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계공(小溪公) 하종락(河鐘洛)27세손

고 진양 하군의 휘는 종락(鐘洛)이요 자는 명국(鳴國)인데 대대로 진주 북쪽 성태동(省台洞)에서 살아 왔다. 태계(台溪)선생의 후손인데 스스로 호를 소계(小溪)라 하였으니 그 뜻 붙임이 깊으셨다. 공은 모든 일에 관여하고 계술하는 데 몸소 스스로 담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경류재(慶流齋),세덕사(世德祠)의 창건과 족보의 속수(續修)선대 묘소 석물의 개수와 제각의 보결 등에 많은 공적이 있었고, 태계정사(台溪精舍)에 해마다 선비들이 모여서 전채(奠采)를 행하고 강학(講學)하는 규범에 그 보람을 끼침이 시종(始終)많았다. 앞서 태계 선생의 증손 약헌공(約軒公) 용제(龍濟)가 벼슬과 아망(雅望)으로 드러났고 그 가까운 소종(小宗)에 제남처사(濟南處士) 경락(經洛)이 있어 행실과 문학이 한 지방에 드러났으니 군이 듣고 보아 복종해서 섬겼다.

또, 나아가 동종 명석(同宗名碩)인 회봉 겸진(謙鎭)문하에 의지하여 돌아갈 바를 삼았는 바, 그 학문이 한결같이 곽면우 빙군(郭免宇 聘君)에게서 나왔으니 추향(趨嚮)하는 길이 이미 요연(了然)해서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군이 젊었을 때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으신 터에 봉양하기에 급박하여 공부도 뜻대로 하지 못하였다. 차차 가계나 나아졌을 때는 아버님이 중풍으로 일어나고 누우심을 자유로 못 하였으니 약제 시탕으로 3년 동안 곁을 떠나지 아니 하였다. 계속해서 부모님 상을 당해서는 6년 동안 시묘와 성묘를 일과로 삼아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였다. 그 본분에 힘씀이 이 같았으니, 능히 행하고 남은 여가로 공부함에도 족함이 있었음은 그가 지혜와 성력을 능히 겸비한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년에 가서는 거처하던 방에 분음서사(汾陰書舍)라 써 붙이고 대나무 숲 깊은 곳에서 글 읽는 소리를 끊지 않았으니, 가히 그 즐기던 바가 어디 있었는가를 알 만하다. 사람됨에 있어 풍채가 아름다운 데다 담론을 잘하였으며 거(居)함에 겸손하고 발(發)함에 화흡하여, 매양 유림(儒林)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윗자리에 추대하여 우러러보고 그 환심을 얻지 않는 때가 없었다. 진주 동쪽에 용강서당(龍江書堂)이 있는 바 우리 선대 동강(東岡)문정공(文貞公)을 위하여 지은집이어서 사림이 관여하는 바인데, 군이 여러 해 동안 임원이 되어 별세하도록 해임되지 아니하였으니, 그 공중의 평론이 애석하에 여겼음을 가히 알 만하다. 하씨의 선대는 고려 사직 휘 진(珍)으로부터 시작되었는 바, 송헌 원정공 즙(楫)과 고헌 진산군 윤원(苦軒晋山君允源)과 목옹 증 좌의정 자종(自宗)이 모두 중세에 드러난 분이시다. 목옹의 아드님 대사간 결(潔)은 조선조 명상이신 문효공 연(演)의 아우이다. 6세를 내려와서 집의 진(진)이 계셨는데, 이 분이 곧 도덕과 문학으로 종천 서원사(宗川 書院祠)에 봉향되시 태계 선생이다.

선생의 둘째 아드님 일헌(一軒) 해관(海寬)은 미수(眉수) 허 문정공(許文正公)문하에서 이름을 드러냈는데, 이 분이 군의 8대조가 된다. 고조 휘 식(식)은 부호군(副護軍)이며 증손 휘 범수(範洙)는 호가 임정(林亭)이며, 조부의 휘는 제명(濟明)이요, 아버님 한홍(漢洪)은 호가 괴헌(槐軒)이다. 내 일찍이 그 분의 묘비문을 지었다. 어머님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태환(台煥)의 따님이다. 군이 1895년에 출생하여 75세가 되던 1969년 10월 21일에 별세하여 9일 장으로 덕곡 소태 후강(小台後岡) 자좌(子坐)에 안장될 때 원근 친구들의 조상자가 수백 명이었다. 배위는 김해허씨(金海許氏) 근(根)의 따님이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용흥(龍興) 용태(龍泰) 용빈(龍彬)은 아들이요, 김녕 김채권(金采權) 진양 정태기(鄭泰基) 의성 김도기(金道基)는 사위요, 보중(甫重) 석중(碩重) 원중(遠重) 인중(仁重) 대중(大重) 세봉(世鳳) 국봉(國鳳) 익봉(翊鳳)은 손자다. 도기(道基)는 나의 종형의 손자다. 내 군과 더불어 초년에 사귀어 알고 만년에 사가의 좋은 인연을 맺어 군을 아는 데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터이다. 이제 군이 이미 몰하고 군의 아들이 군의 남긴 책자의 교정과 편찬을 나한테 부탁하였고 또 인해서 묘갈문(墓碣文)을 책임지우니, 내 또한 어찌 아니 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대개를 엮고 끝으로 명(銘)한다.

읍양(揖讓)으로 제사를 받들고 자연 속에서 읊고 노닐어 이로써 명(命)을 잘 마쳤으니,

어찌 관락(寬樂)함이 아니겠는가? 전형(典刑)이 적적(寂寂)하니

삶은 중하고 죽음은 허망하였음이로다.

그 흡족하지 못한 바는 뒤에 죽는 이의 정(情)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