侍直公 하주(河澍)14세손

譯文

아 이는 예 세자시직(世子侍直)진양 하공의 무덤이라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주(澍)요 자는 윤재(潤哉)요 고려 사직공 휘 진(珍)의 자손이다 뒤에 호 송헌(松軒)휘 즙(楫)이 계시어 큰 훈덕으로 고려사에 드러났다. 호 고헌(苦軒) 휘 윤원(允源)은 진산부원군에 봉해졌고 휘 계종(啓宗)은 문경 군사를 지냈으며 창녕현감 휘 척(滌)은 처음으로 조선조에 벼슬하였다. 이 분들은 공의 五代 이하의 조상님들이다, 청백리 합천군수 휘 맹질(孟질)이 한산 이씨 양도공(良度公)숙묘(淑묘)의 따님과 혼인하여 1426년에 공을 낳으셨다,공은 천품이 순수하고 어릴 때부터 의표(義表)가 근엄하였는데 아버님을 따라서 강양(江陽)관아(官衙)에 갔을 때 마음이 담박하여 풍류하는 자리에 물들지 않고 따로 깨끗한 방에 거처하면서 공부에 전념하고 고을의 빼어난 선비들과 교유하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모여 학문을 강론하셨다, 세종조에 세자시직(世子侍直)에 임명되었는데 명리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부모님 늙으심을 이유로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오셨다.


임금께서 특히 노비(奴婢)를 주시고 호역(戶役)을 면하게 하시어 부모님을 봉양하기에 편하게 하여주셨으니 이는 특별한 대접이었다 1467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예법을 다하여 상제를 마치어서 백성에게 본받게 하셨다. 이상이 공의 행적의 대략이다. 1489년 6월 7일에 돌아가시어 평옥천 사자산(坪玉泉獅子山) 유좌(酉坐)에 묻히셨고 마나님 단인(端人) 장수 황씨(長水黃氏)는 1531년 7월5일에 돌아가셨는데 묘는 쌍봉이요 숙인 진양 유씨(晉陽柳氏)는 좌찬성으로 증직되신 자해(子諧)의 따님인 한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이질녀(姨姪女)인데 대궐에서 옥비녀를 내려 주었기로 안방의 세보(世寶)가 되었다. 묘는 같은 등날(獅子山)에 모시어졌다,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큰아드님 휘 구수(龜壽)는 현감이었고 둘째아드님 휘 구년(龜年)은 전력부위(展力副위)였다. 셋째 아드님 휘는 구령(龜齡)이다 휘 구수의 세아드님 중 휘 부(溥)는 진사였고 휘 관(灌)은 별제(別提)였고 휘 홍(泓)은 판관(判官)이었다. 휘 구년의 세 아드님 중 휘 박(珀)은 참봉이었고 휘 정(珽)은 부사(府使)였고 휘 구(球)는 내금위(內禁衛)였다 두 따님 중 한분은 시직(侍直) 노섭(盧섭)에게 한분은 강정숙(姜正叔)에게 출가하였다. 휘 구령의 두 아드님은 휘 호(護) 형(泂) 증손.현손(曾玄孫)들은 기록하지 않는다,


대개 진양하씨가 고려 말 이래로 더욱 빛나게 드러나 명문 집안이 되었는데 공께서 선대의 빛을 품어안고 일찍부터 청관(淸官)에 뽑히어 앞길이 훤히 열리었고 왕실의 인척이 되어 은총이 치우치게 두터웠으되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았고 부모님 늙으신 까닭으로 결연히 물러나서 부모님 봉양을 기쁘게 하여 드리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애통함을 다하셨으니 법도 있는 행실의 높음이 아니면 어찌 이에 미치리요 400년이 지난 이제 끼치신 풍범(風範)은 오래 되고 귀두(龜頭)가 떨어져 내려 글자를 알아볼 수 없으므로 후손 사병(師秉) 태홍(泰洪) 인병(麟秉)이 더 오래 되면 더욱 그 전(傳)해짐이 잃어질까 두려워 하여 고쳐 세우기를 꾀하여 문중 젊은이 대룡(大龍)을 시켜 유사(遺事)를 받들고와서 나에게 비문 짓기를 요구하기에 그 대략을 쓰고 이에 명(銘)한다.


송헌(松軒)선생 옛 집안에서 세자시직(世子侍直)나시었네

왕실 인척의 빛남으로 별난 은총 무릅써서

붕새처럼 날다가 벼슬 그만두시고

부모 봉양 뜻을 펴서 충(忠)을 효(孝)로 옮기시니

백행(百行) 근본 닦으심이라 양가(楊家)의 청백(淸白)함이요

초잡(苕잡)의 동청(潼靑)이라 번창하게 보답하니 시례(詩禮) 모범 끼치셨네,

사자산(獅子山)황폐하여 글자도 알 수 없게

세월이 비(碑)를 깎아 자손들이 걱정하여 돌 다듬어 다시 새기니

군지(郡誌) 가승(家乘) 의거함이라 아름다운 계산(溪山)에 놀과 구름어려 있네

높은 덕망 서린 이 곳 백세에 전해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