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남공(濟南公)하경락(河經洛)27세손

내가 다산의 곽 선생문하에 늦게이르렀기로 선생에게 돌아가신 뒤 오직 선배 여러 분을 따라 그 서론(緖論)을 듣게 되어 마치지 못한 공부를 이어 나갔는데 그 중 스승의 학설을 독실하게 믿고 이를 오래토록 붙들어서 엉긴 듯 움직임이 없어 더불어 말로(末路)를 의지할 분으론 늘 제남공(濟南公)을 추대하였다. 또 공은 사시던 곳이 선사(先師)의 고향이므로 옛 유적을 수습하고 강론 하시던 곳에 정사(精舍)를 창건하는 등 크고 작은 일에 공과 더불어 함께 주선하지 않음이 없었는 바 대개 나만 그렇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 지방의 선비가 다 공에 힘입어 공에게 인도(引導)의 중망을 걸었던 것이다.

아, 공이 돌아가신 지 어언 1기(紀:12년)가 넘고 제자들의 미약해짐이 더운 심하여졌으니 사부(師傅)의 강론하지 아니함이 마침내 어디로 돌아갈 것인고? 아, 여기에 이르니 비록 공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들 될 일인가? 공의 성은 하씨요, 휘는 경락(經洛)이요 자는 성권(聖權)이요 제남(濟南)은 호이다 관향과 사시던 곳이 모두 진양인데 남사(南沙)는 그 세장(世庄)이다 고려 시대에 송헌 원정공 휘 즙(楫)이 계셨고 조선조 중엽에 집의(執義)벼슬을 지내신 태계 선생 휘 진(진)이 계셨다. 이 분의 막내 아드님 휘해관(海寬)은 호가 일헌(一軒)이며 미수(眉수)허목(許穆)의 문인이신데, 공은 이 분의 종손이다. 증조님 휘는 범행(範行)이요, 조부님 휘는 복명(福明)이다. 황고는 한철(漢澈)이요, 호가 이하(이下)인데 일찍 가범(家範)이 있으셨다. 이 분이 안동 권씨를 배위로 맞으셨으나 소생이 없어 다시 전주 최씨 영순(永淳)의 따님을 맞아 1876년에 공을 낳으셨다

어릴 때부터 재예와 의도(義度)로 어른들이 각별히 사랑하는 바가 되었다. 열 여섯 살에 가친을 모시고 의령의 향시에 응하기 위해 가는 길에 마침 큰 물이 밤에 들이 닥쳐 여관이 물에 잠겨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는데 가친께서 이에 앞서 여관을 옮길 것을 명하였으므로 부자(父子)가 온전하게 되셨으니 자못 기이한 일이었다. 이듬해 단성의 여택당(麗澤堂)으로 가서 만성(晩醒) 박 선생을 따라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어린 나이였음에도 능예(能譽)로 장려를 받으셨다. 만성 선생이 돌아가시자 다시 물천(勿川)김공을 선생으로 모신 지 여러 해 만에 다시 후산(后山) 허 선생을 뵈어 한포(寒浦)의 심리(心理)의 설명을 듣고 분명히 회통(會通)한 연후에 또 우리 곽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더욱 배운 바의 어긋나지 않았음과 지극한 도를 다른 데서 구하지 못할 것을 아시게 되었다. 그 학문을 함에는 정성을 쏟아 힘을 다하여 아침저녁으로 쉬지 않고 정진하였는데 혹 조용한 순중의 절간을 찾아 연구하고 혹 강론하는 자리에  나아가 질문하였다. 더욱 논어에 힘써 스스로 수십 년을 기약하고 날마다 외웠으며 한 권을 마치면 자신을 반성하여 일용 생활에서 하나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징계하여 과감하게 고쳐 나갔으니 늘 보시던 자경첩(自警帖)은 실로 평생의 원부(元符)가 되었다.

