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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陽河氏 司直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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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공 내외분 영정

 

타진당은 진영(眞影)을 편안하게 모신 집이란 뜻인데 문효공(文孝公) 내외 분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타진당이 전국 도처에 산재(散在)되어 있다  문효공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은 경기도 시흥에 있는 소산 서원인데 소산서원(蘇山書院)내 문효사에는 위패만 모셔져 있다  그리고 충북 청원에 있는 우록서원은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때 훼철되었는데 아직 서원복원은 못하고 있으며  타진당만 남아 있는 실증이다 원래 문효영당에 모셔져 있던 문효공선조님 영정은 도난을 당하여 정경부인 성주이씨 할머니 영정만 따로 보관되고 있다
전북 무주 무풍에 백산서원(栢山書院)내 타진사, 경남 합천 야로면 돈평에 경모재 내 타진당, 전남 광양에 타진당(妥眞堂) ,경북 성주에 주일당(主一堂), 영천 신령에 무원서원(武原書院)내 숙청각,등에는 두분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새로 완공된 합천 야로 돈평(妥眞堂) 타진당 전경

 

경북 국립대구 박물관에 기증한 원본영정

 

아래에 있는 영정은 문효공선조님의 원본영정으로 추정되는 영정이다 얼마전 합천야로에 계시는 하재호일가님과 전화 통화를 했는데 말씀에 의하면 연당공께서 직접그린 원본으로 추정되는 영정2점이 몇 년전에 합천 경모재 내 타진당 영정 뒷쪽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 보존을 하기 위하여 보존처리 작업을 거쳐 박물관에 기증을 해야 될지 보관을 해야 될지에 대하여 논의중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 이후 우연이 인터넷검색을 하다가 경북 국립대구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2005년 6월 30일 합천타진당 문중대표 하재호씨가 공식적으로 기증했다는 글을보고 본인이 직접 국립대구박물관 홈페이지 관리자께 메일을 보내어 기증한 영정사진을 디카로 크게 찍어 파일을 메일로 보내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고맙게도 박물관 관리자께서 영정 사진을 메일로 보내어 주셔서 이렇게 홈페이지에 올린다
맨 아래에 있는 영정들도 아래에 있는 영정을 보고 모사한 것이라고 문효공선조님 연보에 기록 되어있다

 

河演先生 및 貞敬夫人 影幀


 
문효공 경재하연(河演)선조님 영정


 
정경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세부모습


 
세부모습

朴 方 龍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실장)

1. 머리말

國立大邱博物館에서는 2005년 6월 30일 晋陽河氏 文孝公派 妥眞堂 문중대표 河在昊(慶南 陜川郡 冶爐面 冶爐里 103-1番地 거주)로부터 문중에서 보관하여 오던 河演先生과 貞敬夫人의 影幀 2점을 寄贈處理하였다. 기증된 이 영정은 晋陽河氏 후손들이 모시고 있는 여러 진영의 母本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까지 알려진 하연선생 부부영정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영정은 그동안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이며 조선시대 肖像畵硏究에 좋은 자료라고 하겠다.

여기서는 하연선생의 간단한 略曆을 소개하고 影幀의 현재 모습과 특징, 製作年代 등에 대하여 비교적 간략히 살펴보고자 하며 상세한 내용은 별도의 지면에 좀더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한다.

 

2. 河演先生의 略曆

河演先生은 1376년(高麗 禑王 2년) 8월 慶南 山淸郡 丹城面 南沙里에서 태어나서 1453년(端宗 元年)에 돌아가신 조선 초기의 文臣으로 字는 淵亮이고 號는 敬齋이며 諡號는 文孝이다. 本貫은 晋陽이다. 1936년(太祖 5년)式年文科에 급제하면서 奉常寺綠事를 거쳐 1425년에는 慶尙道觀察使가 되었고 이어서 禮曹參判, 平安道觀察使, 大提學, 吏曹判書, 刑曹判書, 左參贊, 右議政, 領議政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世宗이 각도에 지리지를 편찬해 올리라고 명하여 각도에서 地理志를 편찬해 올렸는데 이 때 하연선생이 만든 것이 『慶尙道地理志』이다. 그 밖에『國朝五禮儀』등을 편찬하였으며, 특히 河演先生은 議政府에 들어간 지 2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 청탁을 받지 않는 등, 법을 잘 지켜 ‘昇平守文의 宰相’이라 칭송받았으며, 文宗의 묘정에 配享되었고 肅宗 때, 합천의 新川書院에 祭享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이름난 文臣이다

  한편 夫人은 星州李氏이며 河演先生과 결혼하여 貞敬夫人에 봉해졌다.

