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와공(草窩公) 하계희(啓羲)26세손

내가 젊었을 문숙(文叔) 고금옹(古今翁)의 문집을 읽다가 초와처사 하공(草窩處士 河公)의 유고 서문에 이르러서 무릎을 치고 감탄하여 마지 않으면서 높이 경앙(景仰)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옹(翁)의 성품이 높고높아 남과 기꺼이 사귀어지지 못하였는데 공이 홀로 무엇을 닦았기에 옹에게 이같은 중망됨을 얻을 수 있었던가? 그 말씀에 하였으되『초와(草窩)는 시(詩)에 능함으로 공을에 소문이 났거니와 마음 가짐은 맑고 깨끗하였으며 행실은 곧고 믿음직하여 집안에 거하여도 스스로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분이 시에 능하여 그 시에 능한힘이 이를 이룰 수 있었다』하였으니 여기서 가히 초와의 평새을 그려 낸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그 유고(遺稿)를 보지 못한 것을 한하였더니 근년에 괴산(槐山)에 와서 살며 들으니 공의 후손이 아직 나이 어려서 능히 일을 알지 못하는데 그 종증손(從曾孫) 대홍(大洪) 대균(大均)양군이 그 유고를 경인(1950)년 병화(兵火)중에서도 보관하였다기에 비로소 그 유고를 얻어 읽을 수 있었다. 시(詩)와 글이 맑고 간략하면서도 실상이 있어 고금옹(古今翁)의 말씀이 참으로 거짓이 아님을 알 게 되었다. 공의 외손(外孫) 성(成) 사문(斯文) 기덕(耆悳)이 이유고를 보고 더욱 더 애모(愛慕)하여 양군에게 이르기를『이유고를 오래도록 전하는 것은 안으로는 자네들의 밖으로는 나의 책임이다』하고 나와 함께 그 연문은 깎고 그 틀린 곳을 정돈하여 인쇄에 붙이니 원본과 부록이 겨우 한 권이 되었다. 서문은 옛 것으로 하고 발문(跋文)은 사문(斯文)이 짓게 하고 비갈문(碑碣文)은 나에게 촉탁하니 내 비로 글을 잘하지 못하나 감히 사필할 수 없어 그 보첩을 살펴서 글을 쓰고 명(銘)을 짓노라

공의 휘는 계희(啓羲)요 자는 성첨(聖瞻)이니 초와(草窩)는 그 호다. 하씨(河氏)는 진양인(晋陽人)이니 시조(始조)는 고려 사직 휘 진(高麗司直 諱珍)이다, 중세에 드러난 할아버님은 옥계 휘 준의(沃溪諱 준義)이신데 증 공조참의(贈工曹參議)였다. 참의의 둘째 아드님 휘 흡(洽)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였는데 병자(1576)년 호란(胡亂)때 화친을 반대하셨기 이 사실을 김척암 도화(金拓庵 道和)가 그 묘비(墓碑)에 썼다 휘 자징(自澄) 진휘(晋輝) 도징(道徵) 응두(應斗) 원룡(元龍) 득한(得漢)은 공의 아버님 이상의 조상이시다. 성주 이 문경공 형재 직(星州 李 文景公 亨齋 稷)의 후손 대중(大中)의 따님이 어머님이시다.

공이 정조 신축(1781)년에 나시고 고종 갑자(1864)년 2월 20일에 별세하시어 영사동 선묘 우록(永寺洞 선墓 右麓) 사좌(巳坐)에 장사되셨다. 양천 허운(陽川許運)의 따님이 그 배위시다. 태문과 태무(泰文과 泰武)는 아드님이요 창녕 성 병기(昌寧成炳基)는 그 사위요 기병(基秉)은 손자다. 외손자는 곹 앞에서 말한 성기덕(成耆悳)이다. 대범 대경 대한(大範 大慶 大漢)은 그 증손이요 현손은 재수 재영(在守在永)이다, 슬프다. 공이 별세하신지가 지금부터 년이라 그 밖의 자세한일은 상고할 수 없다. 족보엔 실천함이 독실하셨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실려 있다. 그 유고를 살펴보니 소심재 노영규(小心齋盧龍奎) 모신재 노 기범(慕愼齋盧基範) 서고 하 경일(西皐河慶一)상사유 명균(上舍柳明均)남고 성필준(南皐 成弼駿) 국포 성용한(菊圃成龍漢) 금남 하상조(錦南河尙朝) 죽오 하범운(竹塢河範運) 임와 하경순(林窩河景舜) 기와 하 정룡(棄窩河定龍) 금포 하상진(錦圃河尙晋) 옥은 하석봉(沃隱河錫鳳)옥포 하치일(沃圃河致一)학숙 성경한(鶴塾成慶漢)등이 그 사귀어 노시면서 많은 시문으로 화답한 분으로 되어있다.이에 명(銘)한다.

좋은 말(馬)은 백락(伯樂)을 만나여 값이 더해지고

큰나무는 장석(匠石:고대의 명공)을 만나야 쓰이게 되나니

아 초와공이시여 고금옹이 아니더라면

어찌 기송(杞宋:고징할 수 없는일.)을 면할 수 있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