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휘(諱) 홍도(弘度)선조님의 묘소
 :   경남 하동군 옥종면 문암리 한천

하홍도(河弘度) 21세손

선생의 휘는 홍도(弘度)요, 자는 중원(重遠)이요, 성은 하씨인데, 진주인이다. 옛날에 휘 자종(自宗)께서 고려의 말운(末運)을 당하여 군부상서(軍部尙書)를 사양하고, 병을 칭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호를 목옹(木翁)이라 하였는데, 대사간(大司諫) 휘 결(潔)을 낳으셨다. 대사간 공의 증손 휘 자청(自淸)은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는데, 이 분이 선생의 6대조이다. 조부 휘 무제(無際)와 황고 휘 광국(光國)은 다 재예(才藝)가 있었으나, 나타내지 않으셨다. 선비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처사(處事) 광우(光友)의 따님이다. 1593년 8월 27일에 선생께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특이한 모습을 지니었다. 병란을 당하여 부모님께서 아이(선생)을 데리고 피난하여 호남 땅에서 헤매였는데, 아이가 뛰어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맞이하였다.

열살에 처음으로 소학(小學)을 읽고 능히 스스로 힘써 행할 바를 알았고, 열두세 살 대 이미 도(道)를 구할 뜻을 지니었다. 열여섯 살 때 선부군(先府君)께서 돌아가시니 통곡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고 상복을 벗은 다음 고을의 하 선생에께서 논어(論語)를 배위 대의(大義)에 통달하였는데 뒤에 하 선생께서 돌아가시니 사부 복제(師傅服制)로 상복을 입었다. 스무 살 때 학궁(學宮)에 들어 배울 때 모든 학생들이 다 경중(敬重)하였다. 광해군 때를 당하여 과거 공부를 버리고 오로지 경서 연구에 힘썼다. 선부인(先夫人)께서 돌아가셨을 때 기력이 이미 쇠하여 3년상 치성에 야위고 병들어 예법대로 인사를 차리지 못하면서도 오직 학생들을 보살피며 학문을 강론함에 싫증을 내지 않고 겸약(謙約)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호를 겸재(謙齋)라 하였다.

사람을 대하심에 도타운 예의가 있고 효우(孝友)를 실천하니 고을 사람이 감화를 입었다. 인조조(仁祖朝)에 숨은 현사(賢士)로 인정되어 여러 번 불리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암천산재(巖泉山齋)에 거하기를 즐기며, 그 남쪽 천석(泉石) 위에 대(臺)를 만들고 영귀대(詠歸臺)라 이름하였다. 진주 목사 성이성(成以性)이 선생을 방문하여 백성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며, 백성이 흩어지고 풍속이 퇴폐함을 한탄하므로 선생께서 이르기를 「진(秦)나라는 가혹한 정치를 하였으므로 백성이 포악해졌고, 한(漢)나라는 너그러운 정치를 하였으므로 백성이 후덕해졌으니 어찌 일찍 백성을 바꾸어서 감화시킨 일이 있었으리요?」하였다. 1655년에 의흥현감(義興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셨다.

이듬해에 효종께서 승하하시니, 선생께서 경기(京畿)백성으로서의 재최복(굵은 삼베로 지은 상복)을 석 달 입은 뒤에 나라 법제를 따라 선비 상복으로 바꾸셨다. 1662년에 어사(御史) 남구만(南九萬)이 진주에 이르러 선생을 안계(安溪)로 방문한 것은 당시에 조정에서 예법에 관한 문제로 다툼이 있어 비찬하는 자를 다 물리치는 고로 그 옳은 길을 물어듣고자 함이었다. 선생께서 대답하기를 「장자나 차자나 삼 년복을 입는 것은 예기(禮記)에 나와 있는 바이거든 하물며 효종은 이미 일국의 임금이었으나 장자와 차자, 적자와 서자를 어찌 논하리요?」하였다. 남구만이 선생의 말씀을 임금께 복명한 바, 선생의 연세 이미 70 고령이기에 임금께서 식량과 음식을 하사하시고 선생을 매우 두터이 존경하는 내용의 전지(傳旨)를 내리시니, 선생께서 상소하여 사례하고, 아울러 임금의 요도(要道) 아홉 가지를 진달(陳達)하였다.

