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子하성구(河聖龜)

도를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에게서 듣고 학문을 농암 김문경(金文敬)공과 강론하여 당시의 선사(善士)가 된 분이 계시니, 옛 처사 하공 휘 성구(聖龜), 자 휴징(休徵)이 이 분이다. 자품이 순수하고 총명이 뛰어나 글을 읽음에 한 번 본 것은 곧 외웠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하여 20여 세때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는데, 어버이 돌아가심에 개연(慨然)히 탄식하여 이르기를 「우리 선조 금사공(錦沙公)께서 난리 뒤에 벼슬할 뜻을 끊고 훈사(訓辭)를 지어 자손을 경계시키기를 삼가 시와 예법을 지켜 명(命)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내가 어찌 어기리요?」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암 선생을 배알하고 또 농암 선생을 찾아 성리설을 듣고 비로소 마음 쓸 곳을 알 게 되어 두문불출하고 세상 일을 외면한 채 종일토록 가만히 앉아 여러 서적을 널리 읽으셨다. 특히 대학과 중용에 힘을 기울이고 늘 자제들에게 소학 읽기를 권하면서 말씀하기를 「이 글이 곧 사람을 만드는 글이어서 천하 만선(萬善)을 다 밝힌 것이니 어찌 다른 것을 구하랴?」하셨다. 우암이 손수 학문하는 차례를 써서 주면서 권면한 바 있었다.

공이 열 네 살에 모친상을 당하여 슬픔을 다하였고, 부친 섬김에 효성을 다하다가 상을 당함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또, 계모(繼母)님을 잘 섬기셨다. 그 성품으로 아우들과 우애하며 일가들과 화목하여 모든 사람들의 환심(歡心)을 얻었다. 아드님 가르침에 비록 자애로우시나 독려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니, 공은 백 가지 행실을 모두 갖추었다 할 것이다.공이 1654년에 태어나서 1706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53세였다. 동복현(同福縣)의 서쪽 영신리 계좌에 장사되셨다. 배위는 함양 박씨(咸陽朴氏)인데, 별검 후신(厚信)의 따님이요, 기묘사화의 명현 구심재(求心齋) 훈(薰)의 후예이다.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 규범이 있다고 시부모님이 칭찬하셨다. 공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나고, 공보다 4년 뒤에 돌아가시어 합장되었다.

세 아드님을 두셨으니, 일청(一淸), 오청(五淸), 영청(永淸)인데, 모두 효행으로 가법을 이으셨다. 사위는 장우형(張宇衡)이다. 일청(一淸)이 오청(五淸)의 아들 정익(廷益)을 양자로 삼아 공의 제사를 이었는데, 군수공으로부터 공의 9. 10대손에 이르도록 효와 충으로 대를 이어, 이른 바 충효를 전하는 집안이 되었다. 내가 병들고 나이 많아 궁벽한 산중에 살고 있는데, 후손 정익(廷益)이 六百리를 걸어와서 영청(永淸)의 뜻을 전하면서 나에게 묘표를 요청하므로 내가 공의 행장을 살펴보고 공에게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이 있었음을 알았도다. 옛말에 이르기를 「그 산을 보지 못하면 그 나무들을 보라」고 하였거니와, 내가 공을 믿는 바 있는지라 사양하지 못하고 간략히 이와 같이 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