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계공(台溪公) 진(
)선조님의 묘소:경남 진주시 명석면 덕곡리구돈담

台溪公 하진(河) 18세

태계(台溪) 하진(河))(1597∼1658)의 시문과 그에 관한 글을 모은 것이다. 강백년(姜百年)의 서문과 이야순(李野淳), 유심춘(柳尋春), 곽종석(郭鍾錫)의 발문이 붙어 있다. 광무4년(1900)에 다시 중간하였다. 본집(本集)이 6권, 부록을 합쳐서 4책이다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1호

 소재지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지정일자 1985년 1월 14일  규 모 174판

 

하진(河)의 자(字)는 진백(晋伯)이요, 태계(台溪)는 그의 호(號)이다. 인조(仁祖) 2년(1624)에 진사(進士)가 되고 증광시(增廣試)에 갑과(甲科)로 급제 사재감군직장(司宰監軍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노친의 봉양으로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정언(正言), 헌납(獻納), 지평(持平)등을 역임한 바 있다. 뒤에 진주(晋州)의 종천서원(宗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옛날 성태동(省台洞)으로 불렸던 이곳은 진양 하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고려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진)의 후예들인 이곳 하씨들은 1600년 이곳에 정착해 지금까지 400년을 살고 있다.

400년전, 이 마을에 남명의 가르침이 대쪽같은 한 선비에 의해 전해지고 있었다. 태계(台溪) 하진.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관지 마을에 첫 발을 내딛은 하공효(河公孝)의 아들이다. 하공효는 내동 귀곡동(貴谷洞)에서 살다가 정유재란 때 난을 피해 다니다가 1600년 당시 4세인 하진을 데리고 관지리에 정착을 했다.

400년이 지난 오늘날, 관지리에 사는 50여집의 후손들은 숭정사(崇正祠)에서 태계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명석면 소재지에서 관지 마을로 들어가기 전인 신촌마을 길가에 허름한 비각이 눈에 띈다. 바로 ‘태계 하선생 유허비’이다. 옛날 태계정(台溪亭)을 짓고 살았다는 곳으로 1942년에 비를 세웠는데, 위당 정인보가 비문을 지었다.유허비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관지리 본동이 나오는데, 태계의 학덕을 기리는 태계정사(台溪精舍)가 마을 한 가운데 있다. 정사 옆에는 태계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사당인 숭정사(崇正祠)가 있다.

평생 올바르게 살아온 태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바른 것을 받든다’ 라는 뜻으로 현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남명 선생이 경의의 학문을 영남우도에 창솔함으로써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유택이 끊이지 않아 때때로 도의와 명절을 힘써 행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빠지고 묻히어 품은 바를 시험하지 못하였고, 간혹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겨 신하의 절의를 다하고 인륜의 기강을 붙잡아서 높고 위대함이 천지와 함께 전하는 자는 오직 동계 정온이 그러한 분이요, 고 사헌부 집의 태계 선생 하공 같은 분도 또한 문간공에 버금가는 분으로 남명 선생을 사숙한 분이다.”

한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심재 조긍섭이 지은 태계정사 기문의 첫 부분이다. 이 글에서 태계는 남명의 사숙인으로 동계 정온에 버금가는 선비라고 했다. 동계 정온은 남명의 실천유학을 이어받은 선비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시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 거창에 낙향해 평생 지조를 지킨 선비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태계 역시 동계 못지 않은 선비라고 한 것은 남명의 실천 유학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태계 하진은 1597년 진주 내동 귀곡동에서 태어났다. 4세때 부친을 따라 관지로 이주했으며 11세때는 단목의 모송재(慕松齋) 하인상(河仁尙)에게 공부를 배웠다. 13세때 덕산에 들어가 영무성 하응도에게 중용(中庸)을 공부했다. 영무성 하응도는 남명의 제자로, 덕천서원 건립때 땅를 희사한 사람이다.  이계 신가가 영무성에게 편지를 보내 “듣건대 하수재(河秀才)가 근래에 문하에서 친히 글을 배운다 하니 형은 영재를 얻어 교육을 합니다”라고 했다. 이듬해에는 매헌 이각에게 춘추와 시전을 배웠다.

17세 때 덕천서원에 들어가 겸재 하홍도와 남명선생 문집 교정하는 일에 참여했다. 겸재는 ‘남명 후 일인자’로 알려진 선비로, 태계와는 평생 도의지교(道義之交)로 지낸 인물이다.

