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贊成公 하숙용(河淑容)29세손

곡성읍 동쪽 천마산 서쪽 줄기에 오리실등이 있고 남쪽 기슭 해좌(亥坐) 언덕에 여러 봉우리가 있어 촌락같기도 하고 덩실한 집과도 같은데 이는 곧 진주하씨 관찰사공파인 증가선대부 좌찬성 휘 숙용(淑容)을 비롯해서 남원 금지의 진주하씨 세장지(世葬地)이다.

어느날 그 증손인 태군(泰君)이 걱정스러이 문중(門中)의 여럿과 의논하고 바로 묘도를 표지하기로 하고 그의 큰 조카인 봉수에게 족보를 싸들고 내게 보여 말하기를 우리 선조들의 행적(行蹟)이 고을 선비들에 칭송되었고, 집안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나 햇수가 이미 오래 되었고, 또한 모든 것이 미미하여 아직까지 비표(碑表) 하나 갖추지 못했으니 묘도에다 돌 하나를 세워 오래 전해지기를 도모하고 또한 의물들을 고루 갖춘 세장지를 만들고자 했으나 오래토록 겨를을 갖지 못했음이라.

이제 불초(不肖)가 선고의 유지(遺志)를 받들고 종중(宗中)의 바램에 당하여 비용을 마련하고 힘을 다하여 묘지를 개척하고 넓혀서 세상지를 구축하고 바야흐로 작은 비갈을 세우려 함에 선생께 경건한 마음으로 그 비문을 지으라고 청함이 극진하여 내가 삼가 살펴보니 진주하씨는 삼한시대 사족(士族)으로부터 나와 고려시대의 사직공 휘 진(珍)을 시조(始祖)로 하여 여러 대 내려와 즙(楫)은 문하찬성사의 벼슬을 살아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보국 승차하고 진천부원군에 봉해져서 시호가 원정(元正)이요, 이 분의 아들 휘 윤원(允源)은 대사헌으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고, 이 분이 목옹공(木翁公) 자종(自宗)을 낳으니 봉익대부 병부상서였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 하고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버리셨으니 이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의(忠誼)라. 셋째 아들 연(演)이 조선조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문효(文孝)라 시호되었고 문종묘(文宗廟)에 배향되어 귀하게 되셨으니 대대로 덕업(德業)을 쌓고 문장(文章)으로 날리며 빛나는 가문(家門)을 키워가니 한 나라의 손꼽히는 씨족이 되었고 청사에 길이 빛나게 실려 있니라. 휘 형(泂)은 목옹공의 둘째 아들로 재령군수와 풍해도(현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시니 이 분이 파조(派祖)가 되신다.

육대를 내려와 휘 윤해(潤海)는 감찰벼슬에 증직으로 이조참판이며 낙남조(落南祖)이시니 이 밑으로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고 여러 대를 내려와 통덕랑(通德郞) 휘 천순(天順)과 통덕랑인 휘 한창(漢昌)과 효도(孝道)로써 통훈대부 사헌부감찰에 증직되고 정여(旌閭)와 비(碑)를 받은 휘 인채(仁采)와 증직으로 승정원 좌승지인 휘 명신(命臣)과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휘 광엽(光燁)이 공의 현조, 고조, 증조, 조부와 아버지이시다. 좌찬성 휘 숙용(淑容)이 가선대부 동지겸 오위장 휘 재복(在福)과 재녕(在寧)을 낳고, 재복은 병호(柄鎬)를 낳고, 병호는 태천(泰天)을 낳았으니 모두 순서대로 세장지에 차례로 묘를 썼다.

대저 자손들이 선조를 사모함에는 성묘하고 제사모시는 일이 진실로 다할 바가 없는 바이다. 그러나 전해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뜻을 이어가고 사적을 서술함이 효의 지극함이라고. 오늘날 진주하씨가 고을의 양반 서열에 들어 있음은 오로지 조상들의 음덕 때문인데 십여 대를 지내오면서 어느 한 사람도 유지와 사적을 이어서 서술하지 아니 한다면 그 성(盛)하고 쇠(衰)함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그 현손인 서울대학교 학훈단장(學訓團長)이었던 육군대령 봉수(鳳秀)가 이것 때문에 분발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여러 자제들과 일가 젊은이들은 이제부터 맹세코 힘써 행하며 열심히 배워서 당당히 그 이름을 세상에 떨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저기는 아무개의 선산(先山)이요, 저기는 아무개 집안의 세장지라고 이르도록 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신 선조(先祖)들의 영혼들이 자못 기뻐하시며 오르고 내리고 하시리라. 그렇지 아니 한다면 비록 넓은 묘소와 덩실한 비석을 세워놓고 풍성한 제물을 차례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만족하다 하겠는가」한다. 이 말로써 삼가 기를 삼노라.
죽계후인 안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