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공(萬山公) 하황(潢) 26세손

공의 휘는 황(潢)인데 돌아가신지 이미 百여년 이라. 현손 재욱(在旭), 철희(轍熙)가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가 덕성은 있었으나 장수하지 못하였고, 세월이 오래되어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배우고 들은 바가 없으며, 나 역시 20여 년간 생업에 매여서 가정에 대하여 들은 바 십중팔구는 잊었으나 한 두 가지는 잊지 않은 바가 있었으니 기숙하여 두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하고 나에게 청하에 보잘 것이 없는 글이나마 사양하지 못하고, 또 장자의 본생조비가 내 조부의 방손녀라 청을 받아들여 기술하노라

공의 자는 여첨(汝瞻)이요 호는 만산(萬山)이요 진양인이다. 고려 사직공 휘 진(珍)을 시조로 하고 여러 대를 내려와 휘 즙(楫)은 진천부원군에 봉해지셨고 시호는 원정공이다. 휘 윤원(允源)은 진산부원군에 봉해지셨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경재(敬齋)선생 문효공 휘 연(演)이 세종임금을 도와 덕을 펴시고 높은 벼슬에 올라 명재상이 되었다. 다시 여러 대를 내려와서 휘 세호(世灝)는 진사요, 휘 잠(潛)은 군자감주부요, 휘 영유는 통덕랑인데 이 분이 공의 9대조이시다. 휘 진회(晋會), 성익(聖翼), 용득(龍得), 응술(應述)은 고조, 증조, 조부, 그리고 아버님이시다. 어머님은 상주김씨(尙州金氏) 치일(致一)의 따님이다.

은 1802년에 태어났는데 성품이 단정하고 맑고 깨끗하고 또 효도하고 우애하며 양친을 섬기어 어김없이 순종하였으며 세 형님을 부노같이 섬겼다. 학문에 열중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며 시를 지으매 매양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양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이 지나쳤으며 3년상을 마치고 세 분 형님과 함께 자굴산 아래 칠곡마을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은 산수가 아름답고 이웃 마을 또한 어질고 아름다워 자녀를 키우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845년에 44세의 나이로 정침에서 돌아가니 이웃 사람들이 그 재주와 학문으로 오래 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었다.

배위(配位)는 창녕성씨(昌寧成氏) 해서(海瑞)의 따님인데 1810년에 태어나서 1869년에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동래 동쪽 통동곡(通東谷)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공의 묘에 합봉하였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재운(載運)은 백부에게로 출계하였고 차남은 재홍(載洪)이요 3남은 재홍이다. 사위는 전선장(田善章)과 권치대(權致大)이다. 재홍(載洪)의 아들은 석룡(碩龍), 상기(相基), 상우(相宇)요, 사위는 강계영(姜季永)이다. 재홍(載泓)의 아들은 상원(相元)이고 사위는 전용호(田溶鎬)이다. 석룡(碩龍)의 아들은 항용(恒容)이고 상기(相基)의 아들은 중용(仲容)이고 상우(相宇)의 아들은 맹용(孟容), 중용(仲容)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가만히 공을 생각하건대 공의 명성과 도덕이 후손에 있어서 아름다운 바탕이 다시 살아나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인명은 짧고 세월은 길어 남은 것이 없고 다만 여운에 이르기를 「효도하고 우애하고 행실이 뛰어남이 후손에 구전(口傳)되어 오래 남아 있으리라」하였다. 이에 명(銘)한다.

효도하고 우애하고 산수를 좋아하고 재주있으나 단명함은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호암산 기슭에 성분하고 4척 비석에 대략을 기록하여 알리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