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子하오청(河五淸)

공의 휘는 오청(五淸)이요, 자는 천혜(千兮)인데, 1684년 8월 25일 야사리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특이하여 지성으로 어버이를 아끼시니 집안에서 효자라 일컬었다. 열 다섯 살에 아버님 반학공께서 병석에 누우셨으므로 공이 주야로 붙들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근심하는 정성이 안색에 나타나 집안 식구도 공이 이를 드러내고 웃거나 옷을 벗고 자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약과 똥을 맛보기를 9년이나 한결같이 하였으며 몹시 추운 날이나 큰 비가 내리는 날에도 밤이 되면 북극성에게 빌어 자신으로 대신해 줄 것을 청하였다. 1706년 겨울에 병환이 위독하여 여러번 기절하시므로, 공이 작도로 손가락 한마디를 끊고, 백형도 목침으로 손가락을 찧어 서로 번갈아 피를 드려 사흘동안 소생하게 하였다. 마침내 별세하시매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아 거의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선비 박씨 또한 애통함이 지나쳐 오랫동안 기절하였으므로, 공이 또 손가락을 끊어 종일토록 수혈하여 3년동안 연명하게 되니, 사람들은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고 하였다. 전후의 상중에는 슬퍼함을 예에 지나치게 하였고, 제전을 반드시 몸소 행하여 3년을 마치었다.

계모 섬기기를 낳아 주신 부모와 똑같게 봉양함에 환한 얼굴빛으로 하며, 받들기를 뜻에 맞게 하고 음식 공궤와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예절을 병중에라도 폐하지 않고 성경(誠敬)을 다하였다. 1716년에 계모님 상을 당하여 염하고 빈소 모시고 장사하고 제사하는 절차를 한결같이 가례를 따라 하였으며, 맛있는 것을 얻게 되면 간직하였다가 반드시 빈소에 올리었다.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인생이 이 세상에서 두 번 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 섬기는 일이니, 부모 섬기기를 어찌 정성으로 아니 하리요?」하였으며, 남의 노부(老父)를 보면 문득 오열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본래의 성품이 맑아 외물에 마음을 두지 않고 검약함으로 자신을 수양하였으며, 돈친함으로 가정을 다스려 이웃과 고을에서 모두 환심을 얻었다. 남의 말을 듣거나 일을 처리함에 모나지 않게 하여 가부(可否)가 없는 듯이 하였으나, 의리(義理)의 결단에 있어서는 늠연(凜然)하여 범할 수 없었다.

형제들이 병에 걸리면 문득 울면서 구호하여 손수 약을 달여 먹이었다. 항상 백씨(伯氏)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하여 앉고, 밥상을 같이하여 잡수셨으며, 혹 별난 음식이 있으면 서로 사양하고 서로 권하였다. 때로는 백씨가 일을 벌리면 공이 밥을 떠서 넣어 드리고, 공이 또 입을 벌리면 백씨가 먹여 주었으며, 혹은 한 그릇의 밥을 숟가락을 같이하여 잡수셨다.공은 기질이 잔약한 데다가 여러 해 부모님 병환에 시탕하는 데 근력을 소모하였고, 6년의 상중에 소밥(素食)을 잡수시어 야위어서 병이 되었으므로, 남들은 모두 위태롭다 하였으나 마침내 보전하고, 병환이 또 조금 나아졌으니 진실한 효성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사람들이 그 효성과 우애를 의논하여 관(官)에 천거하려 하니, 공이 지성으로 만류하여 말씀하기를 「사람의 자식이 되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나니, 사람이면 누가 이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만을 칭찬한다면 어찌 자신이 부끄럽지 않으리요?」하셨다. 1728년 4월에 임씨(林氏)의 상을 만나 마음과 예절을 다하였다. 1729년 6월 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였는데 경산촌 뒤 매헌공 묘 아래 자좌에 장사되었다.

부인 진양강씨(姜氏)는 숭의랑 석창(碩昌)의 따님인데, 성품이 순박하고 행동이 겸손하여 매우 부덕이 많았다. 공은 세상 이익에는 담연(淡然)하게 뜻이 없고, 부모님을 효성으로 섬기며 형제간에 우애하며 친척과의 화목을 이루고, 사람을 대함과 사물에 접함에 각기 그 마땅함을 얻었으므로, 살아서는 온 고을이 칭송였고, 돌아가심에 온 고을이 슬펴하였다. 사림의 표창장과 고을 원의 보고서와 방백의 장계(狀啓)가 있었으니, 그 바깥 일을 보면 그 속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공의 아들 정익(廷益)이 불의(不義)에 굽힘 없는 고상한 행실을 지녔고, 자당 섬기기에 효도하여 상을 당할 때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렸으며 죽만 먹고 지냈다. 역천 송명흠(宋明欽)을 따라 노닐 제 뜻이 독실하여 학문을 좋아하므로 동료를 중 따라올 이가 드물었다고 하였다. 내 또한 정익을 외우(畏友)로 삼고 있는 사람인 바, 지금 고을에서 들어 아는 것으로 인하여 삼가 그 대략을 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