4년 뒤 1666년 4월 26일에 선생께서 돌아가시니 연세 74세였다. 선생의 학문은 날마다쓰는 떳떳한 인륜의 준칙을 근본으로 한 것이어서 그 지조 지킴에 변함 없었고, 실천하는 방도에 있어 한결같이 옛 성현을 법으로 삼았으며 기거(起居)와 의식(依食)에 이르러서도 모두 떳떳한 법도를 지니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힘써 행함이 고인에 미치지 못한다」하고, 선하지 못한 일인 줄을 알면 끝내 행하지 아니하였다. 매양 사람을 예의로써 면려(勉勵)하고, 학문함에 반드시 먼저 행하고 그 뒤에 말씀하셨다.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몸을 결백하게 하여 홀로 행한 지 50년이 되도록 의로움이 아니면 하나도 남에게 베풀지도 않았고, 하나도 남에게서 취하지도 않았으며 평생에 남과 더불어 착한 일 하기를 즐기셨다. 예법과 풍속에 독실하여 관혼상제를 중히 여기되, 여자의 비녀 꽂는 제도는 나라 풍속에 정해진 바 없음에도 홀로 선생의 집안에서는 그 예제(禮制)를 정하여 행하게 되고, 퇴폐적 풍습에 다투어 저술로써 이름을 내려는 문폐(文弊)가 있음을 미워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옛 사람이 다 말하였으니 학자는 행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알아 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일찍이 일월성신의 위치를 알아내어 초순과 보름과 그믐과 초하루와 윤달의 도표를 만들어 말하기를 「요즈음 역법(歷法)이 문란하여졌으니 이로써 미루어 쓰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하셨다.

배위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극의(克義)의 따님인데, 1남1녀를 낳으셨다. 아드님이 일찍 별세하여 태계 휘 진의 손자 영(泳)을 후사로 삼았다. 두 사위는 충의위 이복하(李復夏)와 사인(士人) 박영주(朴英胄)다. 1666년 11월 14일에 선생을 문암의 참샘 위에 장사하였다. 선생의 여러 제자들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여 말하기를 「이제 당신이 선생을 가장 깊이 알고, 또 능히 말할 수 있거니와 군자가 돌아가시매 남기신 가르침을 놓치지 못할지니, 후세에 없어지지 않게 함은 당신이 할 바이나 감히 저희들의 청을 응낙하오」하였다, 아! 내가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긴 하여도 노덕(老德)을 잃었으니 선생의 비문을 쓸 사람이 되지 못하지만 나 아니면 또 누가 하리요?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일이매, 이에 명(銘)한다.


곧고 온화함은 군자의 빛남이요,

확고하고 곧음은 군자의 형통이라.

순(順)하고도 이룸(成)은 군자의 편안함이로다.

 

학도를 가르친 도학군자 (1593-1666)

겸재선생은 조선시대 세종조의 명현 문효공 하연의 동생인 대사간 결의 후예이며 진천부원군 원정공 하즙의 후손으로 옥종면 안계리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남명(조식)의 경의의 학문을 이어받아 평생을 은거하여 사시며 학도를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아니하셨다. 인조, 효종조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하셨으니 경쟁시대의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는 바가 크다.