 

3. 影幀의 現狀 및 特徵

 

國立大邱博物館에 기증된 문화재는 河演先生 影幀 1점, 貞敬夫人 星州李氏 影幀 1점으로 2건 2점이다. 簇子式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아래 위에 있었던 축이 모두 없어졌으며 河演先生 영정은 손상이 극심하다.


1) 現狀

    (1) 河演先生 影幀

       - 크기: 가로 약 95.0cm, 세로 55.0cm

       - 바탕: 비단

       - 상하 좌우가 결실되고 몸체만 남아 있으며 양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있다. 발은 가죽신을 신고 있는 듯하며 오른쪽 신발은 대부분 남아 있으나 왼쪽 신발은 결실된 상태이다.  

    (2) 貞敬夫人 星州李氏 影幀

       - 크기: 가로 140cm, 세로 82.0cm

       - 바탕: 비단

       - 河演 先生 影幀에 비하여 비교적 상태가 좋은 편이다. 상단에 푸른색 上帶가 있는 것으로 보아 下帶도 있었던 것 같으며, 상하에 木棒을 넣은 족자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2) 특징

河演先生 影幀은 현재 몸체만 남아 있어 세부적인 것은 알기 어려우나 후대에 모사된 영정을 참고해보면 原形을 추정 하는데 있어 무리가 없다. 하연 선생영정은 貞敬夫人像의 몸체로 보아 같은 크기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배경처리, 의자의 앉은 자세 등이 유사하므로 同時期에 같은 사람이 그린 작품이 확실하다.

  이들 영정의 원형을 살피는데 있어서는 현재 新川書院 소장의 영정이 참고가 된다. 우선 하연선생 영정의 경우 얼굴과 몸 전체를 왼쪽으로 약간 돌려 앉은 자세여서 오른쪽 귀만 보이고 왼쪽 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의자에 앉은 모습이고 양손을 무릎에 올려 소매 속에 감추고 있으며, 구렛나루  와 八字 수염, 冠帽와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國立大邱博物館寄贈本(以下 ‘寄贈本’)과 新川書院本(以下 ‘新川本’)은 차이가 없다. 寄贈本 하연선생 영정은 風帶가1) 있고, ?杖이 향좌측에 있으며, 뒤에는 사각탁자위에 盆栽와 그릇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은 風帶가 없고 배경이 여백으로 두었다는 점이다.

  貞敬夫人像은 하연선생의 자세와 반대로 向右側 이어서 왼쪽귀가 보이고 오른쪽 귀가 보이지 않는 각도로 되어 있다. 양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있고 뒤쪽에 직사각형의 탁자가 있으며, 그 위에 작은 꽃병을 놓았는데 붉은색 꽃이 활짝 핀 모습으로 꽃병에 꽂혀있다. 寄贈本의 貞敬夫人像은 옷 주름이나 못 모양 자세 등 여러 가지 면에서 新川書院本과 거의 같으나 풍대가 없고, 배경에 아무런 무늬를 그리지 않고 있어서 하연선생의 경우와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눈에 띠게 차이 나는 점은 新川書院本에는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었으나 寄贈本에는 없다는 점이다.

4. 製作年代 및 意義

寄贈本의 제작연대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新川書院本 하연선생 부부영정 외에 하연선생의 아들 河友明의 영정이다. 河友明은 그림에 조예가 깊어 부모의 영정을 그려 영당에 모셨고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며, 후손들이 그의 영정을 하연선생 부부와 함께 모셨다. 현존하는 河右明 영정 또한 新川書院에 전해오던 것인데 河友明 생존 시 그렸던 최초의 영정은 아니다. 新川書院本의 3점의 영정은 제작기법, 배경처리, 풍대의 모습 등에서 동일인이 같은 시기에 그린 것이 확실하다. 하우명 영정은 최초 그의 부모영정과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고 후에 함께 봉안되었다고 보여지는데 도상적으로 보아도 중심인물인 하연선생의 向左側에 좌정하였으며 선생의 왼쪽에 정경부인, 그 옆에 하우명이 아버지를 향하여 모시고 있는 모습으로 봉안하였음이 짐작된다. 현재 하우명의 영정 보다 앞서 제작되었던 옛 영정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新川書院本은 하연선생 부부와 하우명 세 분의 舊本影幀을 同時期에 同一人에 의하여 移模되었다고 보여 지며 그 시기는 18세기 이후로 추측된다.

