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렬여(彰烈閭)

효열부(孝烈婦)진양 강씨

강씨(姜氏)는 진양의 명망있는 집안인 바, 휘 원범(元範)은 진주에서 세거(世居)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가문의 음덕으로 정략장군이 되고 아드님 정국(靖國)의 공훈으로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이 분이 사직 여인보(呂仁甫)의 따님과 성주에서 혼인하여 강씨를 낳아 진양 하공 휘 호(濩)에게 시집보냈다.

하공의 자는 태화(太和)이다. 창녕에서 살았는데, 사람됨이 청려하여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고 과거급제를 뜬 구름같이 여기셨다. 강씨가 나이 50이 못되어 공의 상을 당하매 상제(喪制)를 마친 뒤에도 3년동안 죽만 잡수시고 소복을 하고 지내시니,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그 마을을 찾아 그 일을 아름답다 여겨 조정에 알려 절부 정문(節婦旌門)을 세우게 되니, 고을과 이웃에서 모두 강씨를 절부(節婦)라 일컬었다.
연세 80되시던 병자년 10월 17일에 돌아가시어 낭군님 묘에 합장되셨다. 내 아내는 사실 강씨의 이모이니 태화와는 우서간이 되어 우러러보기를 백난(伯鸞)과 같이 할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맹광의 장사에 어찌 한 마디의 비명(碑銘)이 없으리요? 이에 명(銘)한다.

하늘이 선인(善人)을 내림에 어찌 한 곳에 편중하게 하셨는고?…(궐문)…곽태는 비록 어질었으나 벼슬을 받지 못하였고, 양홍(楊鴻)이 이미 죽었으나 맹광(孟光)은 절개 지켰네. 정문(旌門)의 포상은…(궐문)…나의 비명(碑銘)이 거짓되지 않으니, 백개라도 부끄러움 없네.
정한강(鄭寒岡)이 그가 지은 하산지(夏山誌)에 쓰기를 「강씨는 선사(善士) 하호(河濩)의 아내인데, 남편이 병든 지 여러 해 동안 간호하고, 약 씀을 매우 신중히 하였으며, 남편이 돌아가자 죽만 먹고 소복하여 6년을 지내니,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조정에 알려 강씨가 살아 있을 때 정문을 세웠다」고 하였다.

 사직공 16세손 휘 호(濩)의 배위   진양강씨지려 :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 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