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절제사(僉節制使) 하승낙(河承洛)27세손

누대로 여사리(餘沙里)에서 살아 온 집안 하공의 휘는 승낙(承洛)이요, 그 자는 우범(禹範)이요, 진양(晋陽)은 그 관적(貫籍)이다. 상조(上祖)는 고려(高麗)에서 비롯되었는 바, 휘 진(珍)은 사직(司直)벼슬을 지내셨고, 송헌 원정공 휘 즙(楫)은 명성과 업적을 혁혁히 드러내셨다.휘 윤원(允源) 및 자종(自宗)은 명절(名節)과 훈적(勳績)을 빛내셨다, 조선조에 와서 휘 결(潔)은 사간원(司諫院) 대사간이었다, 장하신 태계공(台溪公)의 휘는 진이요 자는 진백(晋伯)인데 곧은 기운이 대단(臺端)에 울리었기에 유림이 그 문학을 추앙하였다 휘시명(始明)은 호방(虎榜)에 올라 토포(討捕)하여 삼척(三陟)을 가라앉히었다. 휘 한조(漢祖)는 겨우 출신하여 강직함으로 드디어 낙척(落拓)하였다. 이 두 분이 공의 조부와 황고이시다. 선비(先비)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인데, 1827년에 공을 여사택(餘沙宅)에서 낳으셨다.

젊어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함에 화열한 용모요 검소한 복색이었다. 장성하여서 궁마지술(弓馬之術)을 익힘에 굳센 용기가 백부(百夫)중 특출하였다. 32세에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40에 처음 녹(祿)을 받으셨다. 포(浦)를 따라 인(仁)이 진(鎭)을 덮었으니 어찌 기록(騏록)이 달리는 것만이 족한 일이었겠는가? 무선(武宣) 및 총부(摠府)에서 훈원(訓院) 주부를 역임하신 바 가시던 곳마다 명성이 자자하여 장관이 다투어 추대하여 거제성(巨濟城)에 분부하니 한결같은 생각이 민폐 덜어 주는 데 있었다. 자기 녹(祿)을 덜어서 늙은이를 대접하고 절식하여 불쌍한 이를 구휼하였다. 재계(齋戒)하여 성묘(聖廟)에 제사하고 성황(城隍) 및 사직(社稷)에도 그같이 하였다. 아우성치던 흉년 백성들이 기뻐하고 마침내 그 덕에 배불렀다. 만기가 되어 떠날 적에 주민들이 길을 막았다.

임금의 은혜가 빛나고 밝아서 특별히 광주막(廣州幕)으로 가게 하다가 돌려 고산추(高山錘)로 가게 하였으나 풍토가 좋지 못함을 근심치 아니하고 자혜로이 피곤한 부하를 무마하고 예양(禮讓)으로 민속(民俗)을 교도하시니 누가 당신을 미덥지 않다 하였으리요? 서방(西方)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고향으로 돌아가 검소한 생활을 만족히 여겨 좁은 초가집에 사시면서 몸에 비단 옷을 입지 아니하고 기꺼이 채소 음식을 잡수셨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계 효도하여 상중에 애통하고 제사에 정성을 바치셨다. 형님 섬김을 부모님 섬기듯 하고 제매(弟妹)들과 화목하게 지내셨다. 별도 소득이 있으면 종중 수입으로 삼으셨다. 향당과 종족에 처함을 하열하고 기껍게 하셨다.

평생에 나쁜 일을 아니 하였으니 하느님이 복을 주실 것이거늘 독자(獨子)아드님이 젋은 나이로 세상을 떠서 슬픔이 매우 컸다. 오직 공은 순변지리(順變之理)를 생각하고 항상 우척(憂척)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셨다. 춘추 67에 별세하여 명석(鳴石)골 경좌(庚坐)에 안장되셨다. 강씨 시준(時濬)의 따님이 공의 부인이다, 용희(龍義)는 그 아드님인데 아침 이슬같이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편방(便방)에 1남 1녀가 있으니 용수(龍秀)와 사위 강찬조(姜讚祚)이다, 용희(龍義)는 따님 한 분 뿐 인데 사위가 연일정씨(延日鄭氏)다 당형(當兄) 절제사(節制使)에게 아드님 있어 좋은 가르침으로 착한 길로 인도하였으므로 남은 경사가 면면(綿綿)하리니, 공은 가히 눈으 감으실지라 용수(龍秀)가 와서 명(銘)을 구하매 명한 사람은 곽종석(郭鐘錫)이다. 절제사 용제(龍濟)가 좋은 글씨로 그 돌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