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사공(同知事公) 하연흥(河延興)19세손
 

강양(江陽) 용주의 적량산 갑좌의 무덤은 옛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하공의 묘이다. 공의 휘는 연흥(延興)이요, 자는 여립(汝立)이다. 하씨의 선조는 진양에서 비롯되어 고려 사직 휘 진(珍)이 시조로 족보에 등재 되었는 바, 여러 대를 지나 호를 목옹(木翁)이라 한 휘 자종(自宗)이 병조판서 증 좌의정이었는데, 이 분이 휘 연(演)을 낳으셨다. 호를 경재(敬齋)라 하였는 바, 국조의 명상이 되어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이 분이 공의 7대조이시다. 고조님은 회(澮)인데 장사랑이요, 증조님은 수겸(秀兼)인데 참봉이요, 조부님은 자성(自成)이요, 황고는 령(寧)인데 참봉이요, 선비는 남평손씨(南平孫氏)이다. 공이 1560년에 태어나서 1645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86세였다. 수(壽)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이니 대개 이는 노인을 우대하여 내린 벼슬이다

.배위는 밀양박씨(密陽朴氏)요, 세 아드님은 주부(主簿) 기룡(起龍)과 유룡(有龍)과 참봉 응룡(應龍)이다. 손자중 수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형운(亨運)과 달운(達運)은 큰 아드님 기룡의 소생이요, 계운(啓運). 명운(命運). 진운(振運)은 둘째 아드님 유룡의 소생이요, 찰방 창운(昌運)과 중운(重運)은 셋째 아드님 응룡의 소생이다.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시대가 이미 삼백년이 넘었는데도 묘비가 없었으므로 모든 후손들이 개연(慨然)히 비를 세우려 할새 비명(碑銘)이 없을 수 없어 그 문중의 종우(鍾禹). 성규(聖奎) 두 사람이 나에게 와서 비에 새길 글을 물으면서 말하기를 「족보에 매우 간략하게 되어 있고 또 세월이 오래 되어 자취가 상세하지 못하니 어찌 해야 합니까?」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세월이 오래되어 자취가 상세하지 못함은 필연적 형세이니, 슬퍼할게 무엇인고? 그 상세한 바는 상세한 대로 하고, 그렇지 못한 바는 가략하게 함이 옳도다」하였다

그 세대를 상고하여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대개 공이 문효공 시대의 혜택 끊임과 그리 멀지 아니하여 음직(蔭職)으로 벼슬할 수 있었으나 초야에서 분수를 편안히 여겨 벼슬길을 구하지 않으셨으니, 그의 염정(恬靜)한 취미를 알 수 있고, 능히 많은 수(壽)를 누려서 노직(老職)을 받으셨으니, 인후(仁厚)한 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염정한 취미와 인후한 덕이 비록 혁혁한 명실(名實)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명명(冥冥)한 음적(蔭積:모르는 사이에 덕이 쌓임)이 되었으니, 공이 꾀함을 끼쳐 음덕을 후손에게 물려주심이 어찌 이에 있지 않은가? 마땅히 이를 비에 새겨 자손의 법칙으로 삼을지라. 그리고, 그 세계(世系)와 생졸과 배위와 후손을 앞에 기록하고 이 말을 뒤에 붙여 공의 묘표로 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