이 당시부터 태계는 남명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을 출입하면서 겸재 하홍도, 운창 이시분 등과 학문을 연마했다. 뿐만 아니라 남명 제자 운당 이염이 수우당 최영경과 거닐던 진주의 임연대(臨淵臺)를 찾아 선배의 뜻을 기리고, 봉강 조겸, 매당 이성 등과는 부사 성여신의 계정(溪亭)을 찾아 공부하기도 했다.

27세에 향시를 합격했고, 이듬해에는 진사시에 합격해 30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다. 37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이듬해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광해군실록 편찬의 일에 참여했다. 태계는 조정에서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바른 말하는 관리로 이름이 나있었다.

47세 때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면서, 당시의 폐단과 김자점(金自點)의 극악무도함을 상소했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그 세력이 대단했다. 당시 조정의 관리들은 태계의 바른 말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생명이 위태롭다고 여기기도 했다. 태계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주로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벼슬을 했다.

임금이 바른 정치를 하지 않으면 상소를 올려 이를 바로잡고자 했으며, 권세가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면 이를 그대로 보지 못하고 반드시 시정을 했다고 한다. 효종은 등극하자마자 태계를 찾았다. 마침 태계는 병으로 고향에 요양 중이었다. 병으로 사양을 거듭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여러차례 조정의 부름에 응하고자 상경을 준비하기도 했으나 병세가 위독하여 상경할 수가 없었으며, 향년 62세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태계가 세상을 떠난 후 5년 뒤인 1663년 도의지교였던 겸재 하홍도가 행장을 지어 그 인품을 기렸으며 미수 허목이 묘갈명을 지었다.

숙종 13년엔 이 지역 선비들이 그의 학덕을 기려 종천서원(宗川書院)에 배향을 했다.

 

 

진주촉석루에 걸려있는 태계선생의 詩

                    


              滿目兵塵暗九區 一聲長笛獨憑樓

              孤城返照紅將斂 近市靑嵐翠欲浮

              富貴百年雲北去 廢興千古水東流

              當時冠蓋今蕭索 誰道人才半在州

               

                  ※번역

              전쟁의 어둠이 온 나라에 가득하고

              홀로 누에 기대어 피리 분다네

              외진 성채에 저녁 놀 자자지고

              저자거리 아지랑이 걷치어 가네

              부귀 백년이야 구름이고

              오랜 세월 흥폐에도 물은 동으로 흐르네

              당시의 명관들은 어데 있는 고

              누가 나라 인재 반이 진주라 했는가.

 

          ★임진왜란 때 폐허가된 진주성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읊은시 라고합니다

 

묘갈명

공의 휘는 진이요, 자는 진백(晋伯)인데, 1597년 7월 15일에 태어났다. 10세에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남달리 총명하여 함께 배우던 학생이 다 따라가지 못하였다. 16세에 이미 학문에 통달하여 1624년에 진사가 되었고, 1633년에 3등으로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님이 늙으셨기 때문에 취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집안의 어른들이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공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는데, 아버님 병환 때문에 일어날 것을 결단하지 못하니 아버님이 훈계하기를 「임금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신하가 구급(救急)하러 나아감이 의리이니 나가거라」하셨다.

공께서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상주(尙州)에 이르렀을 때 문득 경증(驚症)이 일어나 음식을 들지 못하게 되었는데, 몸이 군중(軍中)에 있는 지라 사사로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차장(次將)을 진두에 내세우고 이르기를 「시기를 늦추지 말고 가오. 나는 아버님 걱정 때문에 잠시 머물러 있을 것이나, 수일만 지체하면 뒤쫓아 가서 만날 것이오」하였다. 이틀 후에 부고가 도달하였는데 아버님 돌아가신 지 이미 이틀이 지났다. 공께서 복을 입고 있으면서 지나치게 슬퍼하니, 사람들이 모두 선행(善行)이라 하였다.

상(喪)을 벗고 나서 기성랑(驥省郞)으로부터 여러 번 전직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 지평(持平)을 지냈는데, 이미 야위고 병든 데다 늙으신 어머님을 봉양하여야 했기 때문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갔으니 벼슬살이를 오래 하지 못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 있을 때 시사(時事)에 대하여 一萬마디(語)가 넘는 상소를 올리었으나 상소문이 채택되지 않았다. 1645년에 어머님 상(喪)을 당하여 통곡하다 땅에 넘어져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복(服)을 벗은 뒤 잇따라 법관(法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병환 때문에 취임하지 못하고 이경여(李敬與), 홍무적(洪茂績), 심노(沈盧), 이응시(李應蓍)의 일에 관하여 상소하고 여러 왕손(王孫)은 나이가 어리니 죄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당시에 세 신하가 세자(世子)를 바꾸는 일로 임금의 뜻을 거스려서 이응시(李應蓍)가 치옥(治獄)을 논함에 모두 북쪽 변방으로 쫓겨나고, 강씨가 사약을 받아 죽고, 여러 왕손이 제주도에 유배 되었다. 상소문이 들어가자 전직(轉職)되었다.

