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子孝烈婦碑銘 하상후(河相厚)배위 昌寧成氏


   
 경북 청도군 각남면 함박리 백호등 입구
공은 시조 고려사직공 휘진(珍)의 27세손이요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천부원군 원정공(輸忠佐理功臣 重大匡輔國崇祿大夫 晉川府院君 元正公) 휘(諱)즙의 19세손이요 조선조 영의정(領議政)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문효공(文孝公) 휘(諱) 연(演)의 16세손이고 가선대부동지 중추부사 풍운공(豊雲公) 휘(諱) 천룡(天龍)의 7세손 이며 인산공 (仁山公) 휘 찬홍(贊泓) 초 휘(諱) 성찬(聖贊)의 차자(次子)로서 초 휘(諱)득청.상득(得淸.相得)이고 자 는 서중(瑞中)이며 호(號)는 효렴(孝廉)이시다
 

창녕(昌寧) 성씨(成氏)는 두백(斗伯)의 여식(女息)으로서 공(公)과 혼인(婚姻)하였다 공(公)과 성씨(成氏)는 천성(天性)이 지효(至孝)하여 일상(日常) 부모(父母)께 진지 전후와 조석에 문안과 출고반면(出告反面)을 반드시 여행(勵行)하고 부모의 뜻에 추호(秋毫)도 어긋남이 없이 스스로 성심성의(誠心誠意)껏 효도를 다하였고 자당(慈堂)의 삼년간 와석에 백방(百方)으로 문의구약하여 지극(至極)한 치성(致誠)과 더불어 신령(神靈)님과 황천(皇天)님께 연일(連日)쾌유를 기원하며 만약불유(萬若不 癒)이면 대신 하기를 소원하니 병환이 완치되었다.성씨는 정숙온화한 품성으로 시부모께 공경효도하고 부공(夫公)께 지경과 부도를 다하였으며 부유 와 화악(和樂)한 가정을 형성 하는데 지성으로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 5년후 부공께서 급병으로  26세 청년기에 별세하시니 청상의 한(恨)을 딛고 신종(愼終)의 예를 갖춘 이후 강풍우에도 개의치않고 상기간 3년간을 매일 황혼시 승묘를 엄행하였다. 28세 청춘시(靑春時)에 부공(夫公)을 사별 하고 수절하며 시부모 봉양과 삼세독자 휘(諱) 복용(福容) 초 휘(諱) 경복(涇福)을 유학자로 양육하는 집념 또한 강하였다. 이와 같은 극진한 효자와 효열부(孝烈婦)의 사적(事蹟)이 널리 전하여지니 본군군수(本郡郡守)와 향교유림(鄕校儒林)에서 보상을 내리고 효자와 효열부(孝烈婦)로 청도문헌(淸道文獻)과 영남충의 효열지(嶺南忠義孝烈誌)에 등재(登載)되어 후세(後世)사람들의 규범으로 삼고 있다. 이 떳떳한 사적(事蹟)이 연멸 될까? 염려하여 후손들이 비석을 건립하고자 비문(碑文)을 나에게 청하기에 가상(嘉尙)히 여겨 쾌히 응낙(應諾)함이로다.

西紀 1989年 己巳 4月 ? 日
경북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최승호(崔丞灝) 근찬
아산 장봉채(蔣奉埰)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