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공(進士公) 하탄(河灘) 15세손

공의 휘는 탄(灘)이요 자는 계호(季浩)요 호는 연정(蓮亭)이니 삼한(三韓)이래의 벼슬 집안 진양 하씨 이다 아버님 휘 맹서(孟서)는 강령 현감(康翎縣監)이셨고 할아버님 휘 효명(孝明)은 이조참판이셨고 증조부님 휘 연(演)은 문효공 경재(敬齋)선생이시다.1465년 7월2일에 인천 소래산 밑 암형동(巖形洞)에서 출생하셨다, 선고 현감공께서 1456년의 사육신(死六臣)의 참화를 보고 돈의문(敦義門) 밖을 떠나 이곳을 찾아 사시게 된 것은 선영에 가깝기 때문이다. 공께서 태어난 지 三년밖에 되지 않아 아버님 현감공이 돌아가시니 어머님 이씨가 남달리 기르되 가르침을 맹모(孟母)같이 하셨고 형님 참봉공(參奉公)휘 심(심)이 공의 천생 효행과 뛰어난 문재(文才)를 보고 일찍부터 공부를 시키어도학에 밝게 하셨다,

공께서 성장하매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등 제현과 함께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하에서 수업(受業)하여 경학(經學)의 밝음과 사례(士禮)의 엄정함이 저 주돈의(周敦의) 및 정자(程자,程의)의 풍도화 방불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댁에 돌아가 어머님을 모실때 대대로 닦은 문장을 익히고 그 학행(學行)을 이어받으니 그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이룩하심이 지극하였다. 뵙는 자 얼굴을 바르게 하고 무릎을 굽히어 정중하게 공경하여 마지 않으니 이름이 원근에 퍼져 배우러 오는 자 문전에 가득하였고. 사람들이 증자(曾子)문하의 제자들에 비기었다. 어머님 이씨(李氏)가 공의 재행(才行)을 아끼어 일찍이 사마시(司馬試)를 볼 것을 권하신 일이 있었다 1484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시니 여묘(廬墓)살이를 하되 三년동안 한 발짝도 떠나지 않으시매 지나가는 초동과 목동들이 공의 효성에 탄복하였다. 1496년에 공께서 선비(先비)의 유언을 추모하여 처음으로 명경과(明經科)에 응시하여 진사(進士)가 되어 태학(太學)에 뽑혀 들어가셨는데 육경(六經)을 밝혀 해석함이 제생(諸生)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었다.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을 보자 명리(名利)를 사양하고 미련 없이 소래산 밑으로 들어가시어 끝내 나가지 않았으며 연못을 파 연(蓮)을 심고 작은 집을 지어 연정(蓮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1498년에 무오사화(武午史禍)가 일어나 당시의 명현(名賢)들이 거의 다 처형되거나 귀양가거나 하였던 차에 공이 또한 점필재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붙들려 갇히었는데 옥살이 四년 동안에 자주 심한 국문(鞠問)을 당하였고 1501년에 영천(永川)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형벌로 인해 창종(瘡腫)을 앓으셨던 터에 의금부(義禁府) 호성관이 거느리고 남하하여 화산현(化山縣)에 이르렀는데 병환이 더해저 더는 갈 수가 없었는지라 곧 역리(驛吏)였던 제인복(諸仁福)의 집에서 멈추고 이 뜻을 임금에게 알리니 그 때에 화산현이 이미 바뀌어 영천에 속하게 되었으므로 임금이 이르시되「화산도 또한 영천 땅이라」하였으므로 그 곳을 배소(配所)로 정하였다. 이를 보는 자 차탄(嗟歎)해 마지 않아 말하기를「저 분이 이름난 하 정승의 어진 자손이라」하였다

이듬해 1502년 6월13일에 남지리(南旨里) 배소(配所)에서 돌아가시니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거니와 지금도 지나는 자 그 곳을 가리켜 연정마을(蓮亭閭)이라한다. 그러한데 공의 영명(榮名)만이 유독 사우록(師友錄)에 실리지 않으니 이는 진(晉)문공이 개자추(介子推)를 상(賞)주지 않았음과 같은 일이다   이름난 스승의 문하에 소문을 듣고 배우러 온자 원근(遠近)의 차이와 청탁(淸濁)의 구별 없이 모여들어 있었고 선후(先後)가 부동(不同)하여 묵은 사람을 보내고 새 사람을 맞으니 제자들이 문전에 이어 졌었으므로 한훤(寒暄)이 동문(同門)의 이름을 기록할 때 오직 공의 고행(高行)과 청표(淸標)를 깨닫지 못하였고 또 탁영(濯纓)이 가리켜 주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당시에 같이 화를 입은 자 모두 이름을 남겼으되 오직 공의 명성과 행적만이 잃어졌도다.

공께선 오랜 명문 집안의 충효를 이어 도학(道學)을 외치어 밝히고 의리를 천명하였으니 이는 실로 학행군자의 세상 다스리는 사업이었다. 만일 하늘이 공에게 목숨을 몇 년 만 더 주셨더라면 공께선 반드시 꽃다운 이름을 백세에 전하는 명사(名士)가 되셨을 것이언만 아깝도다! 평소의 행적이 일찍부터 세상에 전해지지않은 채 마침내 사화(史禍)에 돌아가시어 남기신 사업을 알아볼 바가 없으니 후세의 그 누가 공의 어짊이 이에 이른 줄을 알리오?

마나님 월성 최씨(月城崔氏)는 사헌부 정령(掌令) 형한(亨漢)의 따님인데 공께서 화를 입으신 해에 원한을 품어 식음을 전폐하고 돌아가시니 인천 남쪽 산에 묻히셨다. 공께선 세아드님을 두었는데 맏아드님은 장사랑(將仕郞)휘 사만(泗萬)이요 둘째 아드님은 휘 사대(泗垈)요 막내 아드님은 휘 사기(泗岐)이다 어머님 상을 당하였을 때 모두 어리신 나이로 백부(伯父)님 참봉공을 따라 상소(喪所)에 달려가 공의 유언에 의하여 선산에 장사하지 못하고 화산(花山)의 시목동(枾木洞) 간좌(艮坐)에 장사하고 삼 형제 모두 참봉공을 모시고 그 곳에서 사셨다.

 

  무오사화란

무오사화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 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 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 양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 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 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 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 대로 진술을 받아내 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 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 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 양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 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 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