최초로 하연 선생 부부의 영정을 影堂에 봉안한 것은 1467년(世祖 13년) 蘇萊山 옆(京畿道 始興市 新川洞)이라고 하며2) 河友明의 영정은 1495년(燕山君 元年) 11월 큰아들 哲石이 祖父母影堂에 함께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00년(宣祖 33년) 壬亂이 끝나자 暮軒公 河渾은 蘇萊山에 가 보니 묘소는 허물어지고 영당과 齋舍는 파괴되었으며 봉안하였던 三位影幀은 없어졌다. 1604년(宣祖 37년)에 蘇萊山 북쪽 바위틈 사이에서 찾았다고 하는데 “왜적이 影幀을 가지고 지나가던 중 등이 무거워져 산을 넘어 갈 수 없게 되자 바위사이에 놓아두고 바위 돌에 ‘이 영정은 天下의 名宰相이다’라고 써 놓고 가버렸다”3)라고 한다. 이렇게 찾은 三位影幀은 1608년(宣祖 41년) 河渾에 의하여 경남 합천군 야로면 鷹峰山아래로 옮기고 사당을 妥眞堂이라 하였다고한다4).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하여 三位의 影幀이 1608년에 현재의 妥眞堂(경남 합천군 야로면 야로리)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寄贈本이 바로 이 影幀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寄贈本의 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는 1821년(純祖 21년) 宜春 南升源이 쓴『妥眞堂眞像改模記 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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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영정이 거의 400년이 지나면서 먼지가 앉고 季節의 기온에 시달려 아교가 풀어져 터럭이 일어나며 肖像의 비단이 낡았다. 그러므로 14대손 寅赫이 책임을 맡고, 이름난 畵家를 시켜 愼重하게 그리게 하며, 또 자손들도 계속 후원하여 해를 넘기어 꼭 같게 그렸다』

위의 기록에서는 현전의 新川書院本이 1467년에 봉안된 원본을 보고 移模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壬亂을 지나면서 바위틈에 끼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많은 손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1608년 慶南 陜川으로 옮겨왔을 때는 100년이 지난 상태이므로 얼마 후 이를 移模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晋陽河氏 문중에서 전해오는 기록에는 具鳳瑞(1595 - 1644)가 慶尙監事로 부임해 왔을 때 新川書院 奉安文과 常享文을 지었다고 하며, 특히 하연선생 부부영정을 拜觀하고 너무 훼손된 것을 보고 影幀을 移模하게 하였으며 본인이 경비를 부담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具鳳瑞가 文科에 급재한 것이 1624년이므로 慶尙監事 재임은 17세기 중반 쯤 될 것이고 이 때 최초의 영정인 原本에서 改模하였던 것 같다. 실재 채색된 안료와 부인의 옷 모양 등으로 보아 최초의 15세기 것으로는 볼 수 없고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寄贈本은 아마도 具鳳瑞와 관련이 되는 17세기 중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妥眞堂眞像改模記』에서의 ‘400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畵記가 없는 상태에서 낡은 영정을 그렇게 본 듯하다. 그리고 이 기록에서 1821년에 改模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현전하는 新川書院本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河演先生 및 貞敬夫人 영정은 陜川 妥眞堂에 보관되어 있는 것(慶尙南道 有形文化財 278호)과 友鹿 妥眞堂(忠北 淸原郡 賢都面 友鹿里), 星州 主一堂(慶北 星州郡 大家面 上三里), 新寧 肅淸閣(慶北 永川市  新寧面 旺山里)6)과 茂朱 柏山祠(全北 茂朱郡 茂豊面 縣內里)7)도 있으나 모두 寄贈本을 移模하였거나 18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번에 기증된 영정 2점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河演先生 및 貞敬夫人 星州李氏의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중기의 초상화연구에 좋은 자료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귀중한 문화재라고 하겠다.

5. 맺음말

이번에 기증받은 河演先生과 貞敬夫人 星州李氏의 영정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하연선생 및 정경부인의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랜 것으로 판단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하연선생 夫婦影幀은 여러 폭이 전해오지만 모두 이 영정을 移模한 것으로 추정되는 후대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 영정은 肖像畵硏究에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이 영정을 기증받고 난 다음, 妥眞堂 門中에서는 합천의 新川書院 영당 앞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國立大邱博物館會에서 協贊하였다. 이에 비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妥眞堂 眞影實記 -

