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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재선생연보
 
 

 

경재(敬齋)선생 문집

 


합천 야로 장서각
 


 경재선생 문집


 
경재선생 문집 목판

장서각 목판 92매  장소:합천군 야로면 야로리
합천군 유형문화재:지정번호 : 제171호 지정일:1972년 12월 29일

문집은 고려말, 조선조 초에 살다 가신 경재 하연(1376~1453)선조님의 시문집 책판이다.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선조님의 문집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후손들에 의해 편찬된 이후, 여러 차례 발간되었다. 이곳에 보관된 책판은 1919년에 간행된 문집의 책판으로 모두 92매이다.
원래는 밀양에서 판각(板刻)되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왔다. 『문집』은 문효공할아버님의 시(詩)를 비롯하여 상소문, 당시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을 싣고 있다. 따라서 선조님의 사상과 학문, 정치관에 관한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는 필수 자료이다. 또한 선조님께서 조선 왕조 초기의 재상을 역임하였으므로, 이 문집은 조선 왕조의 성립 과정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도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敬齋先生文集序

[柳尋春]

國家休明之治莫盛於英廟朝。實東方一初熙運也。時則有若黃翼成,許文敬諸公後先登庸。贊襄吁咈。躋一世於唐虞之域。而踵武黃閣。伯仲皐夔者。卽文孝公敬齋河先生是已。先生稟光岳之氣。生忠賢之家。自秀才時。已有爲國家致太平之志。而遭値聖明。歷敭中外。所以職思其居。殫竭誠力。從容密勿於奏對施措之間者。固已非堯舜不陳矣。聖眷彌隆。元老克壯。一堂都兪。群龍厲翼。經綸事業。蔚然爲聖代賢相。其致君澤民之功。豈遽讓於古人哉。蓋施於外者。必由諸內。先生蚤登圃老之門。亟蒙道南之詡。其發端啓要固有在矣。故平生立志。以斥異端扶正道爲己任。圖書左右。問學精深。而一敬字之表出扁齋。可見其所存於中者眞正不差。則由是而孝於事親。由是而忠於事君。由是而發於事業。皆自學問中出來。玆豈非有得於傳所謂合內外之道者也耶。嗚呼。聖人作矣。奎運回矣。海東千載。斯文將啓。而先生身當其會。存諸心而爲主敬之學。著於文而爲 理之言。恍然有指引吾道興起方來之意。其視夫先儒所云宋初大臣已能稍稍向學者。淺深又何如哉。世之論先生者。徒以相業爲重。而不本於所學之正。則亦淺之爲知先生也。噫。安得起先生於九原。陶鑄一世。以反諸古道也。今去先生歿。殆四百年矣。詩文散佚。存者無幾。先生後孫大成甫極力掇拾爲數卷。俾尋春證其訛謬。且書一言。旣不得終辭。因附所感於心者如此。其於先生之德之崇業之廣。烏可謂摹儗萬一云乎哉。上之二十六年端陽節。後學豐山柳尋春。謹書。

경재집 서문 번역

1826년에 간행된 초간본(初刊本) 원본

국가에 아름답고 밝은 정치가 영묘(榮廟) 조정보다 더 성할 때가 없었다. 실은 우리 동방에 처음 있는 좋은 세대이다. 그 때인 즉 황익성 공, 허문경 공 같은 분이 있어 선후로 등용되어 임금을 도와 당우(唐虞)같은 세상이 되게 하였는데, 황각(黃閣)에 뒤따라올라 고기(辜夔)와 어금버금한 이는 곧 문효공 경재 하 선생이시다. 선생은 광악의 장기(壯氣)를 품부하여 충현(忠賢)의 가문에 태어나 젊어서 공부할 때부터 국가를 위해 태평을 이룩할 뜻을 품었다.

성명(聖明)의 임금을 만나 중앙이나 지방에 벼슬을 차례로 다 지내면서 그 지위를 따라 성심 전력을 다하여 임금에게 논주(論奏)하는 것이며, 사업을 시설하는 데 조용하고 치밀하게 하여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임금의 사랑이 점점 높아지고 원로로써 매우 건장하였다. 묘당에서 의논을 주고받고 함에 여러 신하들이 격려 보좌하여 사업 경륜이 우뚝하게 선명한 시대의 어진 재상이 되었으니 그가 임금을 높히고 백성을 잘 살 게 한 공덕이 어찌 옛 사람에게 사양하리요. 대개밖에 베푼 일이 반드시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다.선생은 일찍 포은선생 문하에 수학하여 「우리 도가 남으로 간다」고 칭찬을 받았으니 단서를 발명하고 요지를 열어 준 바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평생 뜻 세우기를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정도(正道)를 부식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아 서적을 좌우에 쌓아 두고 학문이 정밀하며 깊어서 경이란 한 글자를 드러내어 그 서재 이름을 하였으니 그가 마음속에 둔 바가 참되고 정직하여 조금이라도틀림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부모 섬기는 데 효도하였고, 임금 섬기는 데 충성하였고. 사업에 드러나 모두가 다 학문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안팎의 도를 합했다는 옛말에 체득한 바가 아니겠는가? 성인(聖人)이 나셨고 규운(奎運)이 돌어와 우리 동국 천년에 문학이 장차 계발하게 되었다.
선생이 그 기회를 만나서 마음속에 간직하여 경을 주장하는 학문을 하였고, 문장에 들어내어서는 이치에 닿는 말을 하여 환하게 우리 갈 길을 인도하고, 장래 오는 사람을 흥기시키는 뜻이 있으니 예전 선비가 말한 바 송나라 국초에 대신들의 차차로 학문에 향한다는 것과 비교하면 그 얕고 깊은 차이가 어떠한가?

세상에서 선생을 논하는 자들이 다만 재상의 정승 업적한 귀중하게 여기고 그 배운 바 바른 학문에는 근본 함을 알지 못하니 이 또한 선생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어찌 선생을 구원에서 다시 일으켜 이 세상을 새로 만들어 옛날의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할꼬. 지금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사백년이나 되어 시와 문을 거의 다 잃어 버리고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선생의 후손 대성이 극력 수집하여 두권의 책자를 만들고 심춘을 시켜 그 잘못된 것을 정정하게 하고 또 한 마디 말을 써 달라 하기로 사양하지 못하여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써서 뒤에 붙이니, 선생의 높은 도덕과 광범한 사업에 대하여 어찌 만 분의 일을 묘사하였다 하겠는가?

1826년 단양절(端陽節)에 후학 유심춘(柳尋春)삼가씀

 

경재집(敬齋集)>에 대한 고찰

간행 경위와 체재

경재(敬齋)선생은 21세에 첫 출사(出仕)를 하여 78세라는 장수(長壽)를 누렸고, 또 젊은 시절에는 주로 문한(文翰)에 관계되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문(詩文)을 창작했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문(詩文)은 병화에 소실되어 오늘날 볼 수 없어 안타깝다.최초로 시문을 수집한 사람은, 경재(敬齋)의 5대손인 세마(洗馬) 하혼(河渾)이었다. 하혼이 경재의 시문 약간편을 모아 <진양연고(晋陽聯稿)>에 편입하여 1609(광해군 1)년에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200여 년이 지난 1826년에 후손 하대성(河大成) 하인혁(河寅爀)등이<진양연고(晋陽聯稿)> 가운데 들어 있는 경재(敬齋) 의 글을 뽑고 또 흩어진 시문(詩文)을 더 수집하여 본집(本集) 2권 부록(附錄) 3권으로 편차(編次)하여,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의 교정(校正)을 받아 합천(陜川)에서 2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이<경재집(敬齋集)>초간본(初刊本)이다. 이 초간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중앙도서관(中央圖書館)등에 소장되어 있다.

경재(敬齋) 탄신 480주년 되던 1856(哲宗 7)년에 종인(宗人) 하구홍(河龜泓)이 평양(平壤)에서 구해 온<기성삼십일운(箕城三十一韻)>이라는 장편시와, 남병철(南秉哲)의<안악구대비서(安岳邱臺碑序)>와 김수근(金洙根), 이명적(李明迪)의[남원산동비각서(南原山東碑閣序)]를 부록(附錄)에 추가하여 5권으로 편집하여 충청도(忠淸道) 문의(文義)의 우록서원(友鹿書院)에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이 판본이 중간본(重刊本)인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다.

초간본(初刊本)과 중간본(重刊本)은 활자로 간행하다 보니 많은 부수(部首)를 인출(印出)하지 못하여, <경재집(敬齋集)>을 구해 보기가 어렵게 되자 1919년에 후손 하술효(河述孝)등이 다시 세계(世系)와 제현(諸賢)의 시문(詩文)을 추가하여 노상직(盧相稷)의 교정(校正)을 거쳐 5권으로 편찬하여 밀양(密陽) 말방산방(말方山房)에서 3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판본이 삼간본(三刊本)인데 국립도서관 등 대부분의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경재집(敬齋集)>은 이 삼간본(三刊本)이다. 삼간본의 목판(木板)은 합천군(陜川郡) 야로면(冶爐面) 돈평(돈坪) 타진당(妥眞堂)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번역의 대본이 된 것은 우록서원(友鹿書院)에서 간행한 중간본(重刊本)인데, 삼간본(三刊本)과 비교해 보면, 편차(編次)에 차이가 많다. 권수(卷首)에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의 서문(序文)이 있는 것은 같다. 중간본(重刊本)에서는 시(詩)를 권1 권2 로 나누어 시체별(詩體別)로 수록했는데, 오언고시(五言古詩) 4수, 칠언고시(七言古詩) 3수 오언절구(五言絶句) 13수 육언절구(六言絶句) 1수 칠언절구(七言絶句)122수 오언율시(五言律詩) 29수, 칠언율시(七言律詩) 40수가 실려 있어, 모두 214수이다. 번역본에서는 습유(拾遺)라 하여 연구(聯句)1수 단구(斷句) 3수가 실려 있다. 삼간본에서는 권1에 다 모아 창작(創作) 연대순(年代順)으로 216수의 시(詩)를수록하였다. 중간본에서는 그 당시 경재(敬齋)와 교분(交分)이 있는 명공(名公)들의 차운시(次韻詩)를 많이 수록했는데, 삼간본(三刊本)에서는 다 빼어 부록에 모아 실었다.

