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호부사 하겸락 선조님 묘소: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도호부사공 하겸락(河兼洛)27세손

진주 서쪽 40리의 마을 여사촌(餘沙村)은 하씨가 대대로 사는 곳이다. 바로 그 서쪽 탕산 기슭 신좌의 새 무덤은 태계(台溪)선생의 9대 종손 도호부사공 휘 겸락(兼洛) 자 우석(禹碩)의 묘인데 돈담에 있었던 것을 이 곳에 이장한 것이다. 공은 무략(武略)과 유행(儒行)으로 당세에 현저하였으므로 그 돌아가심에 아는 사람은 모두 탄식하였다. 포산인(苞山人) 곽종석(郭鍾錫)이 그의 평생의 대개를 적어 묘지(墓誌)를 써서 광남(壙南)에 묻어 영구히 전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그의 아드님 절제사(節制使) 용제군이 울면서 청하여 말하기를 「선친을 잘 아는 사람으로 그대 만한 사람 없어 이미 묘지(墓誌)를 써서 지하(地下)에 징거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외비문(外碑文)을 써 주지 않으려는가? 부디 그대는 이를 도모하소」하기에 내가 서너 번 사양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삼가 다음과 같이 거듭 쓰노라.

하씨는 고려 사직 휘 진(珍)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고려 말에 휘 즙(楫)이 계시어 중대광보국숭록대부 벼슬을 지내고 진천부원군에 봉해지셨다. 호는 송헌(松軒)이요, 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다. 이 분은 휘 윤원(允源)을 낳으셨다. 호가 고헌(苦軒)인데 홍건적을 토벌한 공로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지셨다. 이 분은 휘 자종(自宗)을 낳으셨다. 호가 목옹(木翁)인데 병조판서로 고려가 망함에 병을 핑계로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셨다. 뒤에 셋째 아드님 문효공 연(演)이 귀히 됨으로 좌의정에 증직되셨다. 문효공의 아우님 휘는 결(潔)인데 벼슬이 대사간이었다. 이 분의 6세에 집의(執義) 휘 진이 계시어 문학과 충직으로 현달하였는데, 이 분이 곧 태계(台溪)선생이다. 또 7세 뒤에 휘 시명(始明)이 계시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제사(節制使)에 이르렀는데, 이 분이 공의 조부님이다. 황고님 휘는 한조(漢祖)인데 곧고 청개(淸介)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더 높이 쓰이지 못하였다. 선비 밀양 박씨는 사인(舍人) 기찬의 따님인데, 1825년에 공을 낳으셨다.

어려서 월포(月浦) 이우빈(李佑斌)에게서 글을 배울 때 경(經)의 뜻을 분석함이 예리하여 응대함이 섬세하고 민첩하니, 이우빈이 크게 장래를 기대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부모님 명으로 무사(武事)를 익혀 1853년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수문장 무신 겸 선전관, 훈련원 주부, 판관, 첨정, 어영파총을 역임하였는데, 부임하신 곳마다에서 직책에 알맞은 분이라는 말을 들으셨다. 상관을 예로써 섬기되 조금이라도 옳지 못한 일을 만나면 이치에 의거하여 다투시니, 그 명성이 날로 높아져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역시 옳다 여겼다. 1862년에 거제부사가 되어 공명하게 다스리니, 사람들이 사심(私心)으로 간여하지 못하였다. 당시에 순찰사가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어 어량(漁梁)을 억지로 점령하여 백성들을 병들게 함이 종전부터 관례가 되어 왔었다. 공이 부임하여서는 그들을 꾸짖고 매질하여 쫓아 보내니, 백성들은 기뻐하였으나 고과(考課)에는 전(殿:하위의 성적)이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해어진 침석에 주무시고 거친 밥을 잡수심이 옛날이나 다름없었으며, 육도삼략을 연구하여 침식을 잊으신 적도 있었다. 얼마 후에 말씀하기를 「병법을 말하는 자 그 글이 바다같이 많아도 충(忠)자 한 자가 빠진 듯하니, 이것은 그 근본을 빠뜨리고 말(末)에 급급해 하는 것이라」하시고 이에 고금의 충신, 의사(義士)가 자신을 잊고 몸을 나라에 바친 사적을 수집하여 책을 만들어 이것을 장수(將帥)된 자의 제일심법(第一心法)이라 하셨다.

1866년에 경기 연안에 서양 배가 침입하였으므로 임금이 방어하기를 명령하니, 공경(公卿)들이 공을 천거하여 순무종사(巡撫從事)로 삼아 이용희(李容熙)를 보좌하여 양화(楊花) 나루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는데, 이공(李公)이 중히 여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서 결정하였으며, 파발꾼, 순라꾼들 까지도 모두 기강이 있게 되었으므로, 도적이 물러갔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공에게 장수의 재략이 있음을 알 게 되어 발탁하여 함경중군(咸鏡中軍)을 제수하였는데, 순찰사 이흥민(李興敏)이 어려운 일로써 시험하면 곧 판단을 내리니 이공이 여러 번 조정에 알렸으므로, 1870년에 신도진 첨사를 배수하였다

첨사가 되어 군사를 굳세게 교련하여 변방에 위엄을 세우고 화매(和買)를 금지하며 엄하게 함으로써 게으름을 진기(振起)기키고 청렴으로써 간사함을 그치게 하였다. 대원군(大院君)이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서녘 땅은 이 사람을 얻었으니, 호인(胡人)들이 감히 동쪽으로 와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871년엔 강계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다. 이 곳에 이회재선생의 서원이 있었는데 서원은 철폐되고 강당만이 남아 있었다. 경사(京司)에서 꼭 그것마저 철거하려 하여 독촉이 날로 심하니, 공이 개연히 말씀하기를 「여기는 옛날 여진 땅이었던지라 백성들이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의 인륜을 알 게 된 것은 선생이 이 곳에 거하셨기 때문인데, 지금 그 유적지를 버린다면 이것은 이 땅을 버리는 것이다」하고 끝내 그 의론을 보고하였으므로, 강당이 이 때문에 온전하게 되었다.