1905년 겨울에 나라가 일본한테 위협당하여 조약을 맺는 변(變)이 있어, 곽 선생이 부름을 받아 서울로 갈새 공이 따라가심에 유림들의 여론을 모아 장차 각국의 공관과 담판할 때의 자료로 삼으셨는데, 서울에 이르니 이미 조약이 이루어졌으므로 드디어 선생을 모시고 들아오셨다.당시 허 선생은 지난해에 이미 돌아가셨고 김 선생도 얼마 안되어 별세하였으므로 공의 깊은 회포는 나라는 약해지고 사람은 없어지는 때문으로 서글퍼져 항상 탄식하여 능히 억제하지 못하는 듯하였던 중 출입하고 의지할 데는 오직 곽 선생뿐이요 다른 데가 없었다. 그 뒤 곽 선생이 별세하고 이동서당(이東書堂)이 낙성되었으므로 그 담장 옆에 집을 짓고 날마다 그안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선생의 유서(遺緖)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셨다. 그 말씀에 이르기를「나라는 망할 수 있으나 도(道)는 망할 수 없는 것이니 고인(古人)이 어찌 이도를 그만둘 수 있었으리요? 슬픔에는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나 이는 오히려 한 때의 쓰라리미요, 도가 망하면 천 년의 걱정인데 이 도는 반드시 이(理)를 주로 하는 것을 급무로 삼아야 한다」하셨고 또 말씀하기를「성현들의 성현이 되는 소이와 이단의 이단(異端)이 되는 소이는 다만 하나의 심(心)자 속에서 다투어지는 바 마음이 귀하게 되는 바는 그 본체(本體)의 주재(主宰)가 곧 이(理)이기 때문이다 이(理)를 주로 삼는다는 것은 오른 것을 구함을 따름이니, 마음과 일과 가정과 국가에 천하가 한 가지인 것이다. 지금 천하가 야만과 금수로 되어 가는 것은 그 근원을 연구해 보면 이(理)가 밝지 못하고 기(氣)가 그 주재의 권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라고였다.

대개 공께서 도(道)를 공부한 것이 매우 이렀고 그것을 믿어 의혹하지 않으셨으며 당시의 덕망 높은 분들을 차례로 뵈었고 두루 명망 있는 벗을 사귀었으며 항상 그 추향(趨鄕)하는 바를 보고 진퇴(進退)를 결정하였으며 차마 속임수로 명예를 취하지 않으셨다 만년에 이르러 누구라도 선사(先師)와의 연원의 계통을 침노하는 일이 있으면 발발(勃勃)하게 일어나 한사코 양보하지 않았다. 오직 그 도량이 넓고 겸손하게 자신을 낯추는 것으로만 수양하여 사람을 대함에 화경(和敬)함을 잃지 않으셨으므로 끝끝내 남에게 원망을 사는 일이 없어 사람들이 대방(大方)의 광범(匡範)으로 추앙하였다, 자신을 수양함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고 집안에서 행하심에 예법을 늦추지 않으셨다, 모슴이 헌칠하고 말씀이 조리 있어 뵙게 되면 그 학문의 효험임을 알 수 있었다,

공은 진주 성태리에서 태어났는데 역시 태계 선생이 자리잡은 곳이다. 중년에 남사로 이사하였는데 만년에 중풍으로 고생한 지 5. 6년에 가세가 기울어 족인들의 의논으로 태동(台洞)으로 돌아가 72세되던 1947년 12월 28일에 돌아가시어 이듬해 정월에 가까운 선친의 묘 아래에 장사되셨다, 뒤에 그 배위 재령이씨(載寧李氏)를 합장하였다. 이씨 부인은 모은(茅隱)선생의 후예이요 승규(承奎)의 따님인데 공보다 3년 앞에 태어나서 공보다 4년 뒤에 돌아가셨다. 세 아드님을 두셨으니 용진(龍震) 용운(龍雲) 용문(龍雯)이요 사위 한 분은 안동 권상병(權相炳)이다 용진의 아들은 정규(丁逵)요 사위는 도형락(都亨洛)이며 용운의 아들은 태규(泰逵) 승규(升逵)요 사위는 김홍식(金烘植) 허남경(許南京) 권삼용(權三容) 민영식(閔泳植) 박복재(朴福在)이며 용문의 아들은 대규(大逵) 재규(在逵) 준규(駿逵)요 사위는 이양호(李良浩)요 공의 사위 권상병의 아들은 준용(俊容) 정용(定容)이다. 그 나머지는 아직 어리니 다음에 기록함이 옳으리라.

공께서 돌아가신 후 남기신 시문 제남집(濟南集) 10여 권이 있는데 그 아드님이 내가 공과 잘 지낸 구연(舊緣)이 있다 하여 그 교열(校閱)을 부탁하므로 정의상 이미 외면할 수 없었다. 정산(晶山)이현덕(李鉉德)은 공의 매서(妹서)인데 실제로 이 문집을 편집하고 그 행장을 지었으니 공은 가히 의탁할 곳을 얻었다 할 것이다. 이에 다시 그 큰 일만을 추려서 비명을 삼아 묘에 쓰노라,

중후하고 깊으시며 빼어나고 높으셨네 .

신의는 독실하였고 지킴은 확고하였네

한결같은 이종(理宗)의 순수한 신하로 북문의 열쇠를 맡을 만하였네,

쇠퇴하는 세상에서 엄연히 위엄 길러 수호하심이 산중의 초목에 까지 이르렀네.

유림들의 앞길이 날로 막힘이여! 저승을 생각하나 일으키기 어렵네.

이 한 마디 징고되어 백대에 전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