1649년에 인조께서 돌아가셨는데, 공의 병이 심하여 그 해 7월에 병든 몸으로 상경하니, 또 지평(持平)에 임명하기에 사절하고, 김자점(金自點)이 권력을 전횡(專橫)하는 실태를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병이 더욱 심하여졌다. 여러 번에 걸쳐 장령(掌令), 사간(司諫),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나 다 사양하여 나가지 아니하였다.

1658년 2월 1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2세였다. 임금께서 예(禮)로써 부의(賻儀)하시고, 공을 아는 분들은 공이 크게 쓰이지 못하였음을 아까워하여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상하였다. 공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관대하며 애타적(愛他的)이었다.

어렸을 때 함께 공부하던 아이가 화를 내어 공의 신을 빼앗아 찢어 던졌으나, 공은 성내지 않았고, 남이 물으니 그런 일이 없었다 하고 도무지 남에게 그 말을 아니 하니, 사람들이 어질다 여기였다. 외조모 정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공이 어머님 섬기듯 하였다. 외조모가 돌아가시어 묘를 외조부와 합장함이 마땅한데, 묘소 아래에 살던 동네 늙은이가 그 자리에 묘를 쓰면 집과 묘에 다 좋지 않다 하고 다투려 하였으나 공은 그와 다투지 아니하고 끝내 성의로써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일찍이 사헌부(司憲府)에 있을 때 누가 공의 안장을 훔처갔는데, 종자(從者)가 용의자를 대어 치죄할 것을 청하니, 공이 웃으시며 이르기를 「내가 잃은 것은 작고 그가 입을 악명은 크니 내버려 두어라」하였다. 뒤에 훔친 자가 그 안장을 돌려주었는데 이 일은 공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후인(後人)을 가르침에는 많은 뜻이 담긴 일이다. 아! 재덕(才德)의 생김이 우연한 일이 아닌데 벼슬은 그 덕에 걸맞지 않았고, 베푸신 혜택 받음이 넓지 못했던 것은 무슨 일인고? 하늘이 덕을 맡아 두텁게 쌓아 이를 후손에게 끼쳐 주려 하심일런가? 이에 명(銘)한다.

너그럽고 엄숙함은 군자의 품위(品位)요, 충직하고 정성스러움은 군자의 확증(確證)이로다. 일찍이 선비 친구들과 임연대(臨淵臺)하류에 모이셨는데, 대(臺)의 뒤쪽 꼭대기에 무당이 사특한 사당을 지어 놓은 것이 있기에, 공께서 개탄하여 이를 불살라 버리었다.(대는 운당 이염이 지은 것이다) 객사(客舍)에 있을 때 중국 사신이 관상가(觀相家)를 데리고 와서 공을 보고는 성명을 물은 다음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하모(河某)는 재상의 기국(器局)을 지녔다」고 하였다. 1644년에 어사(御史)에 제수되었는데 사양하니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어사의 직분이 예사 직분이 아닌데 급자기 사양하고 돌아가시니, 백성의 기대를 어찌하시려 함이오?」하였다. 1697년에 종천 서원(宗川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참봉 강명세(姜命世)가 봉안문을 지었다.

