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과공(副司果公) 하백연(河白蓮)17세손

부사과(副司果)진양 하공과 배위이신 단인(端人)밀양 박씨(密陽朴氏)를 천왕리(天旺里) 해좌에 합장하였음은 선영을 따르게 한 것이다. 비석이 너무 심하게 깍이고 헐어서 지금 개수하려 하매 서신을 나에게 보내어 비에 새길 글을 청하는 바 이 어찌 불초하고 글 넉넉지 못한 자가 능히 할 바이리요.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거절치 못하여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백련이요. 세계(世系)는 조부 부사공 비석에 시려 있으므로 거듭할 필요가 없다 호군 부사과 휘 익정(益情)이 부친이요 숙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숙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가 전후의 모친이다.

공은 높이 뛰어나 글이나 바탕이 함께 아름다웠고 사랑과 공경으로 부모님을 섬기었으며 독실히 학문하였다. 말은 반드시 충신(忠信)으로 하고 행동은 반드시 근신(謹愼)으로 하셨다 부모님을 위하여 한 번 과거길에 올라 사과(司果)의 직임을 받았으나 당신의 뜻이 아니었다,

드디어 결단을 내려 자연으로 돌아가 거문고 뜯고 글 읽으신 바 행실이 순무(純茂)하여 잘난 점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혈뜯는 말을 듣지 않았으니 영욕(榮辱)이 어찌 관련하였으리요? 한편 명승지를 때때로 찾음으로 소연히 진세(塵世)에서  벗어난 자태가 있었으니 이는 자신만을 넉넉하게 한 것 뿐아니라 후손들로 하여금 힘써 대대로 보배롭게 전하게 함이 되었기로 그 후손들이 모두 유업(儒業)에 힘써 번성하여 남긴 풍범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덕을 심어 그 보답을 받음이 하늘의 이치로서 반드시 그리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허다한 문적이 임진난에 없어졌으니 어찌 400년 뒤의 사람이 억지로 400년전의 일을 밝힐 수 있으리요? 송구하기 자심하여 겨우 이와 같이 쓰고 이어 명(銘)한다.

학문을 임천(林泉)에서 닦으셨고

부귀에 뜻을 두지 않으셨네

후손에는 준수한 자 많았으니

열매를 먹음이 뿌리에 물댐에 있음을 알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