옥종면 소재지에서 산청으로 가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5-6분만 달리면 월횡리를 지나 안계리다. 오른쪽으로는 들판을 끼고 왼쪽에 솟아 있는 사림산의 옛 이름은 가사산 이라고 한다. 겸재선생이 이 산 기슭에 모한재를 지어 제자를 수용하고 가르친 이후 사람들은 이산을 사림산이라 불러 지금에 이른다 하니 선생의 인물됨을 짐작할 만하다.  안계마을로 접어들어 100미터정도 걸어 오르면 먼저 모한재 입구의 우편에 있는 영귀대가 암반위에 정사각형모양으로 모습을 들어낸다.  날마다 벗으로 더불어 시를 읊던 군자의 풍류를 느끼는 듯하다. 당대의 명현인 허미수 목과 남약천, 구만등이 찾아와 도의의 사귐을 맺을 때도 겸재는 이곳에 나와 손님을 맞이하고 보냈으리라. 약 4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풍스런 모한재에선 아직도 선생의 큰 가름침이 들리는 듯하다. 손수 심어셨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모한재 현판, 묘갈명, 돌에 새겨져 있는 영귀대 현판 등의 미수 친필의 보물을 대하고 보면 그 필치가 놀랍고 신비롭기 까지 하다.

겸재선생의 아버지는 광국, 어머니는 강양이씨로 광우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옛 성현과 같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스스로 겸재라 하였다. 처음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암천(지금의 모한재가 있는 지역)에 돌아와 경사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662년 현종3년 어사 남구만이 안계로 그를 방문하여 앞서 조정에서 있었던 예론을 토의한 뒤,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어 후한 상을 하사하였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선생은 또한,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월성신의 도수를 추정하여 시행되는 역법을 시정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겸재집이 있다. 사후에 남방 유림이 옥종면 종화리에 종천서원을 창건하여 모셨으나 고종때 해체 철거 당하고 뒤에 모한재에서 제례를 드리고 있다.  모한재가 있는 안계리에는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 있으며 인근 문암리 냉정 선생의 묘지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남명 선생이 돌아가신 후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다. (世稱老先生後一人)”

남명 선생의 학문을 이은 제자, 사숙인(私淑人)들을 기록한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에 한 선비를 두고 이렇게 적고 있다. ‘남명 선생 후 일인자’라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한 선비가 누구일까. 바로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이다. 겸재는 남명에게서 직접 배우지 못하고 남명의 제자인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그러니까 겸재는 남명의 사숙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겸재는 남명-각재-송정으로 이어지는 남명학맥을 계승한 대표적 비라고 할 수 있다. 겸재는 1593년 현재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安溪里)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진주 땅이었으므로 그를 진주 선비라고 부른다. 지금 안계마을 입구 길가에 ‘朝鮮徵士謙齋河先生遺蹟碑(조선징사겸재하선생유적비)’가 서 있으나, 길가는 행인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했다. 임금이 불러도 벼슬에 나가길 사양했던 덕망 있는 선비를 일컫는‘徵士’라는 글자는 겸재가 평생 벼슬보다는 학문정진에 힘쓴 선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겸재는 진주성 전투가 치열했던 계사년에 태어나, 10세까지는 전쟁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피난 생활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어려운 시절인 10세 때 지은 시 한수가 문집에 전한다.

인적 없는 고택에 몇 그루 매화 나무

추운 꽃떨기 나무 가득 적막하게 피었네

달 밝은 호수가 밤

시 짓는 마음은 왔다 갔다 하네

(人亡故宅幾株梅/滿樹寒파寂寞開/最是月明湖上夜/詩魂時復去還來)

어린 시절 어려운 삶을 살아간 겸재의 마음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으며, 10세 소년이 지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시이다. 또 전쟁 중에 부친이 소학 책을 구해주자 “사람을 만들고 바르게 하는 것이 이 책에 있다”라고 하면서 읽고 그대로 행동했다. 이후 겸재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 했는데, 이는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14세부터 외할아버지인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에게 글을 배웠다. 죽각은 남명의 벗인 청향당 이원의 아들로 남명에게 학문을 익힌 남명 제자이다. 19세때 송정 하수일에게 논어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논어의 의심나는 부분을 묻자 송정은 “나보다 낫다”라고 할 정도로 겸재의 재능을 인정했다.

