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랑공 휘(諱) 계손(季孫)선조님의 묘소  : 전북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독례골

병조좌랑공(兵曹佐郞公) 하계손(河季孫)18세손

도봉(道峯)의 한 줄기가 봉이 나고 용이 달리듯 하여 서쪽으로 6.7리를 달려 동례산(東禮山)이 되었고 그 오좌(午坐)의 언덕은 풍수들이 이르는 바 봉이 알을 품고 앉았다는 명당이 되어 있는데 여기가 우리 14대조 좌랑부군(佐郞府君)의 묘소이다 부군의 휘는 계손(季孫)이요 자는 맹서(孟서)이며 호는 심재(心齋)이다 문효공(文孝公) 경재 선생이 6대 조부이시다 예조좌랑 휘 제명(悌明) 호 성재(誠齋)가 5대 조부인데 단종조(端宗朝)때 영월의 변난이 일어나자 식음을 전폐하고 돌아가셨다. 조봉대부 휘 중호(仲浩)는 고조부인데 남 모르게 가만히 영월로 들어갔다가 그 일로 가혹한 물고를 당하셨다. 한성 좌윤 휘 한문(漢文) 원종2등공신과 호군 휘 익정(益精) 정국2등공신과 호군 담(淡)호 경은(耕隱)이 부군의 증조 및 조부 선고이다 선비는 영인(令人)구례장씨(求禮張氏)이니 참봉겸 한성참군 효직(孝直)의 따님이다. 배위는 의인(宜人) 구례장씨(求禮張氏)인데 묘는 탄방촌(炭坊村) 뒤 간좌이다

부군은 덕기(德器)가 온량 순수하고 겸공(謙恭) 단각(端殼)하였으며 효제(孝悌)는 집안에 드러났고 충신(忠信)은 남에게 미쳤다 한 번 벼슬길에 나간 것은 부모님을 위한 때문이었는데 당시 조정이 날로 그릇되고 권간(權奸)들이 일을 꾸미어 사류(士類)들을 쓸어 타도할새 종숙(從叔) 순(洵)이 화를 당하신 것을보고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고 곧 물러나 부평(富平)으로부터 잠시 영동(永同)으로 옮기어 사시다가 다시 무풍(茂豊)으로 들어가 사악하고 더러움을 버리고 심신을 깨끗하게 하시며 맑고 높은 절조를 지키셨다. 남명(南冥)선생의「위로 향하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다만 한 발자국 사이라」한 것으로 지침을 삼고 강절(康節) 소선생의 사방을 주유한 것을 법으로 삼아 먼 길인 경기 호남 영남에 다니시다가 만년에 정거(定居)하여서는 오히려 명리의 침노를 두려워하였고 학문을 깊고 넓게 하였으며 덕을 더욱 높이셨으니 어찌 세상에 붓을 잡고 먹을 희롱하며 장구(章句)를 수놓고 그리는 이들과 같으시겠는가? 이에 경학에 뜻을 둔사람이 운집하니 항상 이르기를「공부에 힘을 쏟음에 도야하기를 진흙과 모래를 다 파내듯 하면 바야흐로 맑은 샘물을 볼지니라」하고 정서을 쏟아 후진들을 장려하시니 이름 있는 그릇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아드님 휘는 영걸(英傑)인데 회령포(會寧浦)만호요 손자 휘는 억령(億齡)인데 장사랑이다 증손의 휘는 위국(衛國)이요 호는 사양재(四養齋)인데 수 통정(壽通政)이었으며 대덕 백산서원(柏山書院)에 배향되었다 현손 휘 징도(徵道)의 호는 수용(睡용)이다 휘 정도(呈道)의 호는 서악(西岳)인데 문과에 올라 벼슬 이조 좌랑에 이르렀다. 휘 형도(亨道)의 호는 취은(醉隱)인데 통덕랑이요 휘 현도(顯道)의 호는 모정(茅亭)인데 통덕랑이다 형제분 사현(四賢)이 대덕 죽제 백산 서원에 배향되어 제사를 받으신다
아, 임진난을 겪으면서 여러 문헌이 모두 화재에 타 버리어 다만 전래하는 말만 기록하게 되었을 뿐 생졸 연대 또한 갖춰지지 못하고 묘비가 세월이 오래되어 이끼에 침식되어 글자를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비석을 고쳐 세우려 하여 족이 원준(垣準)과 성경(性炅)이 상하로 정성을 기울이고 자손 모든 분과 함께 비석에 샛길 글을 나에게 청하니 진실로 글을 못 하지만 사양할 수 없어 손을 씻고 명(銘)한다

효제(孝悌)로 집안을 다스리고 충신(忠信)을 남에게 끼치셨네

형제간엔 독실한 우애로 떳떳한 인륜을 강명하셨네

강절 소 선생을 사범으로 하고 남명 선생을 표준으로 삼으셨네

의리를 탐구하여 경서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네

후진을 양성하여 많은 명기(名器)를 성취시키셨네

향기로운 풍범과 아름다운 덕망은 오랠수록 더욱 밝아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