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길도관찰사공 하자청(河自淸)15세손


내가 일찍이 진양 하군 유즙(有楫)을 위하여 그의 선세(先世)의 묘갈명을 지은 것이 자못 많은 까닭으로 그 가계(家系)의 행적을 넉넉히 알 수 있다. 지금 하군이 다시 그의 선조 함길도관찰사 휘 자청(自淸)의 묘앞에 비석을 세우려 하여 종인(宗人) 문선(文善)으로 하여금 나에게 글을 청하면서,「우리 선조가 처음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다가 관찰사에 이르셨으나 생졸(生卒)날짜와 벼슬에 계셨을 때와 집에 계셨을 때의 사적이 모두 표몰(漂沒)하여 전해짐이 없고 다만 정읍으로부터 진주로 돌아오셨다는 것이 진주지(晉州誌)와 정읍지(井邑誌)에 나타나 있을 뿐이요.

묘가 진주 서쪽 종화리(宗化里)백암 유좌에 있는데 옛날에 비가 있었다가 임진난 때 없어진 바 되었으니 공은 그 일을 깊이 생각하고 재량하여 주시기 바라오」하였으므로 내가 듣고 비탄한 지 오래였다.  
공의 시조는 고려 사직 휘 진(珍)이다 후에 진천부원군 원정공 송헌 휘 즙(楫)과 진산 부원군 고헌 휘 윤원(允源)과 병조판서 목옹 휘 자종(自宗)이 계셨고 조선조에 들어와 사간원 대사간 휘 결(潔)이 계시어 모두 벼슬과 행의(行義)로 당시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공은 대사간 휘 결(潔)의 증손이다. 조부님 휘는 금(襟)인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공조참의가 되었으며 황고의 휘는 여(礪)인데 첨지중추부사를 지내셨다. 선비는 숙부인 경주 김씨인데 사헌부 대사헌 광수(光粹)의 따님이다

배위는 숙부인인데 성씨 및 생졸 날짜도 모르며 묘도 전해지지 않는다. 아드님 휘 효문(效文)은 경산(慶山)현령인데 처음으로 운곡(雲谷)에서 안계(安溪)로 이거(移居)하였다. 이 분이 아들 5형제르 두셨는데  휘 보용(保溶)은 사헌부감찰이요 휘 보완(保浣)은 성균관 진사요 휘 보순(保淳)과 휘 보윤(保潤)은 생원이요 막내 아드님은 휘 보인(保寅)이다  두 사위는 허송죽(許松竹)과 생원 정수(鄭壽)이다 보용의 아드님은 철부(哲夫)인데 참봉이요 보완의 아드님은 수원(水原)영원(永源)이요 두 사위는 정세공(鄭世恭)과 강위(姜渭)이다 보순의 아드님은 기붕(起鵬)이다 보윤의 아드님 경원(景員)은 진사요 그 아래로는 휘 경주(景周)경심(景深) 경회(景懷) 경릉(景陵)이요 두 사위는 이장손(李長孫) 이권(李權)이다  보인의 아드님은 여정(汝艇)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행적이 표몰하여 고징할 수 없음이 이와 같으나 후손들이 번성하여 6대 7대에 의흥현감 홍도(弘度)와 증대사헌 철(澈)이 계시어 모두 선비의 명망을 지니어서 세상 사람들이 진주 하씨를 헤아릴 때 문득 안계를 먼저 꼽게 되었으니 어찌 이를 바가 아니겠는가? 이에 명(銘)한다0

공의 벼슬 낮지 않아 반드시 아름다운 자취 있었으련만

역사와 집안 기록 없어져 가려내기 어렵네

하씨는 대성(大姓)인데 안계(安溪)가 가장 번성했으니

그 선대를 거슬러 볼 때 어찌 공경하는 마음 일어나지 않으리요?

백암의 산록에 소나무 지초 싱싱한데 내가 이 돌에

명(銘)을 새김은 천 년 뒤에 까지 고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