겸재의 학문은 죽각에게서 기초를 다지고 송정에게 나아가 더욱 정밀하게 했으니, 남명의 학문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명의 제자들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은 겸재는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덕천서원을 오가며 남명 선생의 학기를 분류 편찬하는 등 여러 선비들과 남명학 계승에 힘을 쏟는다. 34세때 사마시에 응시해 일등을 하지만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다. 정묘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머니 상을 마친 48세 때는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집안일을 동생에게 맡기고 모한재(慕寒齋)에서 학문수양에 힘쓴다.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 여덟글자를 크게 써서 벽위에 붙이고 아침 저녁으로 보고 성찰하였다. 경서를 익히면서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고 집에 있으면서 출입을 하지 않았다. 관찰사나 고을 원이 방문을 해도 한 번도 관청에 들어가지 않고 다만 편지로서 인사를 할 뿐이다.

”겸재의 행장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겸재가 학문수양에 힘썼던 모한재를 찾았다. 안계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모한재는 족히 400년은 넘었을 법한 은행나무가 유서깊은 곳임을 대변해주고 있다. 모한재는 조선조 인조때 겸재가 창건하여 주자의 학문을 본받겠다는 뜻에서 모한재라 이름 짓고 학문을 하던 곳이다. 당대의 어진 선비인 미수 허목, 약천 남구만 등이 다녀가기도 했다. 지금은 어진 사람들의 발길이 예전같지 않아 거의 방치돼고 있는데, 미수가 쓴 모한재란 글씨만이 옛 어진 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53세 때 겸재에게 처음으로 건원릉 참봉 벼슬이 내려졌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여려번 벼슬이 내렸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처럼 벼슬을 사양한 겸재이지만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70세 때 암행어사 남구만이 모한재로 찾아와 조정의 일을 자문했다. 당시 조정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시끄러웠다. 겸재의 자문을 남구만이 조정에 아뢰자 효종은 “그대는 산림의 선비로서 내가 경계해야 할 것을 말한것이 간절하고 절실하다. 내가 깊이 감탄하노니 어찌 마음에 새겨 두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72세 때는 감사 이상진이 와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는데, 겸재는 여씨향약을 들려주고 풍속을 교화하는 것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1666년(현종 7년) 4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4세였다. 1679년(숙종 5년)에는 지방유림들이 학덕을 기리기 위해 옥종의 종천서원에 모셨다. 겸재는 70평생 동안 고향에 살면서 남명문인, 사숙인 들과 교유하면서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상 사람들이 겸재를 보고“남명후 일인자”라고 한 것은 누구보다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는데 앞장을 섰으며, 그 자신 또한 대단한 학문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남명의 경의를 학문의 바탕으로 삼고 나아가 ‘겸(謙)’이란 말에 매력을 가지고 자신의 정신 세계를 구축해갔다.겸재는 모친상을 마친 해인 48세부터 번잡한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자 했다. 집안 일을 동생에게 부탁하고 초가를 지어 살고자 했다. 거처하는 곳에‘겸재(謙齋)’라고 스스로 호를 지어 벽 위에 글씨로 써두고 ‘겸괘도(謙卦圖)’와 그와 관련한 해설을 그림으로 만들어 아래에 붙였다. 옛날 선비들은 자신이 추구해야 할 정신 자세를 호로 사용했다. 겸재가 ‘겸손할 겸’자를 호로 선택한 것은, “겸손하고 또 겸손하여 낮은 자세로서 스스로 그 덕을 기르고자 ”해서이다. 남명 선생의 경의(敬義)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꾸준히 공부를 해오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시기에 자신을 낮추고자 하는 겸재의 학문 태도는 선비의 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말세의 습속과 문장의 폐단으로 다투어 책을 저술하는 것을 명예로 삼으니 이를 병통으로 여겨 탄식하기를 옛사람들이 다 말씀하셨지만 배우는 사람은 실천하지 못함을 근심해야지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해서는 안된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실속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자신을 뽐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나무란 것이다. 겸재 역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천하지 못함을 근심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을 낮추면서 배운 것은 실천하면서 내실을 기하는 학문태도가 겸재의 학문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동군 옥종면 문암리 냉정마을 서쪽에 있는 겸재의 묘소를 찾았다. 미수 허목(許穆)이 쓴 묘갈명이 눈에 띄었다. 미수(1595~1682)는 퇴계학맥을 이은 정구의 제자로 사서(四書)나 주자의 저술보다는 오경(五經)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진한(秦漢)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되어 특히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조선 중기 남인의 영수로 예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1638년과 1643년 두 차례나 겸재를 찾아 안계를 방문할 만큼 겸재와 친분이 깊었다. 갈명에 “공의 여러 제자들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이제 그대가 선생을 가장 깊이 알고 또 능히 말할 수 있다. 군자가 돌아가시면 남기신 가르침을 받들어 이어야 한다. 후세에 없어지지 않게 하는 일은 그대의 일이니 감히 청한다 라고 하는구나” 미수가 겸재의 묘갈명을 짓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겸재는 미수와 절친한 사이였다. 미수가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으니, 겸재를 찾아와 예학에 대해서도 많은 토론을 하였을 것이다. 겸재 역시 예학에 밝았다. 당시 조정에서 심각하게 논란하던 복제 문제를 임금이 직접사람을 보내 자문할 정도였다. 겸재는 평소에도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예의가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예의가 없다면 동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면서 예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대로 실천을 했다.

