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열부(孝烈婦)贈貞夫人 金海金氏

 

도순찰사 이헌식(李憲植)이 순찰할 때 이 지방 선비 이경진(李慶鎭) 등이 효열(孝烈) 쌍전의 일로 감영(監營)에 글을 올렸는데, 그 말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옛 절충장군 하정용(河廷容)은 진주인 인데, 영의정 문효공 경재 선생 휘 연(演)의 17세손입니다. 천성이 순효스러워 부모 섬김에 뜻을 봉양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형제간의 우애하고 친족간의 화목을 이루니, 이웃이 효자라고 일컬었습니다. 지난 병인년 봄에는 모친 유(柳)씨가 진작부터 숙병(宿病)이 있었는 데다가 또 이질(痍疾)병을 더하여 여섯 달이나 병석에 누웠을 때 똥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고, 하늘에 빌어 자신으로 대신하여 줄 것을 원하면서 정성과 힘을 다하니, 사람들이 모두 흠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별세하니 슬퍼함이 심하여 목숨을 잃을 뻔하였고, 초종(初終)과 장례의 갖춤을 집안 형편에 알맞게 하고 염(殮)하고, 빈소 차리고, 장사하고, 제사하는 절차를 예법대로 하였습니다. 소양면(所陽面)의 외진 산중에서 시묘살이하여 3년동안 홀로 지낼 때, 범이 그 곳에 와서 호위하였는 바, 복제가 다하고야 집으로 돌아갔으니 어찌 하늘을 감동시키고 신명으로 하여금 이르게 한 효성이 아니겠는까?
그의 부인 김해김씨는 옛 영의정 갑봉(甲峯)선생 휘 우항(宇杭)의 후예인데, 어릴 때부터 여자의 법도를 잘 지킴으로 이웃이 드러나 친척들이 하례하였습니다. 출가한 뒤에는 시부모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남편 섬김을 순종으로써 하였으며, 돈친하는 절차가 친척들에게 드러났고 우애하는 도(道)가 이웃에 젖게 되어 화목한 기운이 가정에 융화한 가운데 70세에 이르도록 해로하는 동안 남들이 흠잡을 나위가 없어 효열부(孝烈婦)라 일컬어졌습니다.

을유년 여름 남편 절충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염빈장제(殮殯葬祭)를 자질들로 하여금 예제(禮制)를 지켜 하게 하되 조금도 여감(餘憾)이 없게 하였으며, 빈소에 모신 때부터 복을 벗기까지의 3년동안 신혼(晨昏)의 곡(哭)과 조석을 제전을 몸소 행하여 폐함이 없었고, 항상 삿자리에 앉아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습니다. 대상(大祥) 때에도 곡읍(哭泣)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으므로 남이 의심을 품지 않았는데, 자손들을 불러 놓고 교훈을 일러 주고, 제사 전날 제수 마련을 몸소 정성을 다하여 하고 제사를 받든 다음 날 아침에 자손들이 성묘하러 떠나기를 기다려 조용히 순절하여 죽었으니, 어찌 이와 같은 탁렬(卓烈)의 특이함이 또 있겠습니까? 효자로다, 이 사람. 열부로다, 이 사람이여. 흠탄(欽歎)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효자로써 세상을 다스리시는 안렴사(按廉使)에게 추천하오니, 임금님께 아뢰어 정문(旌門) 세우는 은전이 베풀어지게 하소서. 삼가 몽매함을 무릅쓰고 이와 같이 진달하는 바입니다」 제내(題內)에 남편과 아내가 효와 열을 겸전한다는 것은 예부터 드문 일이니 뉘라서 흠탄하지 않으리요? 이 일을 들으니 매우 가상할 일이라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전라도내의 선비들인 진사 최홍우(崔弘宇)와 유학(幼學) 이인회(李仁會) 등이 임금이 궁궐 밖으로 나갔을 때 말씀을 올렸으니 그 대강은 이렇다. 「선행(善行)을 들추어 조정에 알리는 것은 향당(鄕黨)의 공의(公議)요, 선행을 포상하고 그 집을 나타내는 것은 조정의 아름다운 법전입니다. 전주의 옛 절충장군 신(臣) 하정용(河廷容)은 천성이 순효스러워 부모 섬김에 뜻을 봉양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는 바, 그 모친 유씨(柳氏)가 진작 숙질(宿疾)이 있었는 데다 또 이질을 더하여 자리에 누운 여섯달 동안 똥을 맛보아 증세를 살피며 하늘에 빌되 자신으로 대신해 줄 것을 빌어 성력을 다하니, 남들도 모두 흠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별세하매, 슬퍼함이 심하여 목숨을 잃을뻔하였고, 또 외진 산골에서 시묘살이하여 홀로 3년을 지낼 때 범이 와서 호위하였으니, 어찌 하늘을 감동시키고 귀신으로 하여금 이르게 한 효성이 아니겠습니까? 신(臣) 등은 같은 도내에 살면서 다 같이 인륜의 천품을 받은 바에 입 다물고 묵묵해 할 수 없어 이에 감히 천리를 걸어와 소리를 같이 하여 우러러 전하(殿下)앞에 고하옵노니, 특별히 정문(旌門)의 은전을 내리사 인멸(湮滅)함이 없게 하소서. 신(臣)등은 두려움과 기원하는 간절을 맡길 데 없어 이 일을 삼가 아뢰나이다」하고 아뢰니 왕이 비답(批答)하되 「예조로 하여금 품달하여 처리하에 하라」하였다.

1888년 정월13일에 의정부에서 예조의 계목(啓目)으로 아뢰기를 「전주의 옛 절충장군 하정용(河廷容)이 효행이 특이하였고, 그 아내 김씨의 성행이 숙철(淑哲)하였는 바, 그 남편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별세한 후 상복을 벗은 다음 날 곧은 마음으로 조용히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으니, 예조에서 아뢴 대로 시행함이 어떠하오리까?」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898년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훈련원사에 증직하고 정려(旌閭)세울 것을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