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공(持平公) 하범석(河範錫)25세손

사군자(士君子)가 글을 읽어 당세에 현양(顯揚)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일생을 자연 속에서 마쳐 마침내 초목과 함께 썩어 간다면 어찌 옳은 일이라 하리요? 만약 그것이 도(道)로써 함이 아니라면 그만이나 그렇지 않다면 현양(顯揚)을 어찌 구해야 하지 않으리요? 옛 통정대부 사헌부 지평을 지내신 호는 만포(晩浦) 진양 하공 휘 범석(範錫) 자 사원(士元)은 1704년에 태어났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성품이 굳세었으며 뜻이 항상 원대하여 스스로 소성(小成)에 만족해하지 않고, 학문을 넓히기에 힘써 모든 서적을 건성으로 보아 넘기지 않으셨으므로 문사(文辭)를 일찍 이루어 사리(事理)에 밝았으니, 이웃과 고을에서 모두 공을 헤아려 조정에 설 그릇이요 초야에 묻힐 분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공이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1741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지내신 뒤 177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니, 영조 대왕이 그 나이 칠십이 넘었으나 뜻은 오히려 쇠퇴하지 않았음을 특별히 사랑하여 명하여 이르기를 「80된 임금이 지금부터 정사를 펴려 하니 새로 급제한 하범석(河範錫)에게 직책을 주라」하였기로, 그해에 조봉대부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에 통정대부 사헌부 지평에 승진하였는데 이 일이 영조실록 및 영동읍지, 무주읍지 등에 실려 있다.

공의 윗대에 진천부원군 송헌 선생 원정공 휘 즙(楫)과 진산부원군 고헌 선생 휘 윤원(允源)과 군부상서 목옹 선생 휘 자종(自宗)이 계셔서 대를 이어 고려의 명신이 되셨다. 조선조 명상 문효공 경재 선생 휘 연(演)께서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가운데 아드님 휘가 제명(悌明)이요, 호는 성재(誠齋)요, 벼슬은 예조좌랑이었다. 5세 뒤의 휘 계손(季孫)은 호가 심재(心齋)요, 벼슬이 역시 좌랑이었는데, 당시 당쟁이 극심함을 보고 드디어 벼슬을 사절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부평께서 영동으로 이사하여 사시다가 영동에서 또 무풍으로 이사하였는데 이 분이 공의 6대조이시다. 고조님 휘는 억령인데 장사랑이요, 증조님 휘는 위국(衛國)인데 호가 사양재(四養齋)요, 수 통정(壽通政)이며, 조부님 휘는 정도(呈道)인데 호가 서악(西岳)이요, 공조 좌랑이다.

양세(兩世)가 모두 학문으로 드러나서 대적. 죽계서원에 배향되셨다. 선고님 휘는 필창(必昌)이요, 선비는 제주 고씨인데 필승(必昇)의 따님이다.공이 향년 78세 되던 1781년에 돌아가시어 영동 약목동 을좌에 장사되셨다. 배위는 숙인 연일 정씨요, 윤하(潤河)의 따님인데 묘는 동원(同原) 건좌이다. 또 한 분 배위 숙인 완산 이씨는 세문(世文)의 따님인데 묘는 법곶동 을좌이다.

공에게 불행히도 후사(後嗣)가 없고 묘소도 실전(失傳)된 지 오래였는데, 다행히도 원준(垣準)이 여려 해 수탐한 나머지 증거를 얻어 찾게 되어 이제 백약동 선영 아래 진좌에 이장되고, 춘추의 제향 또한 무궁하게 이어지게 되었다.돌아보건대, 지금 삼강오륜 이 땅에 떨어진 때에 원준(垣準)의 깊은 정성과 멀리 뻗친 생각이 족히 인심을 감발(感發)시키고 승사손(承祀孫) 원칠(垣七)의 정성도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므로, 내 비록 문장에 능숙하지 못하나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써서 이를 묘표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