중간본(重刊本) 권 3 에는 <척불소(斥佛疏)>, <경상도영주제명기서(慶尙道營主題名記序)> <경상도지리지서(慶尙道地理誌序)>, <세보서(世譜序)><삼기정기(三奇亭記)>, <진주향교사교당기(晋州鄕校四敎堂記)>,<승은정기(承恩亭記)>,<자경잠(自警箴)>, 부(府) <경재잠도(敬齋箴圖)>, <문성부원군유공묘지명(文城府院君柳公墓誌銘)>등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 경재(敬齋)의 친필유묵(親筆遺墨)의 모각(摸刻)이 붙어 있다. 삼간본(三刊本)의 권2도 수록된 문장은 똑같으나 <경재잠도(敬齋箴圖)>를 본문으로 다룬 것이 다르다. 중간본 권4는 <연보(年譜)>가 수록되어 있다. 삼간본에서는 권 3은 세계(世系)이고 권 4가<연보(年譜)>인데, 끝에 삼간본 간행에 관한 사실을 추가하였다.

중간본 권 5는 경재(敬齋)와 관계되는 행장(行狀) 사제문(賜祭文)등 부록문자(附錄文字)가 실려 있고, 끝에는 후손 하기홍(河箕泓)이 1856년에 발문(跋文)이 있다. 삼간본(三刊本)은 권 5에 부록문자가 실린 것은 같으나 그 차서(次序)가 다르다. 그리고 끝에 친필유묵의 모각(摸刻)이 붙어 있다. 그 뒤에 하기홍(河箕泓)이 쓴 발문(跋文)은 실리지 않았고, 대신 1826년에 하인혁(河寅爀)이 쓴 발문과 하대성(河大成)이 쓴 발문이 실려 있고, 그 다음에 노상직(盧相稷), 하상우(河尙禹) 하술효(河述孝)등이 쓴 발문(跋文)3편이 붙어 있다. 이 번에 번역하면서 새로 수집한 시를추가하였고,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의 관계기사와, 문집 간행 이후에 새로 지어진 소산서원(蘇山書院) 문효사(文孝祠)<상향축문(常享祝文) 봉안문(奉安文), 상량문(上粱文)소산서원기문(蘇山書院記文)소산서원유계서(蘇山書院儒契序)등의 글을 수집해서 실었다.

 

 

경재선생 문집 설명

年譜 및 序(柳尋春 撰)ㆍ跋(후손 河箕泓ㆍ河寅爀ㆍ河尙禹ㆍ河述孝, 盧相稷 撰)에 의함저자의 詩文은 대부분 兵火에 산일되었는데, 5세손 河渾이 시문 약간 편을 모아 「晉陽聯稿」에 編入하여 1609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晉陽聯稿本》 이 본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 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26년에 후손 河大成ㆍ河寅爀 등이 「晉陽聯稿」에 수록된 저자의 글과 흩어진 시문을 모아 本集 3권ㆍ附錄 2권 上下 2책으로 편차하고, 柳尋春의 校正을 받아 陜川에서 活字本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古3428-693), 고려대 중앙도서관(D1-A1676)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저자의 周甲인 丙辰年(1857)에 族譜를 만들면서 후손 河寅煥ㆍ河箕泓 등이 宗人 河龜泓이 箕城(平壤)에서 구해 온 저자의 〈箕城三十一韻〉 詩를 本集에 수록하고, 또 南秉哲의 〈安岳邱臺碑序〉와 金洙根ㆍ李明迪의 〈南原山洞碑閣序〉를 새로 찾아 篇 뒤에 붙여 文義 友鹿書院에서 5권 2책의 활자본으로 중간하였다.《중간본》 이 본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古3428-123)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초간본과 중간본이 活字로 印行되어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1919년에 후손 河述孝 등이 密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삼간본》 이 본은 世系 및 諸賢의 詩文을 추가하고 盧相稷의 교감을 받아 5권 3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7-하연-경-판), 국립중앙도서관(우촌古3648-文88-4)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 문집의 저본은 1918年刊 삼간본으로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1918年刊 삼간본)

본 문집은 本集 2권ㆍ附錄 3권 합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1은 詩, 권2는 文, 권3~5는 附錄이다.

권수에는 1826년에 쓴 柳尋春의 序와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에는 詩體別로 오언고시ㆍ칠언고시ㆍ오언절구ㆍ칠언절구ㆍ六言詩ㆍ오언율시ㆍ칠언율시 그리고 칠언절구인 〈箕城三十韻〉의 순으로 編次되어 있다. 〈謹賦賀醴泉詩奉寄侍從諸友二首〉는 1443년 諸臣들과 세종을 호종하여 伊川ㆍ溫陽에 갔다가 일 때문에 먼저 돌아와서 시를 지어 和答을 구한 것으로 遺墨에도 摹刻되어 있다. 〈侍宴聯句〉는 1418년 세종이 태종을 上王으로 삼고 上王殿에 나가 獻壽할 때 同副代言으로 참여한 저자가 세종ㆍ태종 및 諸臣들과 함께 지은 詩이다. 〈箕城三十韻〉은 1427년 평양부윤으로 재임할 때 주변의 名勝 30군데를 읊은 시로서, 1857년 문집을 重刊할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새로 찾아 넣은 것이다.

권2에는 疏 1편, 序 3편, 記 6편, 箴 1편, 墓誌銘 1편이 실려 있다. 疏는 1423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올린 斥佛疏로서 全文은 전하지 않는다. 序는 1425년 경상도 관찰사 재임 시에 지은 〈慶尙道營主題名記序〉ㆍ〈慶尙道地理志序〉와 1451년에 지은 〈世譜序〉이다. 記는 제목만 남아 있는 3편과 1452년에 지은 〈承恩亭記〉 등이다. 〈承恩亭記〉는 錦城大君의 亭子에 지은 記文으로 遺墨에 摹刻되어 있다. 1451년에 지은 〈自警箴〉은 뒤에 敬齋箴圖가 첨부되어 있다. 저자는 종신토록 ‘敬’에 從事하였기 때문에 ‘敬齋’라고 自號하였다.

권3~5는 附錄이다. 권3에는 시조 河珍으로부터 20世까지의 世系가 실려 있다. 이것은 1919년 三刊本이 간행될 때 첨부된 것이다. 권4에는 年譜가 실려 있다. 重刊本에 비하여 1919년에 密陽에서 문집을 간행하는 記事가 더 첨부되어 있다. 권5에는 正祖의 賜祭文을 비롯하여 行狀(姜希孟 撰)ㆍ神道碑文(南在 撰), 書院奉安文ㆍ常享文과 諸賢의 詩文이 실려 있다. 강희맹이 지은 행장은 全文을 얻지 못하여 「晉陽遺錄」에 실려 있는 것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私淑齋集」에 실린 행장에 비하여 闕文이 많다. 제현의 시문은 〈具慶堂詩帖〉ㆍ〈賀醴泉次韻〉ㆍ〈次河相公賀李好誠詩〉ㆍ〈凝石影堂詩帖〉ㆍ〈山洞石次韻〉 등 40여 인의 작품이다. 이어 遺墨 6板이 실려 있다. 내용은 〈謹賦賀醴泉詩奉寄侍從諸友二首〉와 〈承恩亭記〉이다.

권미에는 1826년 초간시에 쓴 후손 河寅爀ㆍ河大成의 跋과 1919년 三刊時에 쓴 盧相稷과 후손 河尙禹ㆍ河述孝의 跋이 실려 있다. 1857년 重刊時에 쓴 후손 河箕泓의 跋은 빠져있다. 이어 ‘陜川郡冶爐遯坪妥眞堂藏板’이란 刊記가 있다.

본 문집은 本集 2권ㆍ附錄 3권 합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1은 詩, 권2는 文, 권3~5는 附錄이다.

권수에는 1826년에 쓴 柳尋春의 序와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에는 詩體別로 오언고시ㆍ칠언고시ㆍ오언절구ㆍ칠언절구ㆍ六言詩ㆍ오언율시ㆍ칠언율시 그리고 칠언절구인 〈箕城三十韻〉의 순으로 編次되어 있다. 〈謹賦賀醴泉詩奉寄侍從諸友二首〉는 1443년 諸臣들과 세종을 호종하여 伊川ㆍ溫陽에 갔다가 일 때문에 먼저 돌아와서 시를 지어 和答을 구한 것으로 遺墨에도 摹刻되어 있다. 〈侍宴聯句〉는 1418년 세종이 태종을 上王으로 삼고 上王殿에 나가 獻壽할 때 同副代言으로 참여한 저자가 세종ㆍ태종 및 諸臣들과 함께 지은 詩이다. 〈箕城三十韻〉은 1427년 평양부윤으로 재임할 때 주변의 名勝 30군데를 읊은 시로서, 1857년 문집을 重刊할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새로 찾아 넣은 것이다.

권2에는 疏 1편, 序 3편, 記 6편, 箴 1편, 墓誌銘 1편이 실려 있다. 疏는 1423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올린 斥佛疏로서 全文은 전하지 않는다. 序는 1425년 경상도 관찰사 재임 시에 지은 〈慶尙道營主題名記序〉ㆍ〈慶尙道地理志序〉와 1451년에 지은 〈世譜序〉이다. 記는 제목만 남아 있는 3편과 1452년에 지은 〈承恩亭記〉 등이다. 〈承恩亭記〉는 錦城大君의 亭子에 지은 記文으로 遺墨에 摹刻되어 있다. 1451년에 지은 〈自警箴〉은 뒤에 敬齋箴圖가 첨부되어 있다. 저자는 종신토록 ‘敬’에 從事하였기 때문에 ‘敬齋’라고 自號하였다.

