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子하경주(河璥周)

본소(本所)에서는 선성묘(先聖廟)의 창건에 즈음하여 오륜행실(五倫行實)을 다시 간행하여 유교를 숭상하고 선행을 권장코자 했을 때 여러 고을의 단자(單子:보고서)가 계속 도착해 왔다.그 가운데 삼가 경상남도 유사(有司) 및 여러 선비들이 올린 추천장을 살펴본 즉 고성군 영오면 연당리의 효자 송암(松菴) 하경주(河璥周)가 있었다.그의 관향은 진주요, 사직공(司直公) 휘 진(珍)의 후손으로 부호군(副護軍) 휘 성도(成圖)의 증손이요, 중추부사(中樞府事) 휘 국룡(國龍)의 손자요, 성헌(醒軒) 휘 태륜(泰崙)의 아들이다. 천성이 어질고 두터웠으며 어려서부터 정훈(庭訓)을 이어받아 부모를 모시는 도리를 스스로 깨달았다. 특히 조석으로 살펴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고, 입에 맞은 음식을 올렸으며 때없이 그 정성을 다하여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형제간에 우애하고 종족(宗族) 간에 화목하여 노복(奴僕)을 은혜와 위엄으로 다스리니 이웃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1807년 여름 부친이 기질(奇疾)에 걸려 몇 달 동안 고통을 겪으며 자리에 눕자 공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다스려도 효험이 없었다. 공은 시탕(侍湯)의 범절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했으며 잠시도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밤이면 하늘에 기도하여 대신 고통을 당할 것을 호소하였다. 병세 위급에 즈음하여서는 손가락을 베어서 주혈(注血)로 다시 소생케 하여 아홉 달간의 병석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였다. 3년 뒤 1810년에 부친의 지병이 재발하여 대고(大故)를 맞이하였고 성복(成服)을 지낸 3일만에 모친의 병환이 위중함에 이르렀다. 한쪽으로는 부친의 빈소를 지키고 한쪽으로는 모친을 간병하는 등 한 몸으로 두 가지 힘든 일을 수행하면서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10일 사이에 두 부모는 모두가 별세하는 변을 당하자 그 애훼(哀毁) 읍혈(泣血)이 지극한 가운데도 상례제전(喪禮祭奠)을 예법에 따라 유감이 없었다.

한편 3년 동안 여막을 만들어 무덤을 지켰고, 소박하고 깊은 거상생활(居喪生活)로 경애(敬哀)의 정을 다하면서 상을 마치었다. 슬프다! 저같은 높고 기이한 행실은 고금에 드문 일이니 마땅히 장대에 그 기록을 높이 걸어 세상에 밝혀야 할 일이었으나 오히려 지금까지 잠겨있었으므로 없어질까 두려워 이에 올리는 바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본소에서는 이를 듣고 감격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활자를 깍아 출판케 하였고 뒤따라 비석을 세우고 각을 지어 아름다운 이름과 함께 수풍성(樹風聲:부모를 그리워 하는 소리)이 길이 후세에 이르기까지 울려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을 결의하여 글로 남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