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현령공(縣令公)하신(河紳)14세손 세종 18년(1432)에 생원(生員)이 되고 다음 해에 문과에 오르시어 여러 직책을 역임하셨는데 이때에 조선 남쪽바다의 연안 도서지방에 왜구가 수시로 침입하는 등 민심이 흉흉하던 터에 남해현(南海縣)을 새로 설치함에 따라 비록 남해가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이지만 새로 설치 되는 남해현의 중요도에 비추어 현령에 취임할 인물은 뛰어난 재능과 풀륭한 덕망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백성들의 믿음을 살 수 없을 것이랑 판단 아래 사람을 물색한 나머지 여러 사람의 추천에 의하여 선생이 현령으로 발탁되었으니 이때가 선생의 연세 24세 때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중임 (重任)이었지 좌천(左遷)이 아니었다.선생은 현령으로 부임하자마자 제일 먼제 학교를 세워서 예법을 숭상하게 하고 관청을 지어서 왕정(王政)의 기강을 세워 나갔다. 선생은 조정의 행정력이 변방까지 잘 미치지 못하였던 당시 심혈을 기울여 민심을 수습하고 어진 정사를 훌륭히 완수하여 남해현 초대 현령으로서 책무를 완수하고 퇴임함으로써 오늘날 남해군(南海郡)의 탄탄한 가반의 초석이 되었다고 볼진대 그후예들은 자랑스런 입남조(入南祖)를 모신 것을 자부할 만하다. 선생은 1414년에 나시고 1458년에 돌아가시니 남해 서쪽 장생촌(長牲村) 묘좌에 묻히시었다. 부인 숙인이씨도 같은 해에 돌아가시니 선생과 합봉(合封)되시었다. 선생의 세 아들 중 첫째 휘 자파(自破)는 서윤(庶尹)이요, 둘째 휘 자애(自埃)는 진사(進士)이고, 셋째 휘 자감(自坎)은 무과에 올라 고성현령(固城縣令)을 지내셨다.한편 선생의 손자에는 호조좌랑(戶曺佐郞)을 지낸 맹인(孟仁), 그리고 맹량(孟良)과 맹의(孟義)는 통덕랑(通德郞)이요, 숙정(淑禎)은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증직되시고 끝으로 휘 유정(有禎)이 계셨다. 비록 선생의 후예들이 지방에 계셨지만 사대부 집안의 전통을 성실히 지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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