1948년에 명석면 관지리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大司憲 許穆

태계 선생 연보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1 윤7월 15일, 晉州 加貴谷里 집에서 태어나다. 부친을 따라 충청도 懷德으로 피난하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12 慕松齋 河仁尙에게 나아가 배우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13 南冥의 문인 河應圖에게 「中庸」, 「大學」을 배우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17 河弘度와 함께 德川書院에 들어가 「南冥先生文集」을 교정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21 가을, 臨淵臺를 유람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22 河弘度와 함께 德川書院을 둘러보고 德山寺에서 讀書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23 瑞山鄭氏와 혼인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24 趙?, 李城 등과 함께 浮査 成汝信에게 수학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27 봄, 생원진사 초시에 합격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28 봄, 浮査先生 등과 靑谷寺에서 강학하다. ○ 가을, 증광 사마시에 합격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30 2월, 성균관에 들어가다. ○ 가을, 靑谷寺에 가서 머물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36 별과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다. ○ 11월, 成汝信을 곡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37 4월, 增廣文科에 甲科로 급제하다. ○ 사재감 직장이 되다. ○ 겨울, 〈神明舍記〉를 짓다. 왕명으로 〈天說辨〉을 지어 올리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38 1월,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光海君日記」 찬수에 참여하다. ○ 12월, 성균관 전적이 되다. 다음달 乞暇하여 還鄕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8 40 12월, 호란이 일어나자 義兵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다. 勤王을 위하여 西行하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9 41 1월, 尙州에 이르렀을 때 부친상 소식을 듣고 되돌아오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44 4월, 宋時烈을 黃澗 冷泉으로 방문하다. ○ 5월, 성균관 전적이 되다. ○ 9월, 예조 좌랑이 되다. ○ 12월, 병조 좌랑이 되다. ○ 南漢山城을 둘러보다.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46 1월, 사간원 정언이 되다. 上疏하여 時弊를 논하였으나 답이 내리지 않자 還鄕하다.
인조 21 1643 계미 崇禎 16 47 병조 좌랑,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 9월, 馭風亭을 유람하다. ○ 11월, 지평으로 부르는 명이 내려 나아가다.
인조 22 1644 갑신 崇禎 17 48 1월, 上疏하여 時事를 논하고 呈告한 뒤 還鄕하다. ○ 4월, 정언이 되어 나아오다. ○ 6월, 지평이 되다. ○ 9월, 체차되어 부사직이 되자 還鄕하다. ○ 12월, 지평이 되다.
인조 23 1645 을유 順治 2 49 1월, 還朝하다. ○ 3월, 헌납이 되다. 兵曹郞의 選薦을 청하고 各司 貢米의 濫徵 폐단을 막도록 청하다. ○ 同月, 모친상을 당하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50 막내아들 河海寬을 眉? 許穆에게 보내어 수업하도록 하다.
인조 25 1647 정해 順治 4 51 6월, 지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9월, 다시 지평이 되다. 上疏하여 사직하면서 時事를 논하다.
인조 27 1649 기축 順治 6 53 1월, 지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2월, 長興寺를 유람하다. ○ 5월, 仁祖가 昇遐한 뒤 시강원 사서가 되어 나아가다. ○ 7월, 지평이 되다. 肅命한 뒤 사직하여 부사직이 되다. ○ 8월, 城中에서 調病中에 上疏하여 時事를 논하다. ○ 10월, 還鄕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54 지평, 헌납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효종 2 1651 신묘 順治 8 55 2월, 弘文錄에 뽑히다.
효종 3 1652 임진 順治 9 56 지평, 시강원 필선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9월, 河弘度와 함께 「南冥先生文集」을 議正하다. ○ 趙?을 곡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57 8월, 성균관 사예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이후 몇 년 동안 장령,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61 2월, 德川書院에 들어가 「南冥先生文集」을 正釐하다. ○ 사간, 집의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효종 9 1658 무술 順治 15 62 2월 18일, 졸하다. ○ 4월, 晉州 북쪽 省台洞里에 장사 지내다.
현종 4 1663 계묘 康熙 2 - 河弘度가 行狀을 짓고, 許穆이 碣文을 짓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 아들 河海宇가 文集을 간행하다. (姜栢年의 序)
숙종 23 1697 정축 康熙 36 - 11월, 宗川書院에 배향하다.
고종 37 1900 경자 光武 4 - 9대손 河兼洛이 문집을 重刊하다. (文集重刊告成文)

기사전거 : 年譜, 行狀(河弘度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家藏 草稿를 바탕으로 아들 河海宇가 수집, 정리하여 처음 간행하였다. 그 연도와 장소는 초간본의 刊記를 통해 알 수 있으니, 연도는 姜栢年이 序文을 쓴 해이기도 한 1683년이며 장소는 晉州 凝石寺였다. 이때 간행된 것이 2권 2책의 목판본으로 권1은 詩, 권2는 疏, 啓, 附錄(河弘度의 行狀, 許穆의 墓碣이고, 補遺로 〈問云云法制〉 1편이 있다.《초간본》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325-1)에 소장되어 있다.