妥眞堂이란 三字는 王께서 하사하신 것으로 眞影을 편안하게 한다는 意味이다. 文孝公<內外 蓮塘公內외 四位影幀을 奉安하였는데 地方守令이 新任하면 必히 妥眞堂을 拜謁하므로 蓮塘할머니께서는 男女區別을 차려야 될 官職이므로 함께 모시지 못하고 三位만 모시고 있다. 文孝公께서는 圃隱 鄭夢周先生의 門人으로 文科에 及第하여 여러 要職을 거처 많은 功績을 남기셨고 蓮塘公께서는 孝性이 出天하여 生時에 孝子門이 세워졌고 書畵에 能하시어 父母任의 肖像을 그려 두었다가 喪을 마친 후에는 墓下에 影堂을을 지어 影幀을 모시고 出入할 때 告 하고 季節따라 나는 음식물을 드리셨고 後에 蓮塘公內外 眞影도 함께 모셨다. 壬辰倭亂後에 暮軒公께서 各處先山을 奉審修整하고 堂姪인 應寶 景緯 大義等과 함께 影堂을 奉審할 때 文孝公께서 暮軒에게 現夢曰 내가 蕭萊山 北岩間에 苦難을 當하고 있다하시므로 다음날 往審하니 倭賊이 그림을 탐내어 지고 가다가 무거워서 못가고 此 는 天下之名宰相이라고 石面에 써놓고 갔다한다. 宣祖 戊申에 陜川冶爐매봉 下로 影堂을 이건하고 光海 乙卯에 賜額되었다. 影幀이 退色되어 英祖 때 外孫인 觀察使 具鳳瑞가 改模하였고 祭物은 賜額後부터 官에서 定式供給하였다. 大院君때 新川書院과 함께 있던 影堂도 毁撤되어 后孫漢基家와 暮軒別廟에 權奉하다가 一八八三년 現 位置로 移建하고 一九九九年 道文化財 二七八號로 登錄되고 二千三年 道文化財에서 眞影을 褙接 補完하였다. 英祖때 影幀을 改模하고 舊本은 벽장 속에 모셔두었더니 漸漸衰頹하므로 宗會結果 後孫在昊를 推進會長으로 選出하여 國立大邱博物館에 寄贈奉審케 하고 影堂앞에 碑石을 세워 그 事實을 永遠히 傳하고자 僉宗 不敏한 저에게 碑文을 지어라 하시므로 저가 不文하나 어찌 끝내 外面하리오. 외람됨을 不顧하고 略述顚末하여 後日의 參考가 되게 하는 바이다.

二千五年立秋節    後孫 載禹盟手謹撰   後孫 致文    謹書

 

  竪碑協贊 國立大邱博物館會中

以上에서와 같이 河演先生과 貞敬夫人 星州李氏의 影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妥眞堂 影幀을 현장조사하지 못하였고 충분한 자료조사를 하지 못하여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못하였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전적으로 筆者의 무능력의 소치이며 후일을 기하고자 한다.

<附記>

어려운 여건 속에서 흔쾌히 影幀을 기증하여 주신 晋陽河氏 妥眞堂 종중의 河在昊 會長을 비롯한 후손, 기증사실을 영원히 기록하고자 세운 비석(‘妥眞堂眞影實記’) 건립에 협찬하여 주신 國立大邱博物館會 曹永吉 회장을 비롯한 회원 여러분께 이 紙面을 빌어 감사드린다.<<끝>>

 

진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영정

아래에 있는 영정은 (1640년)인조 18년에 영남 관찰사 구봉서가 외후손이 되므로 순찰하는 길에 합천야로를 방문하여 타진당 초상을 뵙고 초본(연당공 諱 友明선조님이그린영정)이 낡은 것을 안타까이 여겨 녹봉을 털어 다시 화상을 모사 하여 합천 타진당에 봉안한 문효공 할아버님 내외분 영정이다 합천군 국가문화재 자료 제278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문화재 도둑들이 설쳐 도난을 막기위해 진주박물관에 보관 되고 있다
※아래의 영정사진은 인천시립박물관 담당자가 진주박물관으로 출장가 직접 촬영하여 파일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진주박물관 담당자에게 소식을 듣고 직접 인천시립박물관 담당자에게 전화로 부탁을해 메일로 받은 사진이다


문효공 경재하연(河演)선조님 영정


 정경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

 

 

무주 백산서원 타진사 영정

조선 세종.문종 때 영의정까지 지내며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재상으로 일컬어진 문효공 경재하연(河演, 1376∼1453)선생 의 평생 선정(善政)을 기리고자, 1821년(순조 21)에 창건하여 그의 위패를 모셨다. 그런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그후 1905년 후손들과 유림들에 의하여 복원되고 거기에 하위국을 추가 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타진사가 있고, 또 3칸의 백산사, 4칸의 강당 외에 고사(雇舍:제구 등을 간수해 두는 곳으로,제향 때에는 제수 등을 준비해 둠), 행랑, 내신문(內神門) 등이 있다.
타진사에는 문효공 경재하연(河演)선생 과 정경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동쪽 벽에는 하위국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백산서원 에는 하징도, 하정도, 하형도, 하현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해마다 3월과 9월 상정(上丁:첫번째 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백산서원(栢山書院)에 봉안된 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은 왕궁 에도 없었던 한국최초의 문화재로 이 영정은 지방 유형문화재 제 81호로 지정이 되었다 1821年(순조21년)에 왕께서 타진사(妥眞祠)의 액호(額號)를  하사하여 백산 서원에 봉안하게 되었다


전남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백산서원

※백산서원 영정사진은 2005년 11월에 본인이 직접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백산서원을 방문하여 직접 찍은 영정 사진이다


