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공(郡守公) 하재구(在鳩)30세

군(君)의 휘는 재구(在鳩)요, 자는 자숙(子淑)인데, 스스로 호를 소주(小洲)라고 하였다. 성은 진양 하씨인데, 조선 초기의 이름난 정승 문효공 휘 연(演)의 후예인데, 중세에 창녕으로 이사하여 대대로 살았다. 증조님 휘는 학손(學遜)이요, 조부님 휘는 서인(書仁)이요, 황고의 휘는 경원(慶源)이다. 이분은 통정대부에 증직되셨다. 선비는 창녕 조씨 학림(學林)의 따님이시다. 군(君)은 고종 갑자(1864)년 7월 18일에 태어났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성품이 치밀하여 총명함이 있었으되 젊어서는 가난하여 공부할 수 없었는 바, 동료들이 그 뛰어난 자질을 아껴 많이 돌보아 주었고 군(君)도 분발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기로, 마침내 성공하였다. 열 예닐곱 살에 기국이 이미 범상하지 않아, 어느 날 어떤 일로 감영(監營)에 가서 고을 원(員)들의 잘못된 정사를 들추어 감사에게 면질(面質)하였더니 감사가 능히 감당해 내지 못하고 달래어 돌려보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매우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일찍이 운재미선(運載米船)을 감독하여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구포(龜浦)에 이르러 배가 뒤집혀 실었던 양곡이 썩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군(君)은 얼굴빛을 변함 없이 사람들을 모집하여 양곡을 헐값으로 모두 팔게 하여 변제(辨濟)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생각함을 깊이 하여 일에 임하여 결단을 내리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으므로, 마침내 거만(鉅萬)의 부자가 되었으나, 남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하였다. 고종 정유(1897)년 세무 주사(稅務主事)로서 홍릉 차비관(洪陵差備官)을 맡아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경자(1900)년에 지방관으로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군(君)은 매사에 정민(精敏)하고 밝아서 부임한 후로 힘써 백성을 병들 게 하는 일을 찾아 고쳐 나가는데, 그 고을에 민고전(民庫田)이 있어서 해마다 3백여 석을 거두어 비상(非常)한 때에 대비하고 백성의 힘을 펴게 하였으나, 전임 수령들이 많이 횡령하여 다만 빈 장부만 남아 있으므로, 군(君)이 상사(上使)에게 아뢰어 모두 추심하여 창고에 되돌려 쌓게 하였다. 고을이 바닷가에 인접하였으므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백성이 많았는데, 교활한 무리들이 늘 때를 틈타 침범하여 괴롭히므로, 군(君)이 방금(防禁)을 설치하여 고기 잡는 곳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니, 어민들이 이에 힘입어 소생하게 되었다.

기타의 정치도 이와 같이 함이 많았으므로, 이웃한 네댓 고을에 수령의 결원이 생길 때면 반드시 군(君)으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니, 임기를 마치고 돌아감에 비를 세워 사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신축(1901)년에 현풍 군수(玄風郡守)가 되었는데, 그 고을엔 뿌리 깊고 세도 있는 문중들이 많아 화협하기가 어려웠으나, 군(君)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아첨하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그 정치는 잘 되고 원성 또한 적었다. 이듬 해 비안 군수(比安郡守)에 제수하는 명첩(名帖)이 내렸으나 마침 조모님 승중상(承重喪)을 당하였으므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상제(喪制)를 마침내 조경단(肇慶壇) 역사의 감역(監役)으로 부름을 받아 공로가 있었으므로, 통정대부에 승진되었는데, 이로부터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졌으므로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군(君)이 풍부한 기국과 많은 재물을 지녔으나 그 재능을 펴지 못하여, 자연의 아름다운 곳을 찾아 집을 짓고 동산을 꾸밈에 정교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으므로, 향인(鄕人)과 과객(過客)들이 놀러 가지 않은 날이 없을새, 모두 맞이하여 대접하고, 때로는 시회(詩會)를 열어 스스로 그 비용을 부담하였으며, 명덕제(明德堤)가 준공됨에 군(君)이 향인(鄕人)들을 모아 낙성연 시회를 개최하니, 회중 사람들이 그 시권(詩卷)을 나에게 보내어 평가해 주기를 바라므로 평점한 결과 군(君)이 지은 것이 1.2등이 되었다. 내가 고향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는 바, 군(君)의 조예가 이에 이르렀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군(君)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한미(漢微)한 집안 사람으로 몸을 발양(發揚)하고 가정을 일으키어서 두 고을의 수령이 되었고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또 많은 자손을 두고 70세의 고령으로 안락하게 세상을 마쳤으니, 세상에서 온전한 복 누리기를 군(君)과 같이 한 사람을 많이 볼 수 없다 하겠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 재기(材器)를 못 다 편 것을 아까워하였다.