重刊은 1900년에 가서 9代孫 河兼洛 등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이전에 續集과 附錄이 편차된 바 있었다. 李瀷(1681~1763)이 지은 附錄跋에 의하면, 玄孫 河大觀이 遺稿 附錄을 보내와 부탁하였다고 하였다. 또 李野淳(1755~1831)이 지은 續集과 附錄에 대한 跋에 의하면, 5대손 河?이 從兄 河?의 뜻으로 부탁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1763년(영조 39) 이전에 초간본 부록에 실리지 않았던 年譜와 挽詞 등을 추보한 附錄이 완성되었고, 1831년 이전에 續集이 편차되고 附錄이 또 추보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속집과 부록이 실제 간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900년에 后山 許愈 등이 지은 〈文集重刊告成文〉에 보면, 이전에 누차 板本이 불에 탄데다 1894년 東學亂으로 훼손이 심하여 문집의 重刊을 의논하고 1899년 봄부터 晉州 餘沙의 約所에 役所를 열고 누차 ?校하여 1900년에 간행을 완료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1900년에 郭鍾錫이 지은 年譜跋을 참고할 때 重刊을 주도한 것은 9代孫 河兼洛이었던 것으로 보이니, 그는 초간본과 속집을 합쳐 재편하고 연보를 추보한 뒤 許愈 등의 勘校를 거쳐(答河禹碩兼洛, 后山集 卷3) 原集 6권, 附錄 2권 합 4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중간본》 현재 규장각(奎11983, 古3428-105), 장서각(4-6590),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932),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1085)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900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奎11983)이다.

기사전거 : 序(姜栢年 撰), 跋(李瀷ㆍ李野淳ㆍ柳尋春ㆍ郭鍾錫 撰), 文集重刊告成文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原集 6권, 附錄 2권 합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앞에 姜栢年이 지은 序文(1683)이 있고, 그 뒤에 總目錄이 있다.
권1~4는 詩이다. 12세에 지은 〈贈別丹池洞學伴〉을 시작으로 420여 題가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초간본에 비해 〈甲子冬作〉 詩 등이 증보되었다. 外兄 趙?, 막내동생 河?, 鄭東善, 河? 등과의 次韻詩가 특히 많다. 1624년 靑谷寺 講學 시절 지은 시, 1632년 成均館 유학 시절 月課로 지은 시, 1634년 이후 관직 생활과 還鄕을 반복할 시절 지은 시들, 1649년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지내던 ?年의 작품 등이다. 挽詩는 권4 끝에 모아 놓았는데, 姜德龍, 睦性善 등에 대한 것이다. 賦로 〈倚巖爲屋賦〉 1편이 맨 뒤에 있는데, 皆骨山에 들어가 일생을 마친 신라의 麻衣太子를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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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는 疏(12), 啓(3)이다. 1642년 正言으로서 올린 〈陳時弊疏〉를 시작으로 한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啓 3편 가운데 뒤의 2편은 重刊 때 증보한 것이다. 疏는 持平, 正言, 獻納 등의 辭職疏가 대부분이다. 1642년의 〈陳時弊疏〉는 譯官 鄭命壽의 악행, 築城養兵의 필요성, 侵徵의 문제, 元帥 金自點의 부적격함, 經筵 設行의 필요성 등을 진달한 것인데, 批答이 내리지 않자 還鄕하였다. 맨 뒤에 疏啓에 대해 李玄逸이 지은 跋(1700)이 附記되어 있는데, 曾孫 河德長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권6은 策, 論, 辨, 銘, 奏, 書, 序, 記, 跋, 祭文, 墓碣銘, 墓表 두세 편씩이다. 이 가운데 〈法制策〉, 〈天說辨〉, 〈神明舍記〉, 〈跋趙氏忠烈記〉 4편이 초간본에 실렸던 글이고 나머지는 重刊 때 증보된 작품이다. 〈法制策〉과 〈經傳要旨策〉은 1633년 增廣試에 급제할 때 지은 策이다. 應製로 지은 〈天說辨〉은 柳宗元과 韓愈의 天說을 논박하여 지은 글이다. 書는 河弘度와 德川書院 등에 보낸 것인데, 河弘度에게 보낸 편지 중에 趙?이 만든 忠烈記의 간행에 관해 언급된 것이 있고 나머지는 안부편지들이다. 祭文은 河仁尙 등, 墓碣銘은 金虎翼, 鄭復顯 등, 墓表는 先考 河公孝에 대한 것이다.

附錄은 맨 앞에 世系圖가 있다. 권1은 年譜, 권2는 河弘度가 지은 行狀(1663), 許穆이 지은 墓碣銘(1663), 姜栢年, 趙壽益 등이 지은 挽詞, 河弘度 등이 지은 祭文, 宗川書院 奉安文과 常享文, 許愈 등이 지은 文集重刊告成文(1900)이다.
끝에 李瀷이 지은 附錄跋, 李野淳과 柳尋春이 지은 續集附錄跋, 郭鍾錫이 지은 年譜跋(1900)이 차례로 실려 있다.

필자 : 金炅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