 문효공 경재하연(河演)선조님 영정


 정경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일본 천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영정

아래의 영정은 일본 천리대학에서 소장 하고 있는 영정 화첩이다 아래의 영정사진은 오랜전에 우리 일가 한분께서 일본 천리대에 부탁하여 사진을 찍어왔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영정중에 최고로 잘그린 영정으로 보인다  이 영정은 언제 어디서 누가 그렸는지 알수는 없지만  1972년 4월 10일 자 경향신문에 나온 기사를 보면  일본에 귀화한 趙重九라는 사람이 1957년경 헐값에 일본 천리대학교에 팔았다고 전한다
두분의 영정 화첩 사진은 가로45센치 세로 30센치로 된  화첩으로 총 4권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의 역대 명현으로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분들을 포함 해서 1권속에는 임경업장군을 포함하여 290여점이 실려 있으며  문효공 선조님의 영정은 3권속에 실려 있다고 한다  이 두분의 영정화첩은 안평대군의 몽유도 원도와 함께 하루빨리 찾아와야 할 우리집안의 보물 영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문효공 경재하연(河演)선조님 영정


 정경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우록 문효영당(文孝影堂)타진당(妥眞堂)

문효영당은 조선 숙종 34년(1708)에 문효공(文孝公) 경재(敬齋) 하연선생과 정경부인 성주이씨의 부부 영정을 합천타진당에서 묘사하여 봉안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을유년 순조25년 (1825년) 겨울에 영정이 먼지와 끄럼이 앉고 한서(寒暑)를 오래 겪어 아교풀이 날려 명주 바탕에 털이 일어나게 되어 마치 사람들이 늙을때 날마다 다른 줄은 모르나 해마다 쇠약해 지는 것과 같은지라 다시 국수에게 신중하게 묘사하여 봉안한 진양 하씨(晉陽河氏) 집안의 사당으로 일명 '타진당'이라 한다.

하연선생의 영정은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 좌상으로 가로 79cm, 세로 134cm의 설채견본이며, 정경부인 성주 이씨의 영정은 대례복 차림을 한 전신교의좌상 으로 가로 79cm, 세로 146cm의 설채견본이다. 지금의 영당은 1943년에 중건하고 1978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2간, 측면 1간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2개의 쌍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1989년에 솟을 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순조  25년 을유(1825년)겨울에 우륵 영당의 진상을 다시 모사 하다.

아래의 영정은 순조  25년 을유(1825년)겨울에 후손 권(權)과 인혁, 종황이 우륵 영당의 진상을 다시 모사 하여 우록타진당에 모셔져 있는 영정으로 정경부인 성주이씨 할머님 영정이다 원래는 문효공선조님 영정과 함께 봉안되어 오다가 문효공선조님 영정은 도난를 당하여 다시 그려 봉안했지만 너무 조잡하게 그려 할머님 영정만 올린다
이 영정도 문효공선조님 연보에 의하면 합천 타진당에서 모사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정경부인 영정사진은  2005년 양력 11월8일 우록 참판공 묘사때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이다

우록서원에서 다시 모사한 기록

큰 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그 지위도 얻고 그 수명도 얻으며 종묘에서 제사하고 자손도 보전한다 하였다. 덕은 성현의 차가 있고, 지위는 등급이 있으므로, 수(壽)를 하고 제사를 흠향(歆饗)하여 그 자손을 보호하는 것은 각 각 그 유(類)에 따라 되는 것이다. 대개 도학(道學)은 백세의 원천이요, 공업은 일 국(一國)의 산두(山斗)이라, 늙은이들이 말로 전하고 종묘(宗廟)에 배향하여서 고종이 제사를 맡아 하고 후손들이 그 자취를 이었으므로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있게 하고, 체천(遞遷)이 되어도 체천하지 않고, 살아 계실 때 와 같이 하여 의식을 꾸며두고 대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은 오직 영정(影幀)일 뿐이다

