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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陽河氏 司直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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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구대(安岳邱臺)

 安岳丘臺碑銘 並序

牧民者有能立大功利于民。則民豎石累土而表其功。使仁人君子。身雖沒名不朽。世愈遠而澤彌存。卽世之遺愛之碑。去思之壹是也。然民之所以如是者。不惟思其已往之人而樂其旣成之業而已。將欲使繼來而爲政者。觀物起意。毋忘前人爲民之心也。故其所爲表功者。雖片石腐壤之微。民莫不重惜之。以其人而不忘之意也。安岳郡南十里有河丘。卽故知008_489a郡事敬齋河相公演表功之所也。昔郡大野之墊阿斯萬壑之水。盧葦叢焉。魚鱉產焉。若今下坪。猶冒魚蘆之號者是已。歲永樂六年。公出知郡事。惜其地之不食曰。是水害去則沃壤也。遂請道伯發九郡煙軍。大築堤而防之。凡南北兩堤之間。卽水之道。而水退之處。則可以耕種焉。土旣乂。相厥土而敎播。厥作農謳。使民歌之。脊原黍菽。汚耶稻粳。卽其辭也。自是土膏興而產業增。用穀開以西四境者。岳之餘爲多。則公之爲岳民立功利。豈不博且大哉。及公之歸也。岳人惜公去思公德。相與謀所以爲公表功者。遂就公008_489b所舍。各簣土而阜之。號曰河丘臺。迄今四百有餘年。隆然若天作。而歷世旣久。野言易失。邑人轉訛爲河墳焉。及甲辰春。余忝恩除是邑。莅數月。公之十四世孫邑生學魯者。狀辨河墳之疑誣。而問諸故老則亦莫有詳者。及見故巡察使李公時彥輅詩力折壞壤導衆谿。河堤曾不讓蘇堤。誠心到底烝民粒。拳土成來大阜齊。數曲農謳山月晚。一區陳迹野煙低。欲知功德傳無極。看取黃扉姓字題句載邑誌者。而後信曰。噫。河墳之誣。豈惟岳民之過也。夫養民之事非一。而治地爲先。是以。南陽之理。必稱信臣。河內之人。008_489c永懷史起。今岳民耕野而不知野之所由闢。謳歌而不知歌之所由作。至使董子之陵。變成蝦蟆之稱。烏在其重惜而不忘之意乎。然其所忘者丘也。丘在公爲外物。則民之忘。特公之小者爾。有忘公之大者於此焉。公旣治沮洳作膏腴。化弊邑成樂土。使斯邑之富。能爲海之最。則率由而行。宜乎日就其盛也。而今行其野。則田疇廢而溝澮塞。觀其都則新室惡而故室美。此豈非後公而來治者。忘公爲民之心而然者歟。與其忘公之丘也。孰小而孰大焉。此余所謂河墳之誣。不惟岳民之過也。噫。爲岳民者忘公之力而忘008_489d其丘。爲岳之民牧者忘公之心而忘其民。柰之何民不窮而邑不弊也。公文學經濟。事我世宗。躋登台揆。贊襄庶政。致堯舜太平之業。名光簡策。配食文宗。則公之嵬勳偉績。固不在於一縣之治矣。至若丘墳之誣。在公尤無傷。則亦何足多辨。然余所以區區於此而不已者。非他焉。今安邑之民。可謂勞止。有能如公而治者。猶可以小康。而其人實難於今日。則不能不誦於旣往也。惟誦之甚故思。思之切故愛。愛人者及其屋烏。況斯丘臺。象公之功德者也。何忍其受誣而不辨乎哉。禮曰。有功德於民者。百世而祀之。公008_490a於岳民。實有百世之功德。而不載於祀典。余尤懼夫愈久而愈失其眞傳。因伐石而紀。繼以銘曰。揚嶽靈秀。蘆野育毓。有臺屹然。爲誰伊築。昔兹之邑。水澤于陸。宅土泛泛。自何能穀。天眷西穡。公來司牧曰視地利。去澇則堉。迺堤西堰。導流歸瀆。不騫不崩。衆力之勠。南東其畝。潤以霢霂。水澍粳稻。陸蒔黍菽。民曰樂哉。終身哺腹。稻衣魚粒。公錫之福。於乎不忘。衆至匍匐。表厥茇舍。累蕢之覆。倏爾丘臺。不疾不速。勿毀勿缺。公所止宿。萬壑滔滔。公惠斯沐。大阜峨峨。公德斯畜。我行其野。遺躅在目。百世之下。求言心祝。008_490b崇禎紀元後四乙巳十月日。通政大夫行安岳郡守兼黃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中營將討捕使,奎章閣檢敎待校,知製敎南秉喆撰。

 

문효공께서 는1408년 황해도의 안악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한 이후 여러가지 공덕 가운데는 특히 안악구대(安岳邱臺)가 이룩된 것이 있다 안악군에는 큰 들판이 있어 오랫동안 황무지로 물에 잠겨 갈대가 우거지고 물고기와 자라가 사는 고장이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하평(下坪)이며 어로(魚로)라는 이름의 지역으로 이곳이 어떤곳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문효공께서 는 이곳을 수해(水害)만 없애면 기름진 옥토(沃土)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관찰사(觀察使)에게 청하여 인근 아홉고을 의 부역(負役)군을 동원하여 제방(堤防)을 크게 쌓아 수해(水害)를 막으니 남북의 양쪽 제방 사이는 물길이 되고 물이 들에서 물러난 곳은  옥토(沃土)가 되었다
그땅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짓게되니 문효공께서는 즐거워 하시고 농부가(農夫歌)를 지어 백성으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으니 그 가사(歌辭)를 소개(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마른 언덕은 서숙이요 ,진곡은 멥살이라".

