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공(蓮亭公) 하윤천(河潤天)23세손

공의 휘는 윤천(潤天)이요 자는 구장(九章)이요 성은 하씨요 관향은 진양이다. 중세에 진천부원군 원정공 휘 즙(楫)이 고려 말에 현달하였고, 조선조에 들어와 문효공 연(演)이 정승의 업적으로 드러났으며, 종제(從弟) 숙(潚)도 휴우로 소문나셨다. 중정공(中正公) 후에 휘 결(決)은 충순위 통덕랑으로 임진난에 순절하셨다. 그 아드님 휘 응회(應會)는 예조좌랑이었는데 종형 영무성(寧無成) 휘 응도(應圖)에게서 수학하고 정한강(鄭寒岡) 선생 문하에 유학(遊學)하였다. 호는 어은(漁隱)이다. 아드님 휘 홍준(弘俊)은 은둔하여 벼슬하지 않았는데, 이 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부의 휘는 일해(一海)요, 선고의 휘는 진한(晋漢)인데, 모두 시묘살이하여 상례를 잘 지키셨음으로 소문났다. 선비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찰방 산두(山斗)의 따님이요, 진양강씨(晋陽姜氏)는 학생 주망(周望)의 따님이다.

1689년에 공이 의령 덕교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크고, 천성으로 사랑할 줄 알아 혼정신성(昏定晨省)과 음식 공양에 법도를 어김이 없었으니, 보는 사람이 모두 효자라 하였다. 20여세에 이재형(李再馨)을 따라 수학하고 강설봉(姜雪峯) 선생 문하에 유학(遊學)하여 근사(近思)와 성리(性理)의 학설을 듣게 되어 이미 옛 사람의 학문을 알고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참으로 알고 참으로 행(行)하는 것을 귀함으로 삼았다. 다만, 부모님이 살아 계시므로 감히 과거 공부를 폐하지는 못하였으나 속된 자들과 동류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셨다. 연거푸 네 번이나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마침내 진사시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르기를 「벼슬길의 득실은 명(命)에 있어 힘으로 구할 수 없는 일이니, 오직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며 몸을 수양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 선비들의 구경법(究竟法)이다」라 하시고 드디어 자신을 위하는 학문에 전심하여 손수 구용(九容)과 구사(九思)의 그림을 좌우(座右)에 걸어, 쳐다보고 자신을 살피는 자료로 삼으셨다.

또, 방심(放心)을 경계하는 시에서 이르기를 「사람이 만약 방심(放心)을 구(求)하려 한다면 그 구함은 자신에 말미암는 것이니 자기 마음 속에서 구해야 한다」하셨다. 배우는 이들에게 보여 주던 시에서 이르기를 「성인도 보통 사람과 함께 다 같은 사람이니 진실로 아는 것을 실천한다면 순(舜)이나 안연(顔淵)이 딴 사람이겠는가?」하셨고, 또 이르기를 「고기가 뜀은 천기(天機)가 살았음이요, 꽃이 핌은 산의 성품 온화함이라. 이 세상에 나는 것은 모두 같은 이치이니 어찌 물물마다 근원이 다르리요?」하셨으니 이 몇 구절 시에서 그 간직하신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형제 다섯 분이 한 방에서 거처하며 책상을 잇대고 공부하여 서로가 매진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부친께서 병환으로 계실 때, 똥을 맛보니 맛이 달므로 낮에는 의원을 맞아 약을 짓고, 밤에는 북극성에 빌어 자신으로 대신해 줄 것을 원하였다. 의원의 말이 산삼이 아니면 효험이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공이 드디어 목욕하고 정성을 들여 글을 지어 석천산에 가서 빌고는 이튿날 산 속을 두루 헤매어 산삼을 찾아 가지고 돌아와 봉양하시니, 병이 드디어 나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감탄하여 그 기이함을 칭송하였다.