옛 역사를 참고해 보건대 우리 국초에 문효공(文孝公)경재(敬齎) 하(河)선생이 있었는데 정포은(鄭圃隱)선생을 스승 으로 섬겨 당세에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 영릉(英陵)좋은 시대에 와서는 비로서 현달(顯達)하였다. 우리 선조 충간공(忠簡公)과 도의(道義)로써 사귀어 일시에 재상으로 나라에 명신이 되었다. 단종(端宗)대왕 계유(一四五三년)에 사부의 옛 은의로 문종(文宗)대왕 묘정에 배향하고 문효공(文孝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영남 선비들은 선생의 본관인 진주(晉州)에 유적이 많으므로 종천서원(宗川書院)을 창설하여 향사를 받들고, 그 후손들은 합천(陜川)에서 유풍을 사모하여 신천서원(新川書院)을 세웠다. 숙종(肅宗)대왕이 즉위하여 소래산 묘소에 제사하고, 영조대왕도 제사 하였으며,정조대왕 정사(丁巳)년에는 특히 임금의 글씨로써 제문을 지었는데「세종 세대에 정승이 뉘었는가? 오직 황희(黃喜)와 허조(許稠)가 구공(九功)을 노래하였다.경(卿)은 그뒤를 이어 소하(蘇何)와 조참(曹參)처럼 하였다. 재상은 문 앞이 바다 같은데 두루미에는 단술이 있었다 세상은 태평하고 백성은 강녕(康寧)함을 칭송하였다. 녹야(錄野)에 이르러 큰 늙은이로 건강하셨다. 성주가 일어남에 군신들이 따라 난다.흔적이 없으면서 그 직책 각각 한다. 이런 사람을 어디서 얻어 오리 오랜 감상이 깊도다 술이 향기 나고 안주 좋으니 여기와 흠향하오」하였으니 정조대왕의 마음속에 감상된 바가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셋 째 아드님 연당공(蓮塘公)이 종신토록 사모하기 위하여 손수 선생의 초상을 그리고 또 정경부인(貞敬夫人)이씨(李氏)의 초상을 그리고 영당을 소래산 밑에 지어 모셧으니 임진 난리에 왜적이 들어와 뛰어난 그림을 탐내어 도적질하여 가다가 짐이 무거워져서 더 갈 수 없었다. 바위 돌 사이에 두고 갔는데 후손에게 현몽하여 찾아 왔다. 아무런 탈이 없는지라 얼마 안되어 합천(陜川)으로 옮겨서 봉안하였으니 이것이 타진당(妥眞堂)이 된 것이다.
대개 명신으로 임금의 묘정에 배향한 이들은 임금의 문실(文室)을 따라 하기에 선생의 사당도 집에서 체천이 된 것이다. 숙종(肅宗)대왕 무자년에 초상을 받들어 호서(湖西) 문의현(文義縣)에  옮겨가니 곧 주손인 군수 희도의 집이다. 그 곳에서 제사 받들 장소를 마련하여 지명을 따서 우록영당이라 하였다.

순조 신사(1821년)에 400백년 되어 먼지와 끄름이 앉고 한서(寒暑)를 오래 겪어 아교풀이 날려 명주 바탕에 털이 일어나게 되어 마치 사람들이 늙을 때 날마다 다른 줄은 모르나 해마다 쇠약해 지는 것과 같은지라 영성한 후손들이 재산이 빈약하여 힘을 다했으나 사체가 지중하여 다시 그리기가 어렵고 족속이 소원하고 대 수가 멀어져서 한 마음이 되지 않았다.
십 사대손 인혁(寅爀)이 정성으로 중책을 짊어지고 명사 대부에게 돌아다니면서 요청하니 모두들 그 선조를 위해 일하는 것에 감복하고 선생을 위해 일하는 것에 감복하고 선생을 위해 영광됨을 기쁘게 여겨 국수로 하여금 신중하게 그리게 하는 동시 원근의 자손들이 계속 연락하여 수 백년이나 지난 초상을 묘사하여 꼭 한 솜씨에 나온 것 같았다.

문 앞이 바다 같고 단술을 마신다는 것을 방불하게 상상하고 띠를 두르고 홀(忽)을 잡은 모습이 참으로 노성(老成)이다. 나 승원(升源)이 선조와의 도의 정분을 추모하여 절하고 뵈오며 그 시대를 논해 보건대 대개 선생의 덕은 구이(九二)보는 데 있고 등용됨은 구오를 얻은 것이다. 궁기는 경천 위지의 포부가 있고, 세류(世類)는 당구하는 어진 이가 많다  풍채가 사람을 움직이니 자연히 모범이 되어 여론에 들릴 것이다.연당공은 부모를 깊이 공경하여 종신토록 사모함 이 초상에 있었으니 저존(著存)하는 회포를 청고(淸高)에 붙였다. 또 부인이 왼편에 있어서 실까의 낙(樂)이 길이 오는 세상까지 가리라. 정기가 붙여 잇는 바에 귀신이 서로 도우니 무게가 태산같아서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더욱 공경하여야 되니 어찌 감히 싫어하리요.그러나 새로 묘사하지 않으면 종말에는 다 헐어지게 된다.

