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공 휘(諱) 한(澣)선조님의 묘소 : 경남 진주시 장재동 샘골161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하한(河瀚)16세손

공의 휘는 한(瀚)이요 자는 한지(瀚之)요 성은 진주(晋州)의 이름난 문벌인 하씨인데 고려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원정공(元正公)휘 즙(楫)의 7세손이시오 세종 때의 명상(名相)문효공 휘 연(演)의 아우님 대사간(大司諫)휘 결(潔)의 현손(玄孫)이시다 증조님 휘 추(樞)는 중훈대부(中訓大夫)이었고 조부님 휘 중산(仲山)은 부사직(副使直)이었고 황고(皇考)님 휘 기곤(起崑)은 충순위(忠順衛)이셨다.선비(先비)님은 진주 명문인 강씨(姜氏)집안 숙공(淑恭)의 따님인데 아들이 없어 공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공의 생부님은 충순위공(忠順衛公)의 아우이신 충찬위(忠贊衛) 휘 기륜(起崙)이고 생모님은 진양인(晋陽人)정유량(鄭惟良)의 따님이다.

공은1499년에 진주 신당리(新塘里)에서 태어나셨는데 성품이 관대. 인자. 침착 묵종(默重)하여 부모님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시니 아무도 흠잡는 이가 없었다. 과문(科文)을 공부하여 여러 번 과거(科擧)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천거로 곡성 훈도(谷城訓導)에 임명되어 춘추 68세에 돌아가시니 이 때가 1566년 10월21일이었다. 신제(新堤)의 선영 밑 곤좌(坤坐)에 묻히셨는데 계배(繼配)양씨(梁氏)가 그 오른쪽에 묻히 셨다. 1623년에 조정 대신들이 공의 올바른 행위를 들어 임금께 아뢰어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 되었다.

배위(配位)숙부인(淑夫人)강씨(姜氏)는 참봉 자성(自誠)의 따님이다. 아드님 휘 공필(公弼)을 낳으셨는데 그 후사가 없다 양씨(梁氏)는 첨지(僉知) 운(운)의 따님인데 4남 3녀를 두셨으니 휘 공헌(公獻) 공계(公啓)공효(公孝) 공우(公友)요 조광옥(趙光玉)과 강신(姜愼)은 두 따님 남편이다 휘 공헌(公獻)의 두 아드님은 휘 맹(맹)과 의(艤)이다 휘 공효(公孝)의 세 아드님 중 장남이신 휘 진(진)은 집의(執義)벼슬을 하고 도의(道義)와 충직(忠直)으로 세상에 드러났셨으니 이 분이 세상에서 일컫는 태계 선생(台溪 先生)이시다 둘째 아드님은 휘 건(건)이요 셋째 아드님은 휘 직(직)인데 두 분 다 장사랑(將仕郞)이셨다 휘 공계(公啓)공우(公友)는 다 후사(後嗣)가 없다 조공(趙公)의 세 아드님은 증 참판(贈參判)휘 겸(겸)과 첨지(僉知) 휘 비(비)와 휘 상(상)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생략한다.

하씨 가문이 문학과 절의(節義)를 대대로 이어 와 이미 역사에 현란히 빛났고 공에 이르러 조용히 실천의 도를 닦아 선대의 명예를 잃지 않았는데도 마음에 차지 않는 벼슬 자리에 머문 채 숨겨져 펴지지 못하였으니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한 일이 섭섭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 손자 태계선생(台溪先生)에 이르러 선대의 빛을 이어 펴고 번성하게 하여 겸손함에 보태어지고 굽혀졌던 것이 펴지게 되었으니 이는 역시 보상의 이치에 어긋나지 아니함이다 공의 먼 후손인 절제사(節制使) 용제(龍濟)군이 공의 비갈을 나에게 청하므로 이에 명(銘)한다

진산의 하씨가 대대로 빛났던 광채 넓고 높은 인의(仁義)로 이어져 번창하였네

공께서 그 전통을 이어 실천 궁행(實踐躬行) 두터웠으니

잠긴 듯하나 뚜렷하고 막힌 듯하나 형통함 있었네

이에 쌓은 덕이 피어나니 태계 선생으로 시작됨이었네

그 뒤로 남은 경사 이엄이엄 흘러 오늘에 이르니 잊히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