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헌공(晩軒公) 하석봉(河錫鳳)26세손

공의 휘는 석봉(錫鳳)이요 자는 주언(周彦)이요 호는 만헌(晩軒)이요 하씨요 진양인이다, 그 선대는 진천 부원군(晋川府院君)원정공 휘 즙(楫)과 진산 부원군 휘 윤원(允源)과 현감 휘 척(縣監 滌)과 청백리 휘 맹질(孟질)과 시직 휘 주(侍直 澍)와 현감 휘 구수(縣監 龜壽)와 별좌 휘 관(別座 灌)은 벼슬로 혁혁하였다. 증 참의(贈參議) 옥계 휘 준의(沃溪준義)와 동지 중추 매헌 휘 숙(同知中樞 梅軒 潚)은 임진왜란 때 의병 공훈으로 드러났다. 증조님 휘는 응래(應來)요 조부님 휘는 필홍(必泓)이요 황고님 휘는 치민(致民)이다 선비님은 창녕 성씨 계청(昌寧成氏 啓淸)의 따님이시오 망도재 흘(望道齋屹)의 후손이시다, 정조 경신(1800)년에 공이 창녕 옥야 내동(昌寧沃野內洞)옛집에서 나시어 부모님을 잘 섬기고 아우님 휘 석려(錫驪)로 더불어 종신하도록 재산을 같이 하시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향교(鄕校)와 고을 재실 등의 규정 조목을 획정(획定)하는데 더욱 힘을 쓰시어 향중(鄕中)모든 서원(書院)의 소임을 맡으시면서 이르시던 곳마다 선비들의 예절을 강하는 것을 일과로 삼으셨다.

별좌공(別座公)3 형제님이 거처하시던 어부정이 있었는데 정자가 오래 되어 황폐하였으므로 종족들과 상의하여 새롭게 중수하셨고 간취재(澗翠齋)를 창건하여 족중자제(族中子弟)들의 공부하는 곳으로 삼으셨으며,추원재(追遠齋)규약(規약)을 만들어 누대 선산의 세사(歲事)에 대비하셨다. 무릇 고을과 동리의 여러 가지 조치(措置)가 왕왕이 공을 기다려 돈독하게 되었다. 73세 되시던 임신(1813)년 10월 24일 별세하셨는데 마연산 사좌원(馬淵山巳坐原)에 안장하였음은 선조 산소를 따르시게 함이었다. 배위는 창녕 성씨 동백(昌寧成氏 東伯)의 따님이시오 불온당 창원(不온堂 昌遠)의 후손이시다 1남 4녀를 두셨는데 남은 휘 태은(泰誾)이요 사위님은 이현찬(李鉉贊) 박영규(朴永奎) 송 원한(宋元漢) 노수화(盧秀華)다 손자는 낙병(洛秉)이다. 증손 대국(大局)은 조졸하였다, 족증손 대규(大圭)가 공의 명망과 실행이 문중과 고을에서 추앙되는 바이므로 나 상직(相稷)에게 명(銘)할 것을 요청한다 대개 공은 나의 외구(外舅)의 세부(世父)이라 내 또 일찍이 그 행의(行誼)에 감복하였던 터이므로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이에 명(銘)한다.

기국이 의젓하고 수법(手法)이 넓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시골에 묻혀 방황하셨도다.

앞시대의 규범을 추술(追述)하여 나쁜 풍속을 바로 잡으셨도다.

익연(翼然)한 정자가 낙동강 가에 있으니

삼우당(三友堂)의 맑은 여운이 공에 힘입어 쇠하지 않았도다.

이에 비석에 글을 써서 뒷사람들에게 모범 되게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