권3~5는 附錄이다. 권3에는 시조 河珍으로부터 20世까지의 世系가 실려 있다. 이것은 1919년 三刊本이 간행될 때 첨부된 것이다. 권4에는 年譜가 실려 있다. 重刊本에 비하여 1919년에 密陽에서 문집을 간행하는 記事가 더 첨부되어 있다. 권5에는 正祖의 賜祭文을 비롯하여 行狀(姜希孟 撰)ㆍ神道碑文(南在 撰), 書院奉安文ㆍ常享文과 諸賢의 詩文이 실려 있다. 강희맹이 지은 행장은 全文을 얻지 못하여 「晉陽遺錄」에 실려 있는 것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私淑齋集」에 실린 행장에 비하여 闕文이 많다. 제현의 시문은 〈具慶堂詩帖〉ㆍ〈賀醴泉次韻〉ㆍ〈次河相公賀李好誠詩〉ㆍ〈凝石影堂詩帖〉ㆍ〈山洞石次韻〉 등 40여 인의 작품이다. 이어 遺墨 6板이 실려 있다. 내용은 〈謹賦賀醴泉詩奉寄侍從諸友二首〉와 〈承恩亭記〉이다.

권미에는 1826년 초간시에 쓴 후손 河寅爀ㆍ河大成의 跋과 1919년 三刊時에 쓴 盧相稷과 후손 河尙禹ㆍ河述孝의 跋이 실려 있다. 1857년 重刊時에 쓴 후손 河箕泓의 跋은 빠져있다. 이어 ‘陜川郡冶爐遯坪妥眞堂藏板’이란 刊記가 있다.

필자 : 金圻彬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조선 초기의 경상도 지리지(地理誌). 필사본. 1책. 세종의 명으로 《팔도지리지》를 편찬할 때, 그 사업의 하나로 경상도 감사 하연(河演) 등이 1425년(세종 7)에 완성하였다. 도(道) 전체의 총설과 경주도(慶州道)·안동도(安東道)·상주도(尙州道)·진주도(晉州道) 등 4도 및 군현(郡縣)의 자연과 인문(人文)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세상납을 위한 교통로의 변천 및 그 원인 등 중요한 기사가 실려 있고, 편찬체제가 정연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다음가는 오래된 지지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또 독립된 지리지로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상세하여 조선 전기의 지방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정본(正本)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는 그 부본(副本)만이 전한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교정(校訂) 경상도지리지》라는 표제하에 활자본으로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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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지리지 서문

慶尙道地理志序 地理志二卷在慶州府

皇明永樂二十二年甲辰冬十有二月朔日壬寅。春秋館受敎。各道府州郡縣歷代官號邑名沿革及離合。令戶曹移關各道。備細推覈。轉送本館。以憑參考。洪煕元年乙巳夏六月旁死魄庚子。禮曹受敎。008_445b各道府州郡縣歷代官號邑名沿革離合。更令本道將所上規式。推覈移文。先是。主上殿下於經筵講論之餘。命文臣等纂成本朝地理志。右二司啓目。承上旨也。其規式略曰。諸道諸邑歷代名號之沿革。府州郡縣鄕所部曲之離合。山川界域險阻關防。山城邑城周回廣挾。溫泉氷穴風穴鹽盆鹽井牧場鐵場。良馬所產。土地肥瘠。水泉深淺。風氣寒暖。民俗所尙。戶口人物土產雜物之數。租稅歲貢水陸轉運之程途。營鎭梁浦建設之地。軍丁戰艦之額。海中諸島水陸之遠近。入島農業人物之有無。煙臺烽火所008_445c在之處。本朝先王先后陵寢。前朝太祖古昔名賢之墓。土姓從仕。德藝功業出衆之人。古昔相傳靈異之跡。推覈移文。據此令知大丘郡事琴柔,仁同縣監金鑌主掌其事。馳行諮問。遵依規式。補以闕略。纂成十部。轉送于春秋館。經歷宜寧氏族南智,慶州府尹蔚山氏族吳湜,判官東萊氏族鄭介保等咸與請之。更成一部。首序其事。置于本營。辭切事順。荒蕪之學。不敢固辭。稽之經傳。夏有禹貢之書。周有大司徒,職方氏之籍。歷代所記。山海經,地理志尤致詳焉。驗之事業。簫何入奏。先收圖籍。光武披圖。始知得一。版籍008_445d之有補於國家尙矣。今我聖上發於宸衷。特降綸音。纂記本朝之地理。其爲萬世慮至矣。觀其地勢。長白之山延衰萬里。起伏而爲磨天嶺,磨雲嶺,鐵嶺,五臺,金剛,雉岳。至于慶尙之境。停畜而爲大小白。周旋而爲俗離,智異。旁海而未越。山極高而水益深。神秀英靈之氣。含弘醞釀。慶尙之爲道。經緯乎其間。土地之沃饒。人物之富庶。倍於他道。在昔三國之鼎峙也。國之新羅。歷五十六王。而享國九百九十有二年。最爲長久。定一于高麗王氏。以至于盛代。是則此道本新羅之舊居。國家之本根。忠臣孝子義夫節婦。風物之所尙。禮樂文物之所自出。盍爲之載籍。以傳其不朽。時太歲乙巳冬十有二月朔日丙寅。監司敬齋晉陽河演淵亮。識。

번역문

황명 영락 이십 이년 갑진(세종 六년, 一四二四년)겨울 십 이월 초 하룻날 임인(壬寅), 춘추관에서 임금 명령을 받들어 각 도.부.주.군.현의 역대로 내려오는 관호(官號)와 읍명(邑名), 연혁(沿革)과 분리 합병한 사실을 호조(戶曹)를 시켜 각 도에 통첩하여 자세하게 참고하여 본관(本館)에돌려보내어 참고 자료로 삼게 하였다.

홍희 원년 을사(세종 七년, 一四二五년) 여름 유월 초 이일 경자에, 예조가 각 도.부.주.군.현에 역대로 내려오는 관호와 읍명, 연혁과 분리 합병한 사실을 본 도(本道)에서 올린 규례에 의하여 하라고 다시 통첩하였다. 이에 앞서 주상전하께서 경연(經筵) 강론 끝에 문신들에게 명하여 본조의 지리지를 편찬하게 하였으므로 춘추관, 예조 두 관서에서 통첩한 조목은 임금 뜻을 받들어 한 것이다.
그 규식(規式)에 말하기를 「모든 도, 모든 고을의 역대 명칭의 연혁, 부.주.군.현의 읍 소재지와 부락의 분리 합병, 사천의 경계, 험하고 막힌 곳의 관방(關防), 산성이나 읍성의 주위와 광협(廣狹), 온천, 빙혈(氷穴), 풍혈(風穴), 소금 가마, 소금 샘, 목장, 철공장, 종은 말의 생산, 토지가 좋고 나쁜 것, 물이 깊고 얕은 것, 기후가 차고 따스한 것, 민간 풍속이 숭상하는 것, 호구, 인물, 토지의 잡종, 생산의 수량, 조세(租稅), 세공(稅貢). 수로(水路) 또는 육로로 운송하는 거리, 영(永). 진(鎭). 양(梁). 포(浦)를 건설한 지역, 군정(軍丁).전함의 숫자, 바다 안 모든 섬의 거리, 섬 안에 들어가 농사짓는 사람이 있고 없는 것, 연대봉화 있는 곳, 본 조 선대 임금, 왕후(王后)의 능침(陵寢), 전조(前朝)의 태조와 옛 명현들의 묘지, 그 고을 출신으로 벼슬과 덕행과 공업이 뛰어난 사람, 예로부터 전해오는 기이한 사적 등 등이다」라고 하였다.

이 통첩에 의하여 대구 군수 금유, 인동 현감 김빈을 시켜 그 사무를 주관하여 돌아다니면서 수집하여 규정에 따라 하고, 빠진 것은 보충하여 열 벌을 만들어 춘추관에 올려 보내고, 경력인 의령 남지(南智), 경주 부윤인 울산 오식, 판관인 동래 정개보등 여러 사람이 다시 한 벌을 더 만들어 그 사실을 서술하여 본영(本營)에 비치하기를 청하는 것이 간절한지라 나의 학문이 거칠지마는 굳이 사양하지 못하여 옛 글을 상고해 보니, 하(夏)나라에는 우공이 있고, 주(周)나라에는 대사도 직방씨의 문적이 있고, 역대에 기록한 바 산해경 지리지가 더욱 자세하다. 또 옛 사람의 사업을 참고해 보면 소하가 진(秦)나라를 쳐들어가 먼저 지도와 호적을 압수하였고, 한(漢)나라 광무 황제가 지도를 펴들고 한 장 지도가 국가에 도움됨이 오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 성상께서 생각을 내여 특별 윤음으로 본 조의 지리지를 편찬하라 하시니 참으로 만 대를 위해 생각하심이 지극하시다. 우리 나라 지세를 보면 장백산이 만 리(萬里)나 뻗치어 마천령. 마움령. 철령. 오대산. 금강산. 치악산이 되었고, 경상도 지경에 이르러 기운이 모여 태백산. 소백산이 되었고, 둘리어 속리산. 지리산이 되어 바닷가에 이르러 멈추었다.
산은 극히 높고 물은 더욱 깊어 신령한 기운이 함축되고 또 솟아 나온다. 경상도가 그 중간에 자리잡아 토지가 기름지고 인물이 풍부하여 다른도보다 갑절이 넘는 곳이라, 옛 삼국이 솥발같이 대립할 때 신라는 오십 륙 왕이 구백 구십 이년을 누리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고, 고려 왕씨에게 통일되어 우리 성한 시대에 왔으니, 이 경상도는 신라의 옛 터이며 우리 국가의 근본이라, 충성한 신하, 효도한 아들, 의리 있는 남편, 절개 있는 아내, 풍속이 숭상하는 바 예악 문물이 생겨났으니, 책에 기록하여 섞어지지 않도록 하지 않을 것인가?

