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공 30세손 휘 의 효행을 기린 비각

孝子 하찬호(河瓚浩)
 

정려각(旌閭閣)

삼가 전라남도 유림 천장 및 유사 경유 진달된 문건을 살펴보니 영암군 곤일시면(지금의 학산면)비 내산리에 사는 고 효자 하공의 휘는 찬호(瓚浩)요 자는 여삼(麗三)이며 관향은 진주였다.정는참봉에서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에 오른 휘 당봉(당鳳)의 아들이요 호조참판 휘 월록(月祿)의 손자이며 병조참판 휘 치해(致海)의 증손으로 증 좌의정 휘 자종(自宗) 또한 충과 효를 함께하여 이름난 분의 후손이며 조선조 때 들어와 영의정이며 시호가 문효공인 휘 연(演)의 아우로 벼슬은 대사간인  휘 결(潔)의 8세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품서이 순인하고 지기가 온화하였다. 나이 아홉 살에 이르러 그 어머니가 병 들어 심히 위독하니 시탕을 힘을 다하고 정성을 지극하게 하였으며 노천에 빌었으나 마침내 효험이 없이 점점 위극함에 이르니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넣었으나 하늘이 돕지 않아 문득 상을 당하니 초상 장사와 제전을 법도에 어김없이 하였고 조석으로 성묘를 하였으며 죽은 어른 섬기기를 산 어른 섬기듯이 다름이 없이 하며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이 하니 사람들이 다 공경과 탄식을 하고 멀리서나 가까이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또한 계모에게 효도하되 뜻을 받들고 몸을 공대하는 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험담이 없었으니 이는 하늘이 내준 정성과 효성이 아니겠는가? 조정에서 이같은 사실을 듣고 효로써 도정을 증하였다.그의 다들 경수 또한 태어나며서부터 청탁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승습하고 효행이 남달라 지성으로 어머니를 섬기니 집안에 화기가 넘쳤으며 항상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계모를 받드는 데 한 집 한 방에서 살면서 10수 년이 되도록 항상 화락하니 사람드링 감복하여 칭찬하기를「옛날 장공과 같은 이가 이제 하씨 문중에도 있다」하니 여음이 여기에 미쳐 국은이 크게 베풀어져 아곤위까지 맡게 된지 몇 년이 아니되어 그 혜택이 만민에게 미치니 사림들이 공의 로써 비를 세웠다. 벼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오자 연이어 흉녀이 드니 전답을 팔아 주린 사람들을 여덜 달이나 기민으로 구휼하고 남은 호수의 밀린 부역비를 스스로 부담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를 구활하였으니 지극하고 착한 특행은 실로 말로는 다하기 어려운 바로 이는 모두 효우에서 나온 행실이었다.

아들 사과(司果) 공욱(孔煜) 또한 성효하였으니 태어나면서부터 떳떳한 행실이 있었으며 크면서 더욱 순실하고 어버이 섬기는 한 집에서 돈목하니 고을에서 다 흠탄하며 이는 하씨 문중에 삼세(三世) 삼효(三孝)와 양세(兩世) 주휼(周恤)이 있었으니 옛 사기를 구해 보더라도 보기 드문 일로 도내에 각 군 사람들을 분발케 하기 위하여 일제히 의논하고 고을로 보내어 감영으로 보고되니 포양하는 문축이 실로 많이 쌓였으나 때가 옛날과 달라 상금까지도 국가의 포상을 입지 못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랴? 오직 우리는 공부자(孔夫子)의 성령하에서 그 착한 행실을 현창하며 풍기의 도를 세워 포장을 주며 비각과 비를 세워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게 한다면 풍속을 화양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천만 바라며 이사실을 규례로 만들어 그에 준하고 그 의적을 먼저 명륜록에 그 이름을 올리고 그 절행을 팔도에 드날리는 뜻으로 각 도와 각 군에 통고하고 이와 같이 포장을 주노라.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 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