대강 위와 같다

이 농부가(農夫歌)가 전국 방방 곳곳에서 불리어 졌다고 하니 문효공이 안악의 백성을 위하여 세운 공(功)이 어찌 넓고 크다 하지 아니하리요 .문효공께서 임기(任期)를 마치심에 안악 사람들이 문효공이 떠나심을 아쉬워하고 그 공덕(功德)을 길이 빛나게 하기 위하여 의논한 끝에 문효공이 사시던 곳에 큰 돈대(墩臺)를 만들고 돌을 다듬어 세울려고 하니 백년도 못갈 것 같고 흙을 모아 돈대를 만들면 수천년을 지나도 변함이 없을 것이니 흙을 모아 돈대를 만들어 그 이름을 하구대(河邱臺)라 하였다
지금까지 5백여년 이 흘렀으나 높다란 돈대(墩臺)가 마치 천연적으로 된 것 같고 세대가 오래되어 그 고을 사람들이 잘못 전하여 하씨의 무덤이라 전하여 오기도 한다 그 뒤에 순찰사(巡察使)이시언(李時彦)이 쓴 시(詩)에는

 

" 힘써 흙을 파서 하제(河堤)하씨가 만든 제방(堤防)은

소제소식(蘇堤蘇軾)이가 만든 제방 만 못하지 않네."

 

하였다 현재도 안악군청(安岳郡廳)소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곳에 하구대(河邱臺)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 큰 돈대(墩臺)가 있는데 그밑 둘레에는 자연석 처럼 3미터 정도의 높이로 돌이 쌓여있고 그 돈대 (墩臺)크기는  지금의 경주 왕능 (慶州 王陵)크기의 3배 정도라 한다  문효공께서 황해도 안악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한 이후의 공덕(功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1485년10월에 안악군수 남병철(南秉喆)이 지은 詩 는 다음과 같다

 

    " 높이 솟은 산봉우리 신령스럽고, 들에는 갈대풀이 자라고 있었네

    대가 우뚝 솟아 있으니,누구를 위하여 쌓았는가

    옛날 이 고을에,땅은 물과 못이더라

    집 지을 땅에도 물이 넘쳐 흐르니, 어찌 곡식을 심을 것인가

    임금이 해서 지방의 농사를 걱정 할세,공이 목민관으로 오시었도다

    지리를 돌아 보시고 말하기를, 물에 잠기는 것만 없애면 기름진 땅이로다

    이에 서쪽으로 둑을 쌓아 ,물길을 내어 도랑으로 흐르게 했더라

    훼손되지도 무너지지도 아니 하게 하여,모든 사람이 힘을 다해 일 했도다.

    남동 밭고랑엔,이슬비 내려 윤택하고 물대는 젖은 땅에는 벼를 심고,

    마른땅에는 기장과 콩을 심었네

    백성은 말하길 즐거울 사이 몸 다하도록 배불리 먹겠구나

    벼와 옷 고기 곡식이 모두가, 공이 주신 복이로다

    아 ! 잊지 못하겠구나, 뭇 백성 허둥지둥 달려와서

    풀베고 땅 돋두어 표를 세우려,삼태기로 흙을 거듭 날라서

    빨리도 구대를 이루니, 급하지도 속하지도 아니 하였도다

    훼손하지도 말며 이지러지개도 하지 말라,공이 머물러 묵는 곳이다

    일만 골짜기 물 절편 하였는데,공의 혜택이 이곳에 내리었도다

    큰 언덕 높고 늠름한데. 공의 덕이 쌓인 곳이다

    내 그 들판을 거닐으니, 끼친 옛  발자취 눈에 가득하구나 "

 

문효공 하연(河演) 할아버님께서 안악에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관이 없었서 선비들이 공부도 하고 여흥을 즐길수 있는 정자를 5채 를 지어주셨다 고 한다  정자 이름은 , 영춘정(迎春亭) , 편월정(片月亭) , 필봉정(筆峯亭) , 대수정(大樹亭) , 어약정(魚躍亭) ,이며 지금도 잘보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야(田野)간을 순행하면서 스스로 농사지으며 부르는 노래 두어 곡을 지어서 권장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42권 黃海道 安岳郡 名宦 本朝≫

영조대왕 2년 병오(1726년) 봄에 안악 숙청당(肅淸堂)이 낙성되었다 안악(安岳)은 즉 경재선생이 사랑을 남긴곳이다 안악에 선비와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초상을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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