(세종 七년, 一四二五년)겨울 십이월 초하루 경상도 감사 경재 하연(河演) 씀

※경상도 지리지 두 권이 경주부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경주부 아전 최락(崔洛)이 보관하였다가 순영에 바쳤다 고 한다

慶尙道地理志

奎 10007

河演 등 편찬, 1425년(세종 7)

1冊(96장) 필사본 83.8×43.4 cm.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慶尙道의 地理志. 세종의 명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 河演 (1376-1453), 知大丘郡事 琴柔, 安東縣監 金빈 등이 주관하여 편찬하였다. 이책의 원본은 편찬된 후에 바로 춘추관에 보내졌으나, 경주부윤 吳公湜 등이 경상도 관찰사 河演 에게 부본을 만들 것을 건의하여 부본을 만들어 경주에 보관하였다. 이책의 서문 바로 뒤에는 "本營慶州府置"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이책이 경주에 보관되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책의 편찬 과정은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춘추관과 예조에 명하여 전국 주·현의 歷代官號와 읍명의 연혁·이합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중앙에서 일정한  規式을 마련하여 그 규식에 따라 각 도에서 조사·편찬하여 춘추관에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경상도 지리지뿐만 아니라 전국 八道의 다른 지리지도 편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경상도지리만 부본을 만들어 감영에 보관하였기 때문에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당시에 춘추관에 보고된 8도의 지리지를 참고하여 1432년(세종 14) 전국 지리지가  편찬되었으며, 이것은 ≪世宗實錄≫을 편찬하면서 약간의 보완을 거쳐 그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이책은 조선시대 최초의 지리지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며, 또한 종이의 재질이 우수하고 옆에 邊鐵과 圓環 등이 둘러쳐진 것에서 그 품위를 짐작할 수 있다. 권두에 「慶尙道地理志序」가 있으며, 이어 총론에 해당하는 내용, 일반군현에 대한 내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과 총론에 나타난 서술 규식은 ①여러 道와 여러 邑의 역대 명칭, ②부·주·군·현과, 향·소·부곡의 이합상황, ③산천의 경계와 관방처 표시, ④산성과 읍성, 온천·소금 생산지에 관한 것, ⑤토지의 비옥도와 기온의 차이, 풍속에 관한 것, ⑥戶口, 人物, 土産, 雜物의 수, ⑦조세의 운반로, ⑧군사시설과 군인 및 전함의 수, ⑨섬이 육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와 그 섬에서 농사의 유무, ⑩봉화대의 소재처, ⑪명현들의 묘와 인물, 傳說에 관한것 등으로, 이책의 편찬방침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서문과 총론 에서 제시된 원칙은 일반 군현에 관한 기록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일반 군현은 「慶州道」「安東道」「尙州道」「晉州道」등 4개의 큰 구역으로 나눈 다음에, 그 부속 되는 군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慶州道」에는 慶州府·密陽都護府·梁山郡·蔚山郡·淸道郡·興海郡·大丘府·慶山縣·東萊縣·昌寧縣·彦陽縣·機張縣· 長機縣·靈山縣·玄風縣·迎日縣·淸河縣 등이 기록되었으며, 「安東道」에는 安東大都護 府·寧海都護府·順興都護府·醴泉郡·榮川郡·永川郡·靑松郡·義城郡·永德縣· 禮安縣·河陽縣·基川縣·仁同縣·奉化縣·義興縣·新寧縣·眞寶縣·比安縣 등이 기록되었다.
「尙州道」에는 尙州牧官과 星州牧官·善山都護府·陜川郡·草溪郡·金山郡· 高靈 縣·開寧縣·咸昌縣·龍宮縣·聞慶縣·軍威縣·知禮縣 등이 기록되었으며,「晉州道」에 는 晉州牧官과 金海都護府·昌原都護府·咸安郡·咸陽郡·昆陽郡·固城郡·巨濟縣泗川縣·居昌縣·河東縣 등이 기록되었다.
각 군현별로 기록된 주요한 사항은 沿革·境界 山川·關防·貢物·城郭·鎭營·交通·古蹟·土地·戶口·姓氏·人物 烽火 氣候·염盆·牧場·傳說 등에 관한 것들로, 인문지리에 관한 광범위한 항목이 망라되어 있다. 이러한 항목들은 국가를 통치하는데 절실히 요구되는 정치·경제·군사 등에 관한 사항들로서 국가체제를 조기에 완비하려는 조선정부의 의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책은 조선시기에 작성된 최초의 독립 지리지로서 자료가 부족한 조선전기 지방사회의 실상을 이 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慶尙道續撰地理志≫와 합본하여 ≪校訂慶尙道地理志慶尙道續撰地理誌≫를 활자본으로 간행하였으며 1976년 弗咸文化社 에서 다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1981년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全國地理志叢書≫ 제1권에도 영인본이 수록되어 있다.

 

경상도 영주 제명기 서문

慶尙道營主題名記序

竊謂自古帝王分憂宣化。必托使臣。三代所命。往欽汝諧。周之宣化。謳吟諷誦。漢分直指,繡衣使。威振州008_444c郡。唐遣節度使。復授行臺之命。宋置觀察使。且有出入均勞之旨。稽之本國。高麗之初。分遣宰相爲諸道節度使。專制方面。以行黜陟。其後改以三品以下官。爲都部署使,按察使,按廉使之任。糾察庶務。其任最重。及其末流也。朝廷之紀綱頹廢。自元帥以至方鎭牧府。視按廉不以王人大體爲念。反以秩卑小節之爲嫌。無所畏憚。奉職不謹。爲按廉者。徒區區於簿書錢穀之間。不能行其黜陟。陵夷靡然。濫觴滔天。至我聖祖戊辰擧義之後。欲新弊政。以方府以上爲都觀察使,黜陟使。擇朝官爲經歷都事。俾之統察軍民之008_444d務。以明殿最之法。二品以上。監囚申請。三品以下。依律直斷。又爲按察使更相迭遣之制。振起頹綱。以致今日雍煕之治。何其盛哉。吾以庸姿。叨承重寄。欲謬通前賢之籍。問其傳久之番。皆因倭寇而泯滅。令本營慶州搜得公私之簿。但有吏係前主簿孫煕者。納以家藏之錄。今幸得此。成爲通籍。上書中朝與本朝之年譜。下書各年使臣之姓名。稱爲營主題名記。繕寫二部。一置本營。一置行營。以便後考。嗚呼。宰相之職。代天理物。使命之任。承流布德。時政之得失。生民之休戚係焉。歷代治亂。職此之由。不可不謹也。稽008_445a諸前轍之是非。施諸事業之懿則。吾今採摭以題名。豈不有補於後來之君子哉。吾亦登名。必居一於是非之中。赧然有愧。敢爲之序。皇明洪煕元年乙巳閏七月丙辰。監司敬齋晉陽河演淵亮。題。

번역

그윽히 이르건대 예로부터 제왕이 걱정을 나누고 교화를 펼 적에 반드시 사신(使臣)에게 부탁하는데, 삼대의 명령한 바는 가서 삼가히 너희들 화합하라 하였고, 주(周)나라가 교화를 베풀매 백성들이 구가하며 칭송하였고, 한(漢)나라는 직지(直指)와 수의사(繡衣使)로 나눔에 위엄이 주 군에 떨쳤고, 당 나라는 절도사(節度使)를 보내어 행대의 명령을 수복하였고, 송(宋)나라는 관찰사를 두고, 또한 출사와 임사가 노고를 공평히 하라는 뜻을 두었는데, 본국에 상고해 보건대 고려 초에는 재상을 보내어 제도의 절도사를 삼아서 지방을 전재하여 진과 파면을 행하게 하다가 그 후에는 고쳐서 삼품(三品) 이하만으로써 도부서사(都部署使), 안찰사(按察使), 안렴사(按廉使)의 소임을 삼아서 서무를 규찰케 하니 그 임무가 가장 막중하더니, 그 말세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기강이 퇴폐 하여 원수로부터 지방 진수와 부사, 목사에 이르기까지 안렴사를 임금의 대리로 보지 않고, 다만 미관 말직이라 혐피(嫌避)하여 외탄(畏憚)한 바 없이 봉직하기를 근신하지 않고, 안렴사된자도 한갓 문서나 전곡 사이에만 급급하고, 능히 그 임면하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여 기강의 퇴폐 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우리 성조에 이르러 무진(戊辰) 의거(義擧)의 뒤로부터 그 폐정을 혁신하고자 하여 부사(府使) 이상으로 도관찰사(都觀察使), 출척사(黜陟使)로 삼고, 조관(朝官)을 택하여 경력도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군민의 사무를 통찰하여 치적의 전최(殿最)의 법을 밝히게 하고, 이품(二品) 이상은 수감(囚監)하는데 품신케 하고, 삼품(三品) 이하는 법에 의하여 직결 처단하고 또한 안렴사의 교대 경질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기강을 진작하여 오늘과 같은 거룩한 정치를 이루었으니 어찌 그렇게 성대 하오리까?
내가 용렬한 자질로서 외람히 중임을 맡아 전현(前賢)의 문적을 통하고자 하매 그 오랫동안 전해오던 것은 모두 왜구로 인하여 없어진지라 경주 본영에 명령하여 공사의 문부를 수색케 하였는데, 다만 이속의 계통 전 부주 손희(孫熙)란 자가 있어 가장지록(家藏之錄)으로써 드리거늘 이제 다행히 이것을 얻어 전편을 이루니, 상편은 중국과 우리 조정의 연보(年譜)요, 하편은 각년(各年) 사절(使節)의 성명이라 영주제명기(營主題名記)라 칭하고, 두 부를 뽑아 써서 하나는 본영(本營)에 두고, 하나는 행영(行營)에 두어서 훗일의 고증에 편리케 하였다.

