에 장가들었으니 대대로 자손이 번창하였으면 하오니 여기 하씨 낭자와의 사이에 다섯 형제만 점지하여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올시다."

하니 도사께서 잘 알았으니 앞으로 바른길로 잘 살도록 하라는 분부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아들만 다섯 형제를 얻었다 훌륭히 성장하여 강씨 집안을 크게 빛내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이분이 진양강씨 박사공파 6세손이신 공목공 휘 시(蓍)이시다

 

天皇陛下 晉陽河氏

나라잃은 시대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10일까지 배달 겨레는 자기성을 일본식 두 글자로 바꾸라는 왜로의 놀림을 받게 되었다. 이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적어 모으면 참으로 싱싱한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가 많으리다. 40년 2월 11일부터 접수를 받았다. 11일 날 48 놈이 신청을 했고, 12일 오후 2시까지 39 놈이 신청을 했다. 이틀 사이에 87 놈이 좋아라 하면서 일본식 성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 89 놈을 모두 알았으면 좋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 89인 속에 이광수가 들어 있음을 밝혀 내었던 분이 림종국이었다. 이광수는 그 일에 대한 글을 지었다.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 천황?명과 독법을 같이 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라는 돌까불이 글을 지었던 것이다.

경상북도 성주고을에서는 심산선생 한 분이 일본식 성으로 바꾸지 아니했다. 조선사람 김창숙을 너희들 일본법으로 재판할 수가 없다고 외쳤다. 왜로들도 심옹을 이길수가 없었다. 옹은 문정공(文貞公) 동강선생 주손이다. 경상남도 진양고을에서는 河氏 한 분이 일본식으로 성을 바꿀 수가 없다고 버티기를 하면서 8월 10일 마감날을 넘겼다.

 왜로들이 그 하씨를 괴롭히기로 들어갔다. 견디기가 어렵게 된 하씨는 면사무소로 찾아갔다.

 일본식으로 바꾸었다고 적혀진 종이 조각을 내어 놓았다. 적혀진 글자가 <천황폐하진양하>로 된 일곱자였다. <천황폐하>에서 <천황>은 일본임금을 일걷는 이름이고, <폐하>는 일본임금을 부르는 부름말로 되는 받침대말이다. <천황폐하>라는 말을 배달말로 번역하면 <주상전하>로 된다. <천황폐하>를 일본식 소리로 내면 <댄 노우 해이까>라는 소리가 들리면 모두가 일어나서 차려 모양세를 하라고 시켰다. <천황폐하> 뒤어는 <진양하> 석자를 달었던 것이다. <진양하씨가 일본국임금>이라는 말뜻으로 되는 셈이다.

면장은 군수에게 보고를 했다. 당시 총독이 남??이었다. 얼마 뒤에 하씨는 주재소로 불리어 갔다. 일본 순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지 아니해도 좋다는 상부지시가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천황폐하진양하>는 취소되어서 <하○○>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성주 고을에서는 심산선생 한 분이 자기 성을 지켰고, 진양 고을에서는 하씨 한 분이 자기성을 지켰다. 광복후 심산옹은 성균관대학교를 일으켜서 총장직을 맡아 인재를 길렀고, 진양 고을 하씨는 아직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씨(史氏) 가 이르기를

    "뿌리 얕은 이광수는 요리붙고 저리붙고,

    나라잃고 좋아라 하면서 향산광?으로 바꾸었다.

    백범이 세상 버리자 광수는 백범집을 찾아가서

    유고뭉치를 손에 들고 자기집으로 와서

    제멋대로 <백범일지>라는 이름으로 책을 만들었도다.

    심산옹이 꾸짖기를 저놈이 이제는 백범을 해롭게 하누나 라고,

    뿌리얕은 이광수는 오렌지로 끝장났다.

    뿌리 깊은 심산옹은 배달나라 찾으려고,

    왜로들 모진 고문 두 다리 앗아갔네,

    리승만 물러가라고 심산옹이 처음으로 외쳤도다.

    리승만이 심옹을 미워하기 하늘 끝으로,

    천하에 우뚝하기 심옹 위에 누가 오르랴.

    거룩하다 심산선생 배달겨레 심산선생.

    머리좋다 진양하씨, 뿌리 깊다 진양하씨,

    나를 부를때는 <천황폐하 진양하>로 부르라고,

    <댄노우 해이까 진요우까>가 내성이라고, 일컫고,

    일본사람은 자기나라 임금을 천황이라고 일컫고,

    일본사람이 아닌 배달겨레는 일본임금이라고 일컫는다.

    일본사람이 천황을 부를때는 <폐하>를 달아야 한다.

    진양하씨가 일본나라 임금이라고 성씨를 바꾸었으니,

    총독부 남??이 깜짝 놀라 그사람은 면제시키라고 했다.

    보배를 감추기하는 진양하씨, 이제는 나올만도 하나이다.

    위인전에 나올 일본임금 진양하씨, 천세만세 청풍이어라.

    려중동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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