또, 새 집을 중건하고 서재를 세우고 전지(田地)를 사서 넉넉하게 하여 그 고을 선비들로 하여금 선생의 가르침을 강론하고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게 하였다. 큰 흉년이 든 해에 변방의 백성들 중 서로 이끌고 국경을 넘어가는 자가 날마다 수천 명이 되므로, 공이 그것을 막아 초사(草舍)를 지어 살게 하며, 관(官)의 돈과 성향미(城餉米)로써 구제하시니 무릇 살 게 된 자가 6700명이었다.강계부(江界府)가 요동(遙東) 경계와 이웃하여 향마적이 심히 창궐하여 장차 강을 건너와 노략질하려 하므로 공이 방략(方略)을 세워 위엄을 보이니 경내(境內)가 무사하게 되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려 할 때 암행어사가 군민(軍民)들의 임기를 연장하여 달라는 원(願)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3년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국은에 보답할 일을 생각하여 군사를 교련하고 정치를 잘하여 위엄과 은혜가 함께 베풀어졌으며, 적을 방어하는 데 엄히 법도를 세우니 도적들이 감히 경내를 침범하지 못하였고, 관(官)에의 빚을 탐감하여 길이 고질을 혁파하였으므로 변방의 백성들이 이로 인하여 편안하여졌습니다」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일렀다. 공은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더욱 백성을 아끼고 어루만지기에 힘썼는데, 얼마 후에 조정이 일변(一變)하여 시기하는 자들이 어울려 허위날조하니 신응기(申應箕)가 새로 기영(箕營)에 부임하여 공의 고과(考課)를 하등(下等)으로 매겼으므로 면직(免職)되었다.

이에 공이 미련 두는 빛이 없이 호연히 돌아가실새 학사(學士) 심동헌(沈東獻)이 공과 알고 지냈던 터인데 그 때 곧 서쪽 지방을 안찰하러 가다가 길가에서 만나기를 청하니, 공이 사례하며 말씀하기를 「밀부(密符: 왕이 내린 병부)를 찬 것을 보면 비록 전직(轉職)된 사람일지라도 감히 사사로이 만날 수 없는 일이오」하고 지나다가 신응기를 만나 보고 백성의 병폐를 마땅히 고쳐야 할 일을 극구 말씀하시니, 신(申)공이 시무룩히 말하기를 「면직을 당하여 기꺼이 나를 보고 파직되어 가면서 오히려 백성을 측은히 여김을 오직 공에게서만 보겠소」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출입을 하지 않고 위중(威重)을 기르시며 한결같이 선대를 받들고 자녀를 가르치며 형제에 우애하고, 일가들과 화목히 지내는 것을 일삼으며 어진 사대부 대접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였다.

국가에 외적의 침입이 있어도 항구를 닫지 아니하니, 항상 걱정하고 탄식하던 끝에 글로써 정부에 고하여 변란에 대응하는 대책을 진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장수를 뽑고 능한 사람에게 맡기며, 군사를 훈련하고 규율을 세우며 적을 헤아려 승리를 기해야 한다 함이었다. 그 글이 정부에 들어갔으나 회보가 없었다. 더욱 굳은 의지로 당세에 뜻이 없어 조용히 주자(朱子)의 글을 연구하고 성리서(性理書)의 요점을 뽑아 모아서 깊이 완미(玩味)하며 몸소 익혀 항상 말씀하기를 「지금의 학자들은 파벌이 많아서 기기(氣機)가 장왕(張旺)한데, 다만 주자의 이치를 주장으로 삼는 것을 법 삼아야만 필경에 옳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1902년에 기로사에 있은 은덕으로 가선대부에 승진되었다.일찍이 스스로 호를 두남(斗男)이라 하였고 만년에는 그 집 이름을 사헌(思軒)이라 하였다. 1904년 2월 9일에 백곡의 우거(寓居)하던 집에서 돌아가셨다. 배위 정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아드님 네 분을 두었는데 큰 아드님 용제(龍濟)는 벼슬이 격포진 첨절제사였다. 사위 한 분은 전주 이병하(李炳夏)요, 둘째 셋째 넷째 아드님은 용학(龍鶴). 용덕(龍德). 용찬(龍撰)이다. 이에 명(銘)한다.

세상에 드문 기질로 태어나 간성의 재격(材格)되셨네.

예를 좋아하고 시에 돈독한 분이셨네.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에는 한 분의 범여이시요,

백성의 주림에는 천 분의 부처이셨네.

어진 이를 높이시고 바른 도(道)를 지키셨으며,

변방의 풍속을 궤도(軌道)로 인도하셨네.

시대가 평온하매 장차 그 쌓은 덕을 펼 듯하였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지매 다시 묻지도 않았으니,

아마도 이름바 운명이었음인저! 큰 종의 소리요,

우러러 볼 서성(曙星)이로다.

광택은 가슴 속에서 꿈꾸고 두터운 흙 속에 닫혔으니,

천년토록 인멸하지 않을 것은 오직 그 정신일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