아! 재상의 직분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사명의 임무는 그 흐름을 이어 덕을 베푸는 것이니 시정의 득실에 민생의 안위가 매인지라, 역대의 치란이 이 직위에 달린지라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철의 시비를 상고하여 사업의 법칙에 베푸는 것이니, 내가 이제 채택하여 제명(題名)한 것이 어찌 후세 군자에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리요. 내 또한 이름이 올랐음에 반드시 시비 가운데 하나를 차지할 것이라 난연히 부끄러움이 있어 감히 서문을 하노라.

(세종 七년, 一四二五년) 윤 칠월 경상도 감사 경재 진양 하연(河演) 연량(淵亮)씀

 

진주 향교 사교당(鄕校四敎堂)기문

晉州鄕校四敎堂記

吾鄕之學校。本無講堂。前敎官趙寶仁議于州牧。措置備材。令敎官姜元亮勤督告成。乃名堂爲四敎。走書請記。晉之爲邑。智異之英。南海之精。醞釀沖融。土地之沃饒。人物之繁華。非他邑之比。吾嘗聞殷烈公姜民瞻學於校中。功業烜赫。厥後人材尤盛。近古文敬公姜君寶,吾先祖元正公諱
楫,御史大夫諱 允源及菁州君河乙沚,參贊鄭乙輔與夫國初以來文008_447b忠公河崙,文定公鄭以吾,襄靖公河敬復。皆就鄕校而拔萃。若文若武。俱鳴於當時。吾鄕地靈人傑之美。世所稱說。然未必不由敎養之致。今也諸生尋常講讀之有便。當春秋勝節。倣成均課試之法。牧宰敎官。腵日逍遙於其上。或開卷講問。或出題賦詩。髣髴乎詠沂之趣。從容乎樂育之樂。優游乎棫樸旱麓之興矣。雖然。屬名之旨。豈爲此歟。爲學之道有二。有務實之學。有務名之學。務其實而不顧乎外者。爲己也。務其名而未脫乎徇名之習者。爲人也。人生八歲。皆入小學。以至大學之敎。日用飮食動靜言語無非學也。008_447c培植涵養。循序而進。及其成功。尊德性硏經學。非有意於文章。而其爲文也出於義理之原。非有意於政事。而其爲政也發爲道德之用。是則正心修身。所以治平之本也。夫子之四敎。敎人以學文修行而存忠信也。忠信。本也。名堂之義深切焉。爲學之道。何以加此。諸生所當服膺而日新。況値聖朝右文之化。思皇以寧之時乎。

 

번역

우리고을 학교에는 본래 강당이 없었다 전에 교관 조보인(趙寶仁)이 목사에게 의논하여 재료를 비취하였고 현재 교관 강원량(姜元亮)이 감독하여 집을 지은 뒤에 이름을 사교당(四敎堂)이라 하고 서신을 통해 기문을 청해 왔다 진주 고을이 지리산의 영특한 기운과 남해의 정기가 혼합 융화하여 토지가 비욕하고 인물이 번화함이 다른 고을에 비 할바 가 아니다
내 일찍 들으니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이 이 향교에서 수학하여 공업이 혁혁하였고 그 뒤에 인재가 더욱 번성하였다
근세에 문경공 강군보(姜君寶)와 우리선조 원정공 즙(楫) 어사대부 윤원(允源) 및 청주군 하을지(河乙沚) 참찬 정을보(鄭乙輔) 또는 국초의 문충공 하륜(河崙) 문정공 정이오(鄭以吾) 양정공 하경복(河敬復)이 모두 이 향교에서 공부 하였으니그 사람들이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당시에 이름을 날렸다

우리 고을 땅이 신령하고 인물이 걸출함을 세상에서 일컷는 바이나 교양으로 인하여 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제 모든 학생들은 언제나 강독하는데 편리 하게 되었으니 봄가을 좋은 계절을 맞이하여 성균관에서 날마다 시험보이는 법과 같이 하고 목사와 교관이 여가를 타서 당상에 나가 혹은 책을 펴 강의 도하고 글제를내어 시를짓게 하면 영기(詠沂)의 취미의 방불할 것이며 인재를 교육하는 낙(樂) 역시 흐뭇할 것이고 역박한록(역樸旱麓)을 흥기함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교당(四敎堂)이라 이름한 뜻이 이 때문이겠는가? 학문하는 도리가 두 가지 있으니 실지로 힘쓰는 학문이 있고 이름만을 힘쓰는 학문이 있으니 실지만 힘쓰고 그밖은 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이름만 힘써 이름에 매달리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남을 위해서 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나서 팔 세(八 歲)가 되면 다 소학교에 들어가서 대학 교육을 종업할 때까지 날마다 하는 일, 음식먹고 하는 행동, 언어가 학문이 아닌 것이 없다.
북돋우고 수양하여 차례를 따라 나아가 성공을 하게 되며, 덕성(德性)을 존중하고 경학을 연구하면 문장을 하려고 뜻하지 않아도 그 문장이 의리의 근본에서 나오게 되고, 정치를 하려고 뜻하지 않아도 그 정치가 도덕의 작용으로 나타나게 되니, 이것은 곧 마음을 바로 잡고 몸을 닦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케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글을 배우고 행실을 닦고 충성(忠誠)과 믿음(信) 네 가지로 사람을 가르쳤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충성과 믿음이 근본이 되니 이 집에 이름짓는 뜻이 깊고도 절실하다. 학문하는 도리가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모든 학생들이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날마다 새롭게 할 바인 것이다. 하물며 성조(聖朝)에서 문학을 숭상하는 교화와 사황이령(思皇以寧)의 시기를 만났음이랴.

경재 하연(敬齋河演) 씀

승은정(承恩亭) 기문

承恩亭記
大君錦城公。於世宗聖上夙昔所賜瑞雲坊華山支峯之下。拓地作宅。又鑿池夷陵之下爲方壺。結亭008_447d於其上。種植花卉。名亭曰承恩。請吾記題。才雖荒拙。戚係莩葭。重違尊命。吾竊謂凡樓臺亭榭之設。所以寓其樂也。樂。無形也。必以所寓之樂而名之。然後形焉。尊公德器淸癯。高致雅亮。出辭氣。灑然無一點之塵。故不以奇麗葩藻之意名之。而迺曰承恩。是一段敬慕先王之念。根於中而藹然於言外。豈欲爲侈美遊玩之所乎。於焉逍遙。見山則體安靜重厚之德。見水則取盈科所止之理。見松竹知淸節。其他四時敷暢。如葵之忠。蓮之君子。菊之隱逸。可賞之物。皆各有理。程子云。萬物靜觀皆自得。四時佳興與人008_448a同。蓋卽物而窮其理。則所以玩物之樂。悠悠自見矣。夫子所謂仁者樂山。知者樂水之旨。亦可見矣。富貴不淫之實。豈少勉強而行乎。猗歟休哉。且是心之微。雖曰方寸。至道之所在也。敬德不移。維孝維忠。優游壽域之中。則慶莫大焉。而承恩之樂。綽綽然有餘裕矣。惟尊公識之。並成長句四韻。仰塞尊命。詩見上 玄墨涒灘仲春下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領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仍令致仕河演。謹題。

번역

대군 금성 공이 세종 성상께서 전일에 내려 주신 서운방(瑞雲坊) 화산지봉(華山支峯) 밑 기지에 주택을 짓고, 또 이릉(夷陵) 밑에 지당을 파 그 안에 산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화초를 심어 정자 이름을 승은(承恩)이라 하였다.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니, 나의 재주가 비록 졸렬하나 부가의 친척이 되고 높으신 명령이라 어길 수 없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무룻 누대(樓臺)와 정사를 설치하는 것은 그 곳에 낙(樂)을 붙이는 바이나, 낙이란 것은 형태가 없으므로 반드시 거기 붙일 바 낙으로 이름지은 뒤에야 그 뜻이 드러나는 것이다. 금성 공은 의표가 청수(淸秀)하고 높은 운치에 아량이 깊다. 언사에도 한 점 티끌이 없는 까닭에 기이하고 화려한 뜻으로 이름하지 않고 바로 승은이라 하니, 이것은 일단 선대왕을 경모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아 밖으로 드러나는 바이니, 어찌 사치하고 호화스런 놀이터를 만들 것이겠는가?」

여기를 거닐면서 산을 쳐다보면 안정하고 후중한 덕(德)을 체득할 것이요,

물을 내려다보면 영과(盈科)하고 그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송죽(松竹)을 보면 그 맑은 절개를 알 것이요,

기타 사시로 피는 충성스런 해바라기며 군자 같은 연꽃과 은사 같은 국화(菊化)등 감상할 만한 것이

다 그 이치가 있는 것이다.

정자(程子)께서 말하기를 「만물을 조용히 보면 모두 체득할 수 있으며 사시의 아름다운 흥치는 뭇사람과 같이 즐긴다」

하였으니, 대개 그 사물에 대해 이치를 연구하면 사물을 구경하는 낙을 스스로 얻을 것이요, 공자께서 이른 바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 있는 자는 물을 좋아한다」한 뜻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귀에 빠지지 않는 일을 어찌 자그마치 힘써 될 것인가? 참 거룩하고도 아름다운일이다. 또는 이 마음이 한 치밖에 안 된다 하지마는 지극한 도가있는 곳이라 덕을 공경하여 옮기지 말고 오직 효도하며 오직 충성하며 태평 세대에 유유 자제하면 경사가 이 보다 더욱 클 수 없고 은혜를 받드는 낙도 작작하게 여유가 있을 것이다. 존공(尊公)은 명념하시요, 장구사운(長句四韻)을 아울러 지어 명령을 갚아 드립니다

    " 일찍이 임금님 은혜 입어 정자 을 잘 지어서

    승은(承恩)이라 이름 하여 삼가 사모하는 정을 표하였네

    땅에 가득한 아름다운 꽃들은 차례로 피어나고

    정자를 감돌아 흐르는 맑은 물 환하게 비치노라

    속된 세상의 붉은 티끌에 물들지 않고

    다만 영대(靈臺)에 한점 맑음이 있을 뿐

    다만 동평(東平)이 어찌 착한 일 하는 것만 즐길뿐이리요

    정신을 수양하고 겸하여 요(堯)임금 축복하는 화봉(華封)의

    정성을 극진히 다 하였네."