군(君)이 효도로써 모친을 봉양함에 생존시에는, 뜻을 어김이 없어, 비록 많은 이해(利害)관계가 있는 일일지라도 모친께서 「하지 못한다」고, 말리시면 일찍이 마음대로 한 일이 없었고,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함과 예법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군(君)의 나이가 이미 50을 넘었고 묘소가 꽤 멀며 높은 고개가 있었으나, 날마다 꼭 가서 성묘하되 비바람과 춥고 더움으로 폐한 일이 없었다. 이 마음을 옮겨 아우들과 우애하여 은혜와 사랑을 잃지 않았고 일가들과 함께 화수회(花樹會)를 만들어 돈목한 뜻을 보이니, 사람들은 이 때문에 군(君)의 마음 속에 수양이 많았음을 알 게 되었다. 갑인(1914)년 봄의 기근엔 여러 백 석의 곡식들을 풀어 고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고, 또 호세(戶稅)를 대납하여 주었으며, 해마다 새 곡식 나오기 전의 굴할 때에는 으례로 자기 곡식을 풀어 주었다. 이런 일은 군(君)의 행장에 쓸 만한 것이 못 되나, 세상에서는 혹 군(君)이 많은 재산을 모았으되 인색한 사람이었다고 의심할까 싶어서 생략하지 않았다.

군이 임종에 「인심을 잃지 말 것」을 아들들에게 부탁하고 계유(1933)년 3월 초 5일에 별세하니, 살던 곳 목마산 갑좌에 장사하였다. 군에게 세 부인이 있으니 : 능주 구씨는 인남(仁南)의 따님이요, 안동 권씨는 호인(好仁)의 따님이요,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찬규(燦奎)의 따님이시다. 6남 6녀를 두었는데 : 아들 중 준석, 화석, 양석은 김씨 소생이다. 따님 중 김 영조(金永祚), 권 재호(權載澔), 노 영환(盧泳奐)의 아내는 구씨의 소생이요, 정 덕용(鄭德溶), 허 윤구(許允九)의 아내는 김씨 소생이요, 딸 하나는 미혼이다. 준석의 아들은 영달(永達)이요, 김 영조의 아들은 일식(一植)이요, 권 재호의 아들은 문갑(文甲), 차갑(次甲), 외갑(外甲), 판갑(判甲)이요, 노 영환의 아들은 원식(元植), 형식(亨植), 이식(利植), 정식(貞植), 춘식(春植)이요, 정 덕용의 아들은 원영(元永), 소영(韶永)이다. 군을 장사한 뒤 그 아들들이 묘비를 세우려 하여 행장을 갖고 와서 비문을 청하므로, 내가 사양할 수 없어 이에 명(銘)을 쓴다.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을 예부터 덕(德)의 기본이라 하였으나,

어찌 덕의 기본일 뿐이리요? 복(福)도 또한 여기에 실리는도다.

이미 실린 복을 또한 능히 운영(運營)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잇고 이어서 멀리 전하게 하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