인혁(寅爀) 어른이 정성으로 책임을 지고 하루라도 고치지 않아서 증거가 없게 되면 이것은 선조를 잊어 버리는 것이요, 털끝 만치라도 틀리게 되어 신용할 수 없으면 이것은선조를 더럽히는 것이라. 선조를 잊는 것도 죄가 되고 선조를 더럽혀도 죄가 된다 하여 날을 쌓고 해를 거듭하여 십분 완전하게 묘사하니 아! 자손이 보수(保守)함이 아무래나 될 것이가? 먼 조상을 사모하는 효성이 이래야만 큰 것이다. 뒷사람은 변함없이 길이 하면 갱장(羹墻)의 사모가 명 선조(名先祖)에 있을 것이요, 그 척연히 생각하는 바가 있고 개연히 들리는 바가 있게 됨도 또한 붉고 푸른 초상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숭정 기원 사주(四周) 순조 을유(1825년) 후학 의령 남승원(南升源) 삼가 쓰다.

서원 및 영당 낙성 기록

헌종순황제 성화 3년 정해(1467년)세조 13년. 2월에 영당을 건축하다.
막내아들 우명이 천성이 효도하고 또 그림을 잘 그리어 일찍이 선생 및 정경부인 초상을 그려 두었다. 정경부인이 돌아감에 선생 묘소 왼편에 장사지내고 여묘살이 하여 이 해에 삼년상을 끝마치고 선생의 영당을 묘소 옆에 지어 정경부인 초상을 함께 모시고 위토를 두어 춘추로 제사드릴 자료를 삼았다. 이 일이 삼강행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홍치 을묘에 추후해서 우명의 초상을 모셨다.

신종현황제 만력 36년 무신(1608년)선조대왕 41년. 가을에 영당을 합천 야로 현에 옮기다.
이에 앞서 막내아들 우명이 인천에 살면서 영당을 수호하였으며, 그 후에 후손 세마 혼(渾), 주부 응보가 초상을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합천으로 옮겨 모셨다. 임진년에 인천에 있는 영당이 왜란을 만나 선생 초상을 잃었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후손인 세마 혼이 종질 되는 응보, 경위 등을 데리고 영당에 와 뵈었다. 꿈에 선생이 말씀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소래산 북쪽 바윗돌 사이에서 곤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찾아가 과연 초상을 찾았다. 그 이유는 왜적이 가져가려다가 등이 점점 무거워져 산을 넘어 갈 수가 없게 되자 되려 이곳에 두고 그 바윗돌에 쓰기를 이는 천하에 명재상의 초상이라 하였다.

신종현황제 43년 을묘(1615년)충효문을 합천에 옮기다.
야로 영당 앞. 10월에 영당을 사액하여 타진이라 하다. 그 때 소래산 정려문이 세월이 오래 되어 퇴폐 해졌다. 일시에 경사(卿士)들이 의논하기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영당 소재지에 옮기는 것이 옳다하여 이 달 14일에 전성군 이준, 지사 이시언, 응천군 박진원, 여성군 이지완, 동중추 송영구, 전 좌랑 하응관, 전 찰방 하혼, 사직령 박채, 봉사 하렴, 판관 하언정, 전 주부 하응보, 전 주부 하종해, 전 참봉 하대의, 사과 하진, 첨지 정진철, 전 현감 유세온, 장사랑 하응호, 전 헌남 조정립, 유학 하경신, 종사랑 하경함, 하립 등이 정려문을 옮길 뜻으로 예조에 글을 올려 임금에게 아뢰니 허가가 내렸다. 이준 등이 잇달아 영당에 사액 하기를 예조에 신청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허락하시고 특지로 사액하여 타진이라 하였다.

희종철황제 천계 4년 갑자(1624년)인조대왕2년. 3월에 합천 신천서원을 낙성하다.
이 해에 합천 선비들이 합의하여 사당을 세워 선생의 막내아들 연당공 우명을 배향하였다.

의종황제 숭정 13년 경진(1640년)인조 18년. 임금께서 관원을 보내어 사제하다.
상신 김류의 아뢴 바에 의해 한 것이다. 이 해에 영남 관찰사 구봉서가 외 후손이 되므로 수찰하는 길로 합천에 와 타진당 초상을 뵙고 초본이 떨어진 것을 안타까이 여겨 봉급을 떨어 다시 화상을 모사 하여 글을 지어 찬하기를 「삼한의 참된 기운이요, 한 시대의 으뜸가는 신하이다. 경륜은 당시에 이룩하였고 공덕은 뒷사람이게 비쳤다」하였다.

숙종대왕 34년 무자(1708년)봄에 문의에 우륵서원을 낙성하다.
이에 앞서 선생의 종손 증 승지 태수가 서울로부터 문의(文義)에 옮겨왔다. 후손 필청(必淸)이 선생 영당을 건축하고, 합천에 모신 초상을 본떠서 선비들과 의논하여 제사 드리는 곳으로 하였다. 이 해에 임금이 관원을 보내어 묘소에 사제 하다.