(문종二년一四五二년)중춘하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영경연 예문춘추관 서운관사 경재 하연 삼가 씀

 

삼기정(三奇亭)기문

三奇亭記 出輿地勝覽

高山縣東五里許有小岡。懸崖削立。下有長川。縈廻澄澈。上有老松。蔚蔥蔭翠。其西平夷。壬寅春。余行邑到此。登臨觀覽。煙花草木之美景。皆供目前。而其爲水也石也松也尤奇勝。乃名三奇。削木書之。今懸監崔君得之。作亭于玆。請吾記。予初命名者。義不敢辭。夫人之情。感物而變。目之所見。其感尤切。見水之淸則吾心本然之明德益明。見石之巖巖則確然不拔之志益堅。見松之晚翠則貞固之節益高。此岡三物。豈啻觀覽之美。炎天盛暑憩息之快哉。吾之所見。異於他人。後之君子登玆感興。寓意而思之。則足以爲008_447a操心養性之機。亦以爲浴沂風詠之樂。疇昔吾命名之義。蓋庶幾焉。

 

삼기정은 전주로부터는 약 20키로이고 고산읍으로 부터는 약2키로쯤 되는곳에 위치한 정자인데 소유는 전주최씨 문중이다.기록에 의하면 서기 1422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오랜세월의 풍파에 원래의 정자는 없어지고 약 15년전에 다시 짓어진 조그마한 정자이다.
그 곳에 옛날 문효공 할아버님께서 지으신 기문이 걸려 있었으나 정자와 함께 멸실 되어오다 지난 2004년 5월에 하태문씨가 새로히 기문을 제작 하여 정자 천정에 걸었다고 한다
기문내용을 보면 할아버님께서 전라도 도관찰출척사로 계시던 1422년(세종4년 )에 지방 순시차 이곳을 지나시다 당시의 고산현감인 "최득지"라는 분이 자기가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자 하니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 함으로 거절할 수가 없어 기문을 쓰신다는 내용의 기문이 걸려 있다.

번역

고산현(高山縣) 동쪽 오리(五里) 쯤 되는 거리에 자그마한 산이 있으니 떨어진 벼랑이 깎아 세운 듯하다 그 아래에 긴 냇물이둘러 비치며 그 위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고 그 서쪽지대는 좀 평평한 셈이다. 임인(세종 四년,一四二二년) 봄에 내가 열읍(列邑)을 순행하다가 이에 도착하여 연기에 잠긴 꽃이며 온갖 초목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니, 눈앞에 비치는 것 모두 좋으나 그중에 물,돌,솔 세 가지가 더욱 기이하기에 곧 삼기(三寄)라 이름을 짓고 나무를 깎아 글씨를 써서 세웠더니' 현재 현감인 최득지(崔得之)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기문(記文)을 나에게 청하기에 내가 당초에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는 바이다.

무릇 사람이 정이란 사물에 감격되어 변하게 되는데 그중에도 눈으로 본 것이 감격이 더욱 간절하다. 물 맑은 것을 보면 내 마음 본체의 밝은 덕이 더욱 밝아지게되고, 돌이 우뚝 선 것을 보면 확연불발(確然不拔)한 의지가 더욱 굳게 되고, 솔이 겨울에 푸른 것을 보면 곧은 절개가 더욱 높게 되니, 이 산에 있는 세가지 물건이 관광에 아름다운 것과 여름 더위에 휴게(休憩)하는 것이 상쾌할 뿐이겠는가?
내가 본 것이 타인과 다르니 뒤에 오는 군사들이 이 정자에 올라 흥을 느끼고 뜻을 붙이어 생각해 보면 심정을 바로 잡고 수양하는 기틀이 될 것이요, 욕기풍영(浴淇風詠)의 즐거운 일도 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앞서 내가 이름지은 뜻이 대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경재 하연(敬齋河演) 씀

具慶堂詩序

洪範五福。一曰壽。人必有壽。而後能享諸福。然世恒多短折而鮮壽考。七十者稀。況八九十乎。誠可貴也。壽矣而或鱞或寡。自結髮至偕老者。百不一得。偕老矣而苟無子焉。則又不免於獨。其有親老在堂。而子得以榮養。蓋千萬人而一耳。尤可貴也。謂之具慶。詎不信夫。藝文館大提學晉陽河公演尊大人府尹公。年今八十有二歲。大未人鄭氏。八十有五歲。鮐背鶴髮。旣壽且康。承顏養志。盡其誠孝。猶且嫌然於不得008_491d晨昏于側。乃移居親舍之傍。開具慶之堂。率群季曁子若姪。黃金橫帶。戲綵衣以獻難老之觴。怡怡焉愉愉焉。百行之本立矣。一家之天地萬物。於是乎位育矣。搢紳歆之。以爲罕聞之盛事。國老郊隱鄭相國以吾首賦賀詩。名公鉅儒與夫一時文士分韻其字而歌詠之。總二十八編。雍容揄揚。金石鏘鳴。以侑壽席。可謂稱矣。大提學携以示余。且徵拙文爲序。辭不獲已。伏讀而嘆曰。父母俱存。兄弟無故。此正孟子三樂之一。雖人所深願。而不可必者。今公獨能得之。宜乎公之樂其樂而人亦樂公之樂也。豈本之深而積之008_492a久者。有以致之歟。抑不愧不怍。勉其在於我者。而係於天者如期而自至歟。公其益勉之哉。厥今功成治定。禮樂方興。朝議欲擧養老乞言之典。復三代之風。回壽域之天。余觀府尹公年耆德邵。神相吉康。躋于上壽。一步武之間耳。他日爲五更三老。躬享盛禮。賁餙太平。斯乃邦家之光。豈特河氏一家之慶而已乎。宣德六年辛亥某月日。茂松尹淮謹序。

 

具慶堂詩帖 權近

爲構新家出郭歸。晨昏省問欲無違。慕深五十知誠孝。壽享期頤仰德徽。冬日更溫懷祖膝。春風長嫩老008_492b萊衣。嗟余早抱終天痛。具慶如公古亦稀。

又 此下三篇。出海東名迹。○崔興孝
人生老壽智難求。一樂從來天所係。晉陽河氏禮義門。孝友相傳知幾世。德必有報天之常。福慶綿綿流後裔。於惟判牧君子人。不失家聲能善繼。早年攀附風雲會。晚節怡愉退私第。壽與天人共八耋。契闊百年堅信誓。振振蘭玉式相好。列侍庭前常接袂。間有藝文氣超群。性理學到天人際。嘗師聖言慕曾閔。慨然有意行古制。獨得人間難得樂。去側寸陰思若歲。具慶堂起三槐傍。喬梓掩映堂前蔽。公餘暫不離親008_492c側。所性子職勤不替。千載德星奚獨美。偉此具慶同恩例。老夫幸入芝蘭室。每見用心眞豈弟。一國仁讓本一家。會見東方興孝悌。爲報太史須特書。振起網常事豈細。

趙末生
鄒書俱存能一樂。箕疇曰壽首五福。爺孃壽考人皆欲。上繫蒼天固難卜。當今老星照誰屋。晉山遙遙華胄族。雙親期頤享百祿。兄弟無故更敦睦。堂開具慶披彩服。良辰獻壽趁時俗。華筵千載樽盈綠。五冠歌吹雜綠竹。曾玄擁侍盡蘭玉。親賓濟濟輪蹄簇。門欄008_492d光彩何郁郁。一堂春風和氣足。旣供子職誠孝篤。宜乎補衮承寵渥。固知山甫神降嶽。大雅君子增勉勖。德門高起踵前躅。子孫世世相繼續。爲公欲和南陔曲。愧我無辭恒跼縮。

辛引孫
新堂名具慶。端爲雙親具。孝子常愛日。心焉懷喜懼。移家就親側。扶侍無朝暮。壽觴綺席開。親戚共相聚。綵衣舞且戲。翩旋弄風度。嬀姬歌遏雲。矇叟奏徵羽。怡愉樂庭闈。勝事難以喩。育位和氣多。無窮維慶祚。孝可移於忠。早被殊寵遇。有源流必長。根深幹亦008_493a固。積善終有慶。此理天所賦。我亦同屬籍。通家有親故。歆跂不可及。噓嘻徒永慕。古人負米歸。彷徨嘆風樹。如公世上稀。屈指誰可數。

 

妥眞堂奉安文

五世孫師傅渾

吁我三嗣。卽我同知。旣以長房。禮遷于此。特我影像。安忍獨埋。兹據繼高。得祭先祖。不先父食。蓋驗前言。矧我同知。孝出天性。異著物感。表樹門閭。繼述忠賢。勳載鐵倦。宜其錫類。帶礪無疆。效聖仍舊。敢依前規。允我先生。展也中振。事親以孝。事君以忠。學博德宏。風儀端雅。貪淫彈擊。一以扶正。勳載國乘。無媿前008_480a昔。宜其立祠。柰士風頹。顧吾孱孫。不敢不盡。移建一廟。涓吉奉安。是憑是依。永享百世。

 

