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정대부공(通政大夫公) 하일남(河一楠)18세손
 

영일군 기계면 인비동 함월산 경좌의 넉 자 봉분은 옛 조선 통정대부 하공의 무덤이다. 묘에 옛날 비석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이지러졌으므로, 지금 후손들이 개수(改竪)하려 하여 후손 영달(永達). 봉호(奉昊)가 나에게 비문을 청하는 바, 내 비록 그럴 만한 사람이 못되나, 동종(同宗)의 정의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바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일남(一楠)이요, 자는 치형(致亨)이다. 고려 사직 휘 진(珍)이 시조이신 바, 9 세의 휘 즙(楫)은 호가 송헌(松軒)이요, 벼슬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진천부원군이요, 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다. 이 분이 휘 윤원(允源)을 낳으시니 호가 고헌(苦軒)이요, 벼슬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진산부원군이다. 이 분은 휘 자종(自宗)을 낳으시니 호는 목옹(木翁)이요, 벼슬은 봉익대부 병조판서다. 이 분이 휘 연(演)을 낳으신 바, 조선조에 들어와 세종 때의 명상이어서 문종묘에 배향되셨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요, 호는 경재(敬齋)이다. 이 분이 휘 우명(友明)을 낳으신 바, 호는 연당(蓮塘)이요, 벼슬은 가선대부 중추부사이다. 휘 철석(哲石)을 낳으신 바, 호는 학암(鶴巖)이요, 벼슬은 선략장군, 용양위 부호군이다. 이상이 고조 이상 현달한 선조이시다. 증조님 휘는 한필(漢弼)이요 호는 송재(松齋)인데, 충순위로서 한성 판윤에 증직되셨다. 조부님 휘는 인수요 호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교관 궤(潰)의 따님인데, 1600년 6월 12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모습이 준수하였는데,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써 능히 집안의 명성을 이었고, 문효공의 자경잠(自警箴)을 애독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고 시골에 묻혀 지냈으며, 합천 야로(冶爐)에서 영천(永川) 덕연(德淵)으로 이사하여 사시다가 62세 되던 1661년 6월 15일에 돌아가셨다. 배위는 숙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인데, 공보다 4년 앞선 1596년에 태어나서 향년 68세로 1663년 정월 9일에 돌아가셨는데, 처음에 기계면 읍천동 경좌에 장사되었다가 그 후에 공의 묘로 이장되어 합장되었다.

아드님 한 분을 두었는데, 휘가 득서(得瑞)이다. 손자의 휘는 치성(値聖). 두성(斗聖). 우성(遇聖)인데, 치성. 두성 두 분은 후손이 없고, 우성의 자손이 대대로 영천의 덕연과 영일(迎日)의 인비동(仁庇洞)에서 살아온다. 공의 6세손 흥열(興悅)은 무과에 올라 사과(司果)가 되었고, 그의 둘째 아드님은 응기(應基)요, 셋째 아드님은 윤기(潤基)인데, 승사랑, 충의참봉이었다. 나머지는 번성하여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문학과 행의(行義)가 마땅히 후세에 전해짐이 있어야 할 것이나, 세월이 오래되고 난리를 겪어서 인멸하여 전해짐이 없으므로 다만 족보에 의거하여 쓰노라. 지금 비석을 세워 묘를 표시함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주간한 사람은 후손 창호(昌昊)와 성대(聲大), 성홍(性泓)이다. 이에 명(銘)한다.

공의 선대가 진주에서 계출하여 이 땅에 산 후로 자손이 번성하였네.

여러 번 난리를 겪어 유문(遺文)이 전해짐 없으나,

묘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추모하기에 흡족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