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공 휘 윤구선조님의 묘소 : 전남 화순군 이서면 보월리 영평


 
금사공(錦沙公)하윤구(河潤九) 20세손

선생은 사직공(司直公) 20세손(世孫)이며 대사간공 휘 결(潔)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1570(선조 3)∼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여옥(汝沃), 호는 금사(錦沙). 화순출생.아버지는 참군(參軍) 대표(大豹)이며, 어머니는 경주배씨(慶州裵氏)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5년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기 위하여 김포현관(金浦縣館)에 들렀다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벽상(壁上)에 〈대인륜시 大人倫詩〉를 남기고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다. 또한, 폐모론의 극창자들을 탄핵하였다.

1633년(인조 11)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율봉찰방(栗峰察訪)에 이어 전적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노구로 후방에서 의병을 지휘하여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친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거빈탄 去#빈14歎〉의 시를 지어 통곡하고 파병(罷兵)하였다. 향리에 돌아와서 비분한 한을 시문으로 달래면서 항상 이의 설욕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저서로는 《금사유집》 2권이 있다. 

  墓誌銘

공의 휘는 윤구(潤九)요 자는 여옥(汝沃)이다 진양 하씨는 삼한(三韓) 때의 명문인데 고려 때에 더욱 번성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도 역시 높은 벼슬과 인물이 많았는데 공은 기절과 지조가 매우 컸다. 광해군 때에 군흉(군兇)들이 왕비를 폐하려는 의논을 일으킬 때 이완평(李完平)이 상소를 올려 극언으로 말릴새 성균관 유생들 중의 반대파들이 이완평을 공격하려 하므로 공이 고향으로부터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모자(母子)는 큰 인륜이라 하늘에 해와 달이 있음과 같네 일월(日月)은 때로 바뀜이 있지만 인륜은 끝내 이지러짐 없나니라」하였는데 이 시가 전파되어 지금에 읽어도 말이 늠연하여 인륜의 중대함을 유지케 하니 이 시구절 만으로도 가히 공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공은 뜻이 커서 작은 절차에 얽매이지 않으셨기로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 없었더니 이월사(李月沙)가 공의 시를 한번 보고 문장의 거수(鋸手)로 칭송하기를 마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이월사와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었다.

공의 발자취가 권귀(權貴)의 문전에 이르지 아니하고 때로 이월사의 좌상(座上)에 이르렀다, 아! 이월사가 문장의 맹주(盟主)로서 천하게 크게 이름이 높았는데 공이 그의 허교(許交)함이 되었으니 비록 여사(餘事)이긴 하지만 마땅히 모든 사람을 굴복시키고 일세를 복종케 할 수 있었던 분이라 할 만하다. 만년에야 163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율봉찰방(栗峯察訪)을 지냈으나 벼슬을 즐기지 않아 겨우 전적(典籍)에 머물렀다. 곧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이르렀는데 화친하였다는 소식에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가 산수 속에서 지내다가 돌아가시니 향년이 77세였다. 이 때가 1646년 정월 8일이었다. 공이 동복(同福)땅 금사(錦沙)에 살았으므로 스스로 호를 금사라 하였다. 서석산(瑞石山) 동쪽 기슭 오좌에 장사되었는데 일월(日月)의 시구절은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명(銘)한다.

안으로 곧고 밖으로 강개함은 공의 기백이요

시를 지어 윤리를 부지하며 몸을 깨끗이 하여 벼슬하지 않았음은 공의 뜻이네

몸소 덕을 쌓아 후손에게 남겼음은 공의 도움이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