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의 휘 는 유종(有宗)이요 字는 호보 (浩甫)이시다. 조부님은 晉川府院君 원정공 하집 (元正公 河楫)선생이시고 선고는 晉山府院君 苦軒公 윤원(允源)선생이다 공은 三男一女 중 長孫으로 고려 충혜왕 때에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여사촌 고택(古宅)에서 탄생하셨다. 장성하시어 벼슬하여 二品에 오르시였고 이조 초에 경산부사(京山府使)를 역임하셨으며 뒤에 가정대부 (嘉靖大夫) 鳳山君에 봉해지셨다. 배위(配)는 정부인 이씨(父.密直司守)이며 아들은 윤(潤)이요 호는 乙檀 이다 司憲府 持平에 올랐다 손자이신 우한(佑漢)은 평안도 (平安道)安州牧使로 부임하여 그 후손(後孫)들이 평안도 강서군 함종지방(咸從地方)에서 世居하여 왔으며 公의 묘소는 京畿道 南楊州市 榛接面 진평산(榛枰山)이라고 기록(記錄) 되어 있으나 現在는 실묘(失墓)이다. 선생은 경산부사 벼슬을 일찍히 그만두시고 진주 집으로 돌아오셔서 현 경류재 자리에 1384년에 개경원(開慶院)을 건립하여 오고가는 여행자와 관원들의 숙박의 편리를 봐주시고 이집은 진주목사 박자안(晉州牧使 朴子安)이 건립했다고 공을 돌리시니 효우군자(孝友君子)라고 평판이 자자했다
개경원 기문(開慶院)) 개경원 기문(開慶院)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진주(晉州)의 진산 (鎭山)이 지리산에서 떨어저 나왔는데 동남의 산골짝 물이 모여 강이 되어 남쪽으로 가로질려 흐르고 있다. 물 줄기 왼쪽으로 감싼 복판에 나즈막한 긴 언덕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있어 강 에서 백보 못되는 곳에 郡誌에 적힌 옥봉(玉峰)이 그 곳이다. 옥봉에는 官에서 관섭하는 일이 없이 손님이 숙박을 할 수 있는 집을 세워 開慶院이라 이름하니 축원하는 뜻으로 이름 지은 것이다. 고려 말에 왜구(倭寇)가 진주를 침범하여 民家가 쑥밭이 되고 개경원도 그렇게 되였다. 京山府使 河有宗 公은 고을에서 이름난 효우군자(孝友君子)이신데 일찌기 옛 집 옆에 院을 세워 오며 가며 登望하여 思亭의 遺意를 본 받고 나그네가 편이 쉬어 가도록 여행자 들에게 厚意를 베풀었다. 지금의 장자원(長子院)이 그 것이다. 河公이 장자원을 개수(改修) 하고자 재목과 기와를 마련하여 공사를 시작하려던 때에 마침 진주목사 박자안(牧使 朴子安)이 부임하여 찾아와서 河有宗 公에게 청하기를 開慶院이 우리 고을에 가장 긴요한 교통의 요충지대고 王使가 왕래할 때 반듯이 經由하는 곳이며 守令이 영접할 때 쉬는 곳입니다. 그리고 여행하는 길손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곳이니 먼저 손을 써서 인력을 펴게 하여 달라 하므로 河公이 옳다 여겨 승낙하여 재목과 기와를 날라 옛 모습대로 지어 한달만에 마치시니 고려 우왕 갑자년 1384년이었다.그후 5년뒤 1389년에 河公은 다시 재력을 가추어 장자원을 다시 改修하였다.河有宗公은 그 功을 당신 功으로 삼지 않고 목사(牧使)에게 돌리니 역시 착한 일을 남에게 돌리는 美德의 人格者였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진양인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정공 교은 정이오(晉陽人郊隱 鄭以吾) 공이 개경원 기문을 썼다
景德祠 鳳山君 奉安文 某 敢召告于 先祖考嘉靖大夫鳳山君府君 伏以 恭惟府君松苦嫡傳濡染庭訓 文德兼全 盡忠輔國 名門赫然 開慶舊基 至今傳焉 孝友遺範 可祀千年 子孫遠居 妥靈遲延 涓玆吉日 奉祠堂 父祖一室 兄弟同床 敢告厥由 薦次淸觴 伏惟 尊靈庶賜歆嘗 역문(譯文) 가정교훈 익히시어 문장덕행 겸하셨네 충성으로 나라 도아 명망이 빛나셨다. 효우(孝友)의 끼친모범 수 천년 향사하리 자손이 멀이 살아 신주 봉안 지연했네 좋은날 선택하여 사당에 봉안하니 父와 祖가一室이요 兄과 弟가 동상(同床)이라 연유를 고 하면서 이 잔을 드리오니 바라건대 존영(尊靈)께선 흠상 하심 주옵소서 모일간지후손유학모모 감소고우 삼봉(정도전)집 제1권 매천부(梅川賦) 매천(梅川)은 진주(晉州)의 마을 이름인데 하유종(河有宗)이 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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