아무튼 남인의 영수라고 할 대학자가 찾아오고 임금이 자문할 정도였으니 겸재의 학문과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겸재는 스스로를 낮추었다. 임금이 그의 학식을 듣고 벼슬로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만약 몸을 스스로 낮추지 않고 선뜻 벼슬길에 나갔다면, 겸재는 “남명선생 후 1인자”라는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조정은 대북파와 소북파의 암투 속에 영창대군이 살해되고 인목대비가 유폐되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곧은 선비 겸재가 조정에 있었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겸재는 만년에 자신이 기거하던 모한재 남쪽 100보 지점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영귀대(詠歸臺)를 만들어 놓고 제자들과 예를 익히고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미수 허목이 전서로 영귀대라고 쓴 글씨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시냇가 노송과 어울려 경관이 너무 아름답다.

아침에는 대나무 속 집에서, 눈을 읊조리고

저녁에는 매화나무에 걸린 달을 읊조린다

굳은 절개 정신을 감동시키고

바람부니 향기 절로 온다.

(朝吟竹舍雪 夕弄梅花月 苦節感精神 風生香自發)

겸재의 삶을 노래한 시다. 어지러운 조정에 나가기 보다 대나무, 매화나무를 벗삼아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겸재는 50세이후 약 20년간 이 지역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조정에서 심각하게 논란하던 복제 문제를 임금이 직접 사람을 보내 자문할 정도로 조정에 알려졌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인조 효종 현종의 부름을 거절한 겸재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지역 선비들은 1676년 그가 살던 곳에 종천서원(宗川書院)을 건립해 학덕을 기렸다, 종천서원 건립 100년 뒤인 1759년 당시 노론인 진주목사 조덕상이라는 사람이 겸재를 “율곡과 우계를 비방하고 윤선도와 허목을 존경하였다”는 것을 죄목으로 삼아 위패를 종천서원에서 출향시킨 일이 벌어졌다. 이 지역 유림들이 알고 있는 ‘종천서원 원변(院變)’이란 사건이다. 이 일을 바로잡기위해 이 지역 유림들과 겸재의 후손들은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다시 위패가 모셔졌다.

겸재 증손 하대관(河大觀)과 이 지역 선비들은 무려 22년동안 겸재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결국 사필귀정으로 조덕상 등은 죄값을 치렀지만, 이 일로 인해 후손들과 이 지역 선비들이 입은 타격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남명선생 후 일인자”라고 불릴만큼 드러난 선비 겸재를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그의 흔적이 스민 종천서원 앞 고목만이 겸재의 선비정신을 후세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겸재가 제자들과 시를 읊조렸던 영귀대에 옛 선비들의 낭랑한 글읽는 소리가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 했다.

 경남일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