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와 하홍달(河弘達)21세

하동군 옥종면 종화리 정개산록에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 묘가 있다. 낙와는 설창의 부친이다. 낙와는 진천부원군 원정공 하즙의 후손이고 조선시대 세종조의 명현 문효공 하연의 동생인 대사간 결의 후손으로 1603년 옥종면 안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며, 형인 겸재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예를 ‘주자가례’에 따라 하고 실천하기를 매우 엄하게 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공경을 했고, 고을 원이 행의를 조정에 보고 했으며,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도 낙와의 행적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조정에 천거했다.약관의 나이에 향시에 급제했으며,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명확했고 필법이 굳세었다. 용주 조경이 이조판서가 되어 공을 청요직에 천거하고자 했으나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 49세였다.

 

홍달(弘達)墓碣銘

처사 하공의 휘는 홍달(弘達)이요, 자는 치원(致遠)이다. 그 선조 휘 진(珍)은 고려의 사직이요, 9세의 진천 부원군 휘 즙(楫)은 시호가 원정(元正)이다. 이분이 윤원(允源)을 낳으시니 : 진산 부원군이다. 이분이 자종(自宗)을 낳으시니 : 호가 목옹이요 병부상서였는데, 고려 말에 물러나 일생을 마치셨다. 아드님 5형제와 사위님 세 분을 두신 바 모두 현달한 벼슬을 하셨는데, 셋째 분이 문효공 연(演)이요, 그 아우님은 결(潔)인데, 대사간이었다. 참의 금(襟)과 지중추 여와 관찰사 자청(自淸)을 지나 문과 현령 효문(效文)에 이르니 : 이분이 공의 5세 조이시다. 고조님은 보용인데 승훈랑이었고, 증조님은 철부(哲夫)인데 참봉이었고, 조부님은 무제(無際)인데 봉직랑이었다. 황고는 광국(光國)인데 덕을 숨겨 벼슬하지 않으셨다. 선비 광양 이씨는 처사 광우(光友)의 따님이시오 상서 좌복야 경분(景芬)의 후예이시며 사헌부 집의(執義) 어 영준(魚永濬)의 외손녀이시다. 부덕이 매우 많으셨는 바, 선조 계묘(1603)년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탁월히 뛰어나셨는 바, 여섯 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셨으며, 점점 자라 형님 겸재 선생에게서 배우셨다. 장성하셔서는 위의(威儀)가 뛰어나고 용력(勇力)이 있어서, 활 쏘고 말 타기에 익히지 않아도 능하셨다. 그래서, 항상 글공부를 걷어치우려 하므로 형님께서 만류하곤 하셨는데, 하루는 통렬히 구습을 씻고 마음을 고쳐 모든 경서를 읽으며 근칙하기를 더욱 더 하여 어머님 섬김에 성효(誠孝)를 지극히 하셨고 날마다 형님으로 더불어 곁에서 모시며 즐겁게 해 드렸다.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건강을 해치게 되어 거의 멸성(滅性)한 데 이르셨는데, 장례와 제사를 꼭 예법에 맞게 하셨다. 상복을 벗음에 드디어 과거 공부를 폐하고 학문에 전심하며 집의 이름을 낙와라고 하여 학자들도 더불어 날마다 주공(周公), 공자(孔子)로부터 정자(程子), 주자(朱子)에 이르기까지를 강론하여, 그 즐거움이 도도하였다. 관계혼의 예를 주자의 가례를 따라 하시고 실천하기를 매우 엄하게 하시므로, 향당(鄕黨)이 공경하였고, 방백(方伯)이 행의(行誼)를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백헌(白軒)이 상공도 또한 선비의 행적으로 천거하셨다

.조 용주(趙龍洲)가 이조판서가 되어 공을 유직에 의망(擬望 : 후보자를 왕에게 추천함.)하였으나 공이 갑자기 돌아가시니 : 향년이 49세였다. 사우(士友)들이 고을에서 모두 조상하고 수십 인이 상복을 입은 가운데 진주 서쪽 정개산 남쪽 기슭 해좌에 묻히시었다. 공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높은 성적으로 향시에 합격하셨는데,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명확하였으며, 필법이 굳세었다. 성산(星算), 의약(醫藥), 병법(兵法)에도 통달하시어, 비록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사셨어도 더불어 종유(從遊)하던 사람은 모두 당시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었다.

또, 감식(鑑識)함이 매우 밝아서, 사람의 궁달(窮達)과 요수(夭壽)를 논하면, 번번이 징험되었다. 공이 돈독한 덕망과 아름다운 행적, 그리고 풍부한 재주와 깊은 식견이 있어 세상에 수용되고 시내에 모범이 될 만하셨으나 끝내 광채를 숨겨 궁벽한 시골에서 일찍 돌아가셨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배위 전주 유씨는 대사간 헌(軒)의 6세 손이시오 처사 수창(壽昌)의 따님이신데, 정숙하고 단정하시며 여공(女工)을 잘하시고 문자를 해득하셨으므로 종당(宗黨)에서 여사(女士)라 일컬었다. 공보다 2년 늦게 탄생하시고 같은 해에 돌아기시어 합봉되시었다. 아드님 철(澈)은 학문에 힘쓰시고 가훈을 지키셨으며, 사위님은 백 이장(白而章), 권약인데 모두 선비셨다. 손자님 다섯 분은 유일(遺逸)로 지평이 된 덕망(德望)이요, 덕윤(德潤)이요, 부사 덕휴(德休)요, 덕건(德建)이요, 선전관 덕원(德元)이다. 손자사위님 세 분 중 백(白)씨는 1남2녀요, 권(權)씨는 2남 1녀이다. 공의 아드님 철(澈)이 천 릿 길에 글을 보내어 나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이에 명(銘)한다

.하씨의 선조가 고려 때에 현저하여,

우뚝한 원정공의 공훈이 역사에 실려 있네.

목옹공은 밝게 살핌으로 능히 용감히 물러나셨으며,

문효공의 아우님은 대사간의 직책이었네.

시랑공과 관찰공의 벼슬이 대대로 빛났는데,

후세에 점점 부진(不振)하여 짐엥 덕망에 넉넉하였었네.

아, 처사공은 뛰어난 천재(千才)를 지니신 채

입을 다물고 영기를 숨겼으나 언사는 법도에 맞게 하시었네.

겸재 선생에 이르러 널리 강론하셨고

집안에 처하여 몸가지심이 예법에 맞았었네.

골짜기에 난초 있으니, 그 향기 없어지지

않고 선비다운 사람 없으매, 높이 우러러 법도 삼았네.

어찌 두터이 쌓아 인색하게 베푸셨는고?

이미 갈고 이미 일구었으니, 후손들이 먹게 되었네.

진양의 서쪽 산수(山水)는 얽히었는데,

내가 그 무덤에 새기니, 영세토록 이지려지지 않으리.

(영조 때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증직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