1733년 선친께서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실새 공이 또 손가락을 깨어 피를 드렸고, 울부짖음이 심하여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였다. 장사치르고는 묘 아래에 여막을 지어 3년을 마치셨다. 상복을 벗은 뒤에 작은 연못을 동네 남쪽에 파서 연을 심고 자그마한 정자를 짓고 취미를 붙이셨는데 그 정자 이름을 연정(蓮亭)이라 하고 시를 지어 기록하였다.당시의 이름난 선비인 참봉 정상로(鄭相魯)와 진사 이화근(李華根)과 하흡과 강염과 더불어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산수(山水)속에 우유(優遊)하실새 방장산과 경호와 자굴산과 정암산에 흥을 따라 이르러 해지도록 노니시되 술 한 잔, 시 한 수에 흡연(翕然)히 진세(塵世)에서 벗어난 마음을 지니셨다. 만년에 효친(孝親), 충군(忠君), 융사(隆師), 친우(親友), 우형제(友兄弟), 근거실(謹居室)의 도(道) 여섯편을 지어 제목을 몽유습견서(蒙幼習見書)라 하여 자질님들에게 주며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인의(仁義)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다만 영리(榮利)가 있는 줄만 알아 전택(田宅)을 넓힘을 내세에의 계책으로 삼는 것으로 만족해하려 하매, 이로 인하여 사치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 그 어리석음만 기르게 되니, 이것이 어찌 의리를 대대로 익히게 하여 후손에게 물려줄 계책으로 삼는 것만 하겠느냐?」하셨으니 그 말씀이 순순하여 모두 법 삼을 만하도다.

1755년 12월 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7세였으며 의령현 남쪽 상정방 원촌 순풍산 임좌에 장사되셨다. 배위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주서(注書) 수(秀)의 따님이요, 무송윤씨(茂松尹氏)는 사인(士人) 동일(東逸)의 따님이다.아드님 인구(仁龜)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드님은 필원(必源). 필수(必壽)요, 사위는 문화 유당(柳塘)이다. 필원의 아드님은 수우(守禹)요, 필수는 3남을 두었으니 득우(得禹). 치우(致禹). 명우(明禹)요, 수우(守禹)는 5남을 두었는데 통정 희도(羲圖)와 준도(浚圖). 낙도(洛圖) 그리고 감찰 일도(日圖)이요, 다음은 정도(正圖)이며 득우의 계자는 성도(聖圖)이다. 그 밖은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순수한 정성과 지극한 행실이 진실로 천성에서 우러난 것인데, 대대로 내려온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똑같게 되셨으니 일관(一貫)하는 맥(脈)이 붙어 온 바가 있었다. 때문에 살아계실 제는 공경을 다하고, 병환 중에는 정성을 다하며, 상중에는 넑을 잃을 지경에 이르고 또 예법을 다하셨다. 손가락 피를 드리고 시묘살이를 하였음은 이미 전해져 오는 뭇 사람의 말에 나타나 있거니와, 산에 빌어 산삼을 구하심에 신명의 빠른 감응을 얻었음은 인(仁)의 근본이 이미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학문의 공으로 자신을 구제하고 방심을 구하고, 방심을 구하는 교훈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생각과 몸가짐에 스스로 경계하여 그 행동에 이지러짐 없게 하고, 태어나신 바를 욕되게 아니 하였으니 주자가 이른바 효성을 일으키게 하는 자라는 말이 공과 같은 분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궁궐이 멀어 호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정문(旌門)의 은택이 마을에 세워짐이 없으며, 붓을 들어 새길 글을 써서 현양(顯揚)시킨 사람도 없으니, 어찌 아는 자의 한 됨이 아니리요? 며칠 전 후손 재명(在明)이 집안 어른들의 명으로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선조의 실적(實蹟)과 아름다운 행적이 족히 세상에 드러날 만한데 그 선행을 기록한 글이 아직도 없고, 적막한 몇 마디의 말이 다만 삼강록에 실려 있을 뿐이어서 가만히 생각하니 그 빛 잠긴 지 오래 되어 더욱 가려짐이 서글퍼지니 부디 당신은 이것을 생각하오」하기에 내가 생각건대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되어 진실로 부족하다 할 것이나, 선행을 들으면 칭찬하여 주는 것이 내 본래의 뜻이므로,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이같이 써서 자손(慈孫)의 요청에 응하고 뒷 군자의 채택에 대비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