숙종대왕 44년 무술(1718년)2월에 진주 종천서원에 봉안하다.
서원은 즉 선생의 동생 대간공 결의 후손 겸재 홍도, 태계 진을 함께 향사를 받드는 곳으로 이 때에 사림들이 선생의 본 고향에 봉안하는 곳이 있어야 된다 해서 서원 윗자리에 봉안한 것이다.

영조대왕 2년 병오(1726년)봄에 안악 숙청당을 낙성하다.
안악(安岳)은 즉 선생이 사랑을 남긴 곳이다. 선비와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초상을 봉안하였다.

정조대왕 10년 병오(1786년)겨울에  장연 반곡서원을 낙성하다.
해서(海西)는 곧 선생의 명성이 남아 있는 곳으로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이기에 숙청당을 옮겨 서원을 세웠다.

정조대왕 21년 정사(1797년)8월에 임금께서 관원을 보내 묘소에 사제 하다.
임금께서 친필로 제문을 지어 승지 송전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순조 19년 기묘(1819년)봄에 타진당을 옮겨 세우다.
타진당이 본래 서원 서쪽에 있었는데 지초가 무너졌으므로 사림(士林)들이 합의하여 서원 동편에 옮겨 세웠다. 그 공사에 군수 서봉보가 힘을 도왔다. 타진당에 제물 품목을 만력 을묘년 부터 관에서 제공하는 정식이 있었는데 뒤에 점차로 줄어졌다. 이 해 가을에 예판 김로경이 본 도에 통첩하여 예전 의식대로 복구하라고 지시하여 그 뒤 네 해가 되던 계미년에 군수 이로준이 의식을 복구하였다.

순조  21년 신사(1821년)봄에 무주 백산서원을 낙성하다.
호남지방은 선생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자취를 남긴 곳이다. 후손 한범, 한영, 지광, 경조가 사림과 합의하여 서원을 세워 봉향하였다.

순조  25년 을유(1825년)겨울에 우륵 영당의 진상을 다시 모사 하다.
선생과 정경부인 영상을 모사한지가 거의 백여 년이 되어 티끌과 끄름이 쌓이고 종이가 부풀어 허물어지니 자손 된 마음으로 어찌 유감이 아니겠는가? 후손 권(權)과 인혁, 종황이 정성을 다하여 모사하고, 후학 의령 남승원이 삼가 글을 지었는데 글은 문집에 실려있다.

순조 26년 병술(1826년)여름에 경재문집이 간행 되었다.
선생의 시문(時文)이 병화에 잃어 버린 것이 많은데 오대손 혼(渾)이 수집해서 진양연고에 편입해서 간행하였더니 이 때에 후손 인혁, 달해, 달명 등이 편집해서 원집 세권, 부록 두 권으로 만들어 간행하였다. 혼(渾)이 편찬한 연고의 발문에 대략 말하기를 진산군 통정 강회백이 송헌과 고헌의 시(時) 오륙 절구를 외워서 전하는 것을 우리 경재께서 들으시고 기록하셨고, 나의 선고께서 또 목옹과 경재의 시 약간 편을 얻어서 연당유록과 함께 정서했으나 홀로 한스럽게도 얻은 것이 많지 못했는데 지난 무자년에 재종제 호가 호남 지방에서 놀 때에 경재 선생의 시 백여 수를 얻어 붙여 보내고 간행하기를 청하니 내가 받아 간직하다가 병오년에 다 모아서 한권으로 만들어 「진양연고」라 이름하였는데 이제 이르러 후손 달해, 달명 등이 다시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헌종 대왕 8년 임인(1842년)여름 4월에 우록 영당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선생의 후손 인환, 기홍, 청주 한기가 오읍(五邑)의 선비들과 상의하여 서원으로 승격하였는데 본 도 관찰사 강시영은 곧 선생의 증조 원정공의 외손인 진산 부원군 공목공의 후손이다. 본읍에 통지하여 현령 이관재가 친히 향사의 제물을 받들 게 하고 또 충훈부와 성균관의 결의에 따라 원생 17명과 보수 하는 노비 20명을 본 원에 하사하여 춘추향례를 행하게 하니 오읍(五邑)은 곧 문의, 청주, 공주, 연기, 회덕이다.

철종대왕 8년 정사(1857년)가을에 우록서원에서 문집을 다시 간행하다.
우록은 곧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고, 또 병진(1376년)은 선생이 출생하신 해인데 후손 인환, 재구, 기홍, 한기, 재준과 방손 만기 등이 본원에 출판소를 설치한 것과 선생의 출생년을 만남도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종인 귀홍이 기성에서 놀 때에 선생의 31운을 얻어서 함께 추록하고 남(南)판서 병철이 지은 안악구대 비문과 김찬서 수근과 이판서 명적이 지은 남원 산동비각 서문을 함께 책 끝에 붙인다.

문효공선조님 연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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