新川書院奉安文

觀察使具鳳瑞 

昔我聖祖。飛龍在天。利見大人。有曰儒賢。惟公令008_480d德。出乎天性。孝以爲本。義以制行。溫凊盡道。就養無方。恭職一心。惟誠是將。餘力學文。華聞博洽。暫時科臼。一擊三捷。鵬搏溟海。鴻漸雲路。蜚英藝苑。颺彩烏府。承命銀臺。出納惟允。觀風上國。專對克愼。攘斥夷敎。孔道以明。選擧得人。朝著肅淸。杖鉞四隣。國有藩垣。歷職司寇。民自不冤。摠統百揆。輔相三后。注倚之隆。大旱霖雨。自任之重。元首股肱。功存社稷。惠被生靈。常修聖。眷久而彌至。命之配廟。錫之徽諡。君思臣烈。輝映靑史。遺澤之斬。何必五世。餘慶乙流。爰及苖裔。誠深追遠。慕切羹墻。作堂儼儼。008_481a公像在堂。春秋匪懈。祗薦芬苾。隆報之典。庶無闕失。然而摹寫。易至陽剝。欲圖久長。莫木主若。況兹德業。非一俎豆。盍改影堂。號以儒宇。揭虔妥靈。以享以祀。雲仍唱義。士林合意。以日之吉。奉安神位。潔爾尊爵。有踐豆籩。靑衿駿奔。式禮莫愆。其始自今。永世無斁。伏惟尊靈庶幾歆格。

 

妥眞堂忠孝門事實

五世孫渾 

萬曆四十三年乙卯九月日。文孝公,同知,護軍三府君墳塋。修理改封行祭訖。與京野宗戚二十餘員。退而草坐。酌脧之餘。渾愀然咄咄曰。吁。先世以忠孝傳家。而兵燹後戊申。影堂移建陜川。蘇萊二旌門。頹廢已久。古基草沒。吾宗族曁卿士之論。皆以爲旌門不008_488c可不重建。而移立於影堂所在處爲宜。遂與章甫申于禮部。禮部任其事以照舊褒異之典。又以影堂宣額之意並入啓。允下曰妥眞堂。同年十月十四日也。禮曹又以旌門移建事。行關本道。官庀門事。時觀察使成晉善,郡守李直彥。皆奉承曹移。發夫于煙戶。轉瓦于縣倉。將以不日竣事。渾竊念凡人旌表之門。必於路傍。有近誇示虛文。非士子家處事也。旋卽固辭公家之力。私立塞門於影堂之前。榜曰領議政府事文孝公河演忠孝門。孝子同知中樞府事河友明忠孝門。揭之爲分上下。其下因設出入之門。殊不008_488d與俗規之比。而亦衣錦尙絅之意也。略記顚末。以資後日之觀感。幸矣。

 

宗川書院奉安文

參議閔昌道

伏以秦漢以來。無識敬字。猗嗟先生。考亭是事。揭顏齋號。潛心銘義。夷攷欛柄。夫豈無自。木翁鳳雛。圃老蛾子。天陶行源。感發觸類。具慶堂開。寶藏庫置。維悌維睦。以詩以譜。起卽廟展。坐必闕莅。所又赫然。家國一視。獻陵賞直。執手褒美。世宗知忠。委心圖理。潔邁振衣。榮如脫屣。凡此受用。非學曷致。學爲已任。先要闢異。疏以天討。韓表同幟。維罔不欽。是以終008_481c始。相耶儒耶。何物不器。相旣廟配。儒胡祠悶。蓋緣代逖。亦有時曁。士林齊聲。州嘆邦喟。恭惟望姓。德賢所萃。徵君董道。諍臣正誼。俎豆有所。倂躋宜亟。于晉有光。昔寶今瑞。兩賢不昧。亦應欣企。涓吉揭虔。洋洋儀賁。靑衿仰止。陰騭是冀。遺訓有受。日彊鼓笥。德基禮輿。敢忘大賜。

 

友鹿書院上樑文

正言申必淸

伏以瞻遺像而興懷。益篤追遠。援尊祖而起義。更管妥靈。宗法復明。民德歸厚。恭惟文孝公敬齋河先生淵源之學。忠孝其家。夙歲摳衣。出入圃隱門下。暮年斑服。蹁躚具慶堂前。殷鼎調羹。幾任鹽梅之責。漢廟008_486a配食。不專師傅之恩。擧彝典而特褒。允矣文孝。以榮名而爲貌。肅焉淸高。嗟舊德之已衰。幸眞容之尙保。遠矣十世之下。遺澤豈存。儼然一幅之中。厥像惟肖。歲月滋久。丹靑有剝落之嘆。音容漸遙。羹墻切來仍之慕。湮沒是懼。遂修舊幀。永圖惟懷。更謀新綃。繪事纔訖於開面。英風益爽於傳神。有婦人焉卽公之配。此丈夫也上相之尊。玉帶錦袍。髣髴待漏之曉。霜髭雪髮。依稀用腆之辰。祧主已遷。豈立越禮之廟。盛德必祀。盍有揭虔之堂。爰就孱孫之居。乃卜正寢之左。文山北枕。遠邦蘇萊之光。晉水南望。猶帶凝石之008_486b影。群趨競勸。倏瞻楹桷之崇。後廣前修。允合芬苾之所。江山生色。澗壑增輝。冶罏乍離。始得敬宗之義。靈祠載刱。克盡報本之誠。將擧脩樑。敢陳善頌。兒郞偉拋樑東。負笈曾從圃隱翁。自號敬齋非偶爾。一生得力在箴中。兒郞偉拋樑西。尼丘磨天落日低。惟我先生生此地。終登黃閣築沙堤。兒郞偉拋樑南。凝石晴峯鎖翠嵐。元正高風猶不死。至今遺範儘尊嚴。兒郞偉拋樑北。千古佳城碧海曲。墳前有石燈長明。008_486c孝子欒欒夜夜哭。兒郞偉拋樑上。三百年來一畫像。曾自蘇萊來冶罏。流傳南北尙無恙。兒郞偉拋樑下。三楹非陋亦非過。雲旗風馬神洋洋。歲歲春秋祭二社。伏願上樑之後。家聲不隳。宗支益茂。小子有造。奉殷斝而駿奔。偉人篤生。秉周禮而鵲起。無忝石氏孝謹。復大于公門閭。

友鹿書院眞像改模記

大德必得其位必得其壽。宗廟享之。子孫保之。德之有聖賢。位之有等級。其所壽而享而能保其子孫。各008_486d以類焉。夫道學爲百世淵源。功業爲一國山斗。詢之在黃髮。配之在太室。瞽宗典其祀。來裔繩其武。乃有不隨死以死而致其生。不爲祧以祧而如其在。崇餙儀物。以世其祀。影之設是已。稽昔我國初。有文孝公敬齋河先生師事鄭圃隱先生。爲世名儒。逮英陵盛際始顯。與吾先祖忠簡公爲道義交。並轡黃閣。爲國名臣。端廟癸西。論師傅舊恩。配享文宗廟。贈諡文孝公。嶺之士慕遺愛。以貫鄕於晉多遺躅。享宗川書院。雲仍於陜僾遺風。刱新川書院。至肅廟在宥。賜祭蘇萊墓。英廟朝又賜侑。正廟008_487a丁巳。特侈以宸翰。若曰。英陵之世。其相維何。維黃維許。丸功是歌。卿實承之。若蕭于曹。相門如海。樽有醇醪。世躋仁壽。民頌寧壹。曁于綠野。康彊大耋。聖人光御。群龍翼翼。無迹可尋。各聽厥職。何處得來。曠感者深。酒馨肴芬。其來其欽。曠感宸忠。必有以矣。第三胤蓮塘公爲終身慕。手模先生影。又模貞敬夫人李氏影。設堂于蘇萊山下。壬辰亂。倭人慕絶晝。負重不能進。進藏巖石龕陷。夢遺孫遂無恙。尋移於陜。是爲妥眞堂。凡名碩之配于庭。視君上。文室毀。先生廟祧于家。肅宗戊子。始奉遺像就湖西之文義008_487b縣。卽胄孫郡守羲圖家也。又就而俎豆。因地號號友鹿影堂。至今上辛巳。模本殆四百載。塵煤化空。寒暑閱久。膠解而毛其綃。若人老日不知而歲就衰耗。零星遺仍。財弱而殫其力。體重而難其畫。屬疏代逖。莫適一心。十四世孫寅爀積誠而擔其重。歷謁諸名卿。感其爲爲先祖肯述。樂其爲爲先生與榮。就國畫愼重之。遠邇子孫絡續。始描累百年遺眞若一手。嗚呼。門海醇醪。想像髣髴。而垂紳正笏。典型其老成矣。升源追先祖道義之契。展拜而尙其世。蓋先生之德。利在見九二。嚮用得五一。躬曁有經緯之文。世類多008_487c堂構之賢。風采動人。自有模楷。而想聞於輿情。蓮塘公深愛而慕終身。又在於影。著存之懷。寓諸淸高。矧又匹美在左。孔邇之樂。永垂來世。正氣所寓。神物相隨。較重若泰山。勿墜其峻谷。尤可敬而不敢斁也。然不有新之。終於弊已。寅爀丈積誠擔重。惟恐一日不改。弊而無徵。是忘先也。又恐一毫不眞。爽而難信。是忝先也。忘先惟罪。忝先亦罪。洞屬然積日計歲。就信十分。噫。子孫之所守保。豈徒以哉。追遠之孝。於斯爲大。後之人勿替是引。羹墻之思。在爾名祖。其必惕然有懷。愾然有聞。又不在丹靑之末矣。崇禎紀元四周008_487d乙酉。後學宜寧南升源謹記。

 

柏山書院奉安文

參判曺鳳振

維康有丘。世毓厥祥。篤生偉器。羽儀巖廊。圃牧嫡傳。008_481d黃許齊芳。曰文曰孝。宜其壽康。寧王錫酹。衮褒斯煌。賢胤寫影。庸寓羹墻。三毛八神。褒鄂湯湯。晨夕瞻依。妥眞之堂。昔逮龍蛇。賊闖干藏。壑舟夜徙。柰彼猖狂。若有神呵。旋嶺而僵。留保荒广。屢換星霜。感發宵寐。如珠還滄。安此鹿洞。宛其容光。倘非英靈。詎全搶攘。君子之道。萬世彌彰。歲久而愈。匪忽讓將。來雲合謀。重模易粧。爾饎旣蠲。爾醑且香。柏山峨峨。永奠無疆。

 

肅淸堂記

大司諫李世瑾

堂在安岳郡東。卽我外先祖敬齋文孝公影幀享祀所也。永樂年中。公便養。由侍從出知兹郡。三載。政淸事簡。學校兵戎。靡不革修。又勤於農。親乘小車。日巡郊野。自製新謳以勸民。於是焉一境之荒畝盡闢。至今頌公之德不衰。公本晉州人也。子孫流落。或居於湖西。或居於本郡。郡人待之殊別。蓋其桐鄕之去思。愈遠而愈深也。公之眞像。久失於兵燹。崇禎庚辰。嶺南具觀察鳳瑞以公外裔。巡到陜川。祗謁公俎豆008_488a之所。仍求公遺像。雇晝工模藏。自製文以贊曰。三韓眞氣。一代宗臣。經綸當日。功德在人。侐彼新宇。遺像儼然。宜壽其傳。胡不萬年。又訪公後孫之居文義者。出力建祠。奉其一本。慕仰之誠可謂至矣。今上丙午春。文義宗人等發文通告于郡居宗人曰。先祖遺愛之鄕。亦宜建祠。一體同祀。郡宗人星圖等以其文示一郡士林。咸曰。諾。齊籲于郡曁營。乃許之。遂立祠。齎送興圖等模來文義藏本。沿路備儀迎送。至郡。父老咸若陪杖屨。贊文所云功德在人者。信不誣也。噫。世代雖邈。滄桑不變。羊公舊德。峴首之石尙存。武侯008_488b遺像。錦官之祠載新。春亭筆峯。環擁於左右。漢川楊山。拱邦於後前。洋洋如在。芬苾馨香。則雲仍之省識。士庶之瞻依。必將千百載如新矣。不佞亦公之外裔。竊幸其與有榮焉。遂爲之記。

 

南原山洞碑閣序

奧若諦河相國文孝公之心迹。其位名器量。不啻止赫人耳目。至若夢界之妙悟。靈臺之感應。快活了神物之濱死。此豈庸常人所可測度而企及也。昔宋元君之夢也。知神龜之豫且所綱。陵陽子明之釣溪也。解白龍之中鉤。而後得白魚腹中書。用其敎遂服五石脂而得仙術。張華之受人鮓也。知其爲龍鮓。而俾008_490c沃酒于鮓。果驗鮓中之五彩。此皆至人格致之明見。寶無古今之殊也已。蓋公之刺完而巡南府也。夢一老夫憂縣舍撼公枕。選耎唏悒而前曰。嗟吾五孫之厄。當公八珍之具。庶肯活界否。仍吟九登三飮未及等句而退。公卽頓悟而問縣廚之膳羞。則果有五鯉之當殂。卽放諸淵。仍造淵上而俛仰。忽雲影噓起。其半空之氣。汨陵谷涵淵水。俄有黃龍挾左右曲而蜿蜒。披西雲而見爪。綴東雲而庇鱗。白髥黑角。有若拜揖謝公然而熟視。噫。公之感神物導生界也。何異乎夢神龜解鉤龍沃龍鮓。若箇輩。格致之明見也。尤緬008_490d想河相之仁愛。至若及物之惠澤。亦不外乎赫耳目之器量也云耳。資憲大夫行吏曹判書兼奎章閣提學金洙根。謹序。

又 判書李明迪
龍。神物也。能茫洋乎玄間。興雲雨水下土。方其振鬐鼓鬣。奮迅而騰躍也。令人眩轉恐怖。莫之敢近焉。乃或失水而困于泥沙。則童孺皆得以狎侮。又從而烹宰之。肆夏有豢擾之官。而白龍魚服見戒於輕出者也。龍猶然。況其種類之之而鱗鬣未及變化者耶。我國初名相河公諱演。在永樂十九年。拜全羅道觀008_491a察使。行部到帶方過山洞。有詩刻于石。山洞在治之中防懸。其下有深淵。龍所家也。傳公宿縣舍。夢有一老人來告曰。吾孫有五。爲公饋被捉矣。願勿殺也。因以詩贈之曰。九登龍門山。三飮大海水。未及成龍時。命付泿孺子。公驚悟而訊之。果有五鯉生捉。卽令放舍之。踵遊于淵上。忽雲影來涵。俄而晦冥。有黃龍初出左鬐。食頃而後出右鬣。亦如之。終出首大如馬頭。白髥黑角。熟視良久。逌然而逝。可異也。噫。濱海淵谷之間。捕獻爲生者多矣。其種類之爲人所獲。果皆能托夢而見活否耶。龜亦四靈之一也。見獲於豫且。夢008_491b宋元君以求活不啻丁寧。而卒用衛平言。釁剝而龜灼之。夫元君。賢君也。衛平。賢相也。猶且忍爲。況於獻人乎。況於宰人乎。其遇仁人君子。得免於刀俎之厄者。亦幸也已矣。嗟夫。以龍之神物焉。而不能庇護其窟宅若卵育。以自遠害。而乃區區乞憐於宵寐慌忽之頃者何也。蓋公之厚德弘量。孚信及物。彼故出而試之。以卜異日三鱣之兆也耶。以我朝慶李八鱉之異。傳在野史。書之爲國巨閥。以類推之。未可謂無是理也。公卒致三事。澤施於人。子姓蕃衍。至今不替。豈非是故耶。公之裔孫持遺蹟徵文於余。余遂不辭008_491c而爲之序。以備州之故蹟云爾。

 

安岳丘臺碑銘 並序

牧民者有能立大功利于民。則民豎石累土而表其功。使仁人君子。身雖沒名不朽。世愈遠而澤彌存。卽世之遺愛之碑。去思之壹是也。然民之所以如是者。不惟思其已往之人而樂其旣成之業而已。將欲使繼來而爲政者。觀物起意。毋忘前人爲民之心也。故其所爲表功者。雖片石腐壤之微。民莫不重惜之。以其人而不忘之意也。安岳郡南十里有河丘。卽故知008_489a郡事敬齋河相公演表功之所也。昔郡大野之墊阿斯萬壑之水。盧葦叢焉。魚鱉產焉。若今下坪。猶冒魚蘆之號者是已。歲永樂六年。公出知郡事。惜其地之不食曰。是水害去則沃壤也。遂請道伯發九郡煙軍。大築堤而防之。凡南北兩堤之間。卽水之道。而水退之處。則可以耕種焉。土旣乂。相厥土而敎播。厥作農謳。使民歌之。脊原黍菽。汚耶稻粳。卽其辭也。自是土膏興而產業增。用穀開以西四境者。岳之餘爲多。則公之爲岳民立功利。豈不博且大哉。及公之歸也。岳人惜公去思公德。相與謀所以爲公表功者。遂就公008_489b所舍。各簣土而阜之。號曰河丘臺。迄今四百有餘年。隆然若天作。而歷世旣久。野言易失。邑人轉訛爲河墳焉。及甲辰春。余忝恩除是邑。莅數月。公之十四世孫邑生學魯者。狀辨河墳之疑誣。而問諸故老則亦莫有詳者。及見故巡察使李公時彥輅詩力折壞壤導衆谿。河堤曾不讓蘇堤。誠心到底烝民粒。拳土成來大阜齊。數曲農謳山月晚。一區陳迹野煙低。欲知功德傳無極。看取黃扉姓字題句載邑誌者。而後信曰。噫。河墳之誣。豈惟岳民之過也。夫養民之事非一。而治地爲先。是以。南陽之理。必稱信臣。河內之人。008_489c永懷史起。今岳民耕野而不知野之所由闢。謳歌而不知歌之所由作。至使董子之陵。變成蝦蟆之稱。烏在其重惜而不忘之意乎。然其所忘者丘也。丘在公爲外物。則民之忘。特公之小者爾。有忘公之大者於此焉。公旣治沮洳作膏腴。化弊邑成樂土。使斯邑之富。能爲海之最。則率由而行。宜乎日就其盛也。而今行其野。則田疇廢而溝澮塞。觀其都則新室惡而故室美。此豈非後公而來治者。忘公爲民之心而然者歟。與其忘公之丘也。孰小而孰大焉。此余所謂河墳之誣。不惟岳民之過也。噫。爲岳民者忘公之力而忘008_489d其丘。爲岳之民牧者忘公之心而忘其民。柰之何民不窮而邑不弊也。公文學經濟。事我世宗。躋登台揆。贊襄庶政。致堯舜太平之業。名光簡策。配食文宗。則公之嵬勳偉績。固不在於一縣之治矣。至若丘墳之誣。在公尤無傷。則亦何足多辨。然余所以區區於此而不已者。非他焉。今安邑之民。可謂勞止。有能如公而治者。猶可以小康。而其人實難於今日。則不能不誦於旣往也。惟誦之甚故思。思之切故愛。愛人者及其屋烏。況斯丘臺。象公之功德者也。何忍其受誣而不辨乎哉。禮曰。有功德於民者。百世而祀之。公008_490a於岳民。實有百世之功德。而不載於祀典。余尤懼夫愈久而愈失其眞傳。因伐石而紀。繼以銘曰。揚嶽靈秀。蘆野育毓。有臺屹然。爲誰伊築。昔兹之邑。水澤于陸。宅土泛泛。自何能穀。天眷西穡。公來司牧曰視地利。去澇則堉。迺堤西堰。導流歸瀆。不騫不崩。衆力之勠。南東其畝。潤以霢霂。水澍粳稻。陸蒔黍菽。民曰樂哉。終身哺腹。稻衣魚粒。公錫之福。於乎不忘。衆至匍匐。表厥茇舍。累蕢之覆。倏爾丘臺。不疾不速。勿毀勿缺。公所止宿。萬壑滔滔。公惠斯沐。大阜峨峨。公德斯畜。我行其野。遺躅在目。百世之下。求言心祝。008_490b崇禎紀元後四乙巳十月日。通政大夫行安岳郡守兼黃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中營將討捕使,奎章閣檢敎待校,知製敎南秉喆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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