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효자와 만취정(晩趣亭)

다섯 효자는 하씨이다. 하씨는 진양의 드러난 집안인 바, 휘 호(灝). 준(濬). 입(입). 식(湜). 봉(봉)의 다섯 형제가 그 분들이다. 고려 때로부터 높은 벼슬로 빛났으며, 조선조 세종 때의 영상 문효공 연(演)에 이르러 더욱 크게 천양(闡揚)되었는데, 이 분이 곧 효자의 12대조이다. 이조참찬 효명(孝明)과 형조참판 맹윤(孟潤)과 현감 계조(繼祖)와 참판 억수(億水)와 사예 응림(應臨)과 절제도위 암(암)과 감찰 정(정)과 첨정 원(源)은 11대조로부터 고조에 이르기까지의 휘와 벼슬이다. 증조는 휘 경윤(慶潤)이요, 조부는 휘 한징(漢澄)이요, 황고(皇考)는 휘 경천(涇天)인데, 모두 문행(文行)이 있어 세상의 추중한 바가 되었다.

지난날 문효공께서 호남의 도백이 되시어 도내(道內)를 순찰하다가 용성(龍城)의 중방현(中坊縣)에서 주무실 때 꿈에 어떤 신옹(神翁)이 와서 호소하여 말하기를 「나의 다섯 손자가 우연히 연못에 나갔다가 잡혀 장차 공의 반찬이 되려 하니, 구원하여 살려주시길 바라나이다」하며 두 번 세 번 공손히 빌기에, 공이 번연히 잠을 깨어 일어나 포인(疱人)을 불러 물으니, 다섯 마리의 잉어를 잡아 두었다고 대답하므로, 곧 못에 방생(放生)하라고 명령하였다. 조금 후에 또 꿈에 신옹(神翁)이 다섯 동자(童子)를 거느리고 와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들을 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에 그럴 만한 것이 없으나, 미루어 생각하건대 공의 자손이 10세 후엔 반드시 쇠미하여질 것이므로, 그때를 당하여 정성을 보일 것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장차 12세에 이르면 아들 다섯 형제가 태어날 것인데, 이는 반드시 오늘에 대한 응보(應報)일 것입니다」하고 다소의 부참(符讖)을 고해 드리고 사라졌다.

날이 밝자 친히 연못 가에 가서 바라보며 말씀하기를 「엇저녁 꿈이 허망함이 아니라면 진상을 드러내 보이라」하시니, 곧 구름이 끼고 황룡(黃龍)이 잘 보이되 흰수염 검은 뿔을 가진 것이 꿈틀거리며 치솟았다가 사라지므로, 공은 시를 지어 바위에 새기고 돌아오셨다. 그 후 정북창(鄭北窓)이 부참을 해석한 것이 집안에 간직되었는데, 다섯 효자가 과연 시기와 수(數)에 호응하여 남원의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나시니, 이는 부결(符訣)에 영락없이 부합한 일이었다. 황고 봉촌공(鳳村公)은 일찍이 자부심을 갖고 기뻐하여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함에 극(極)으로써 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다섯 효자는 성품이 모두 효순(孝順)하고 재예가 뛰어났으며 같은 책상에서 공부하여도 문장이 곱고 새로우므로, 원근에서 가서 보는 사람이 많았다. 봉촌공이 또 경계시켜 이르기를

「우리집안이 남녘으로 유락한 지가 여러 대(代)가 되었고, 또 가세가 쇠미하여져 빈한하게 살기에, 선대 묘소의 수호에도 멀리 떨어진 까닭으로 정성을 드리지 못하여 집안의 명망이 장차 땅에 떨어질까 두렵다. 너희들은 마땅히 초야에서 학문에 힘쓰고 외지(外地)를 유람하며 선대의 묘소에 성묘하고, 각기 그 직분을 다하여 선조를 잊지 말고 집안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며, 가계(家計)를 궁핍하게 하지 말지어다」하셨다.이에 차례로 명(命)을 받들어 각기 하는 일에 전심하되 힘쓸 일로 중요한 것은 부모의 뜻 이음이라 여기고 봉양하는데 음식 공양과 때를 따라 따스하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일을 능히 부지런히 고르게 하여 감히 태만하게 함이 없었다. 가절(佳節)과 생신 날에는 아롱진 옷을 입고 춤추며 술잔 올려 헌수하였다.

쌀을 百리 길에서 짊어지고 오고, 생선을 삼동의 얼음 속에서 잡았다. 날이 가물어 묘(苗)가 말라질 때 봉양할 것이 떨어짐을 걱정하여 하늘에 빌면 특별히 비가 내려 벼가 소생하였고, 재앙이 들거나 마을에 역질(疫疾)이 있을 때 부모님을 위해 재역(災疫) 쫓는 행사에 나가면 신(神)이 침소를 멀리 할 것을 일러 주기도 하였다. 기타 신명(神明)께서 상서로운 일을 일으키어 내림에 있어 기이하게 감응한 일이 한 가지가 아니고 족한 것이었다.불안한 일이 있을 때는 각각 맡아 의원을 맞아 오고 약을 조제하며 미음을 끓이고 하늘에 빌되, 회복되지 않는 동안에는 혹 웃지도 않고 혹 자거나 쉬지도 않았다. 부모님 상을 당해서는 세수도 하지 않고 애통하여 울었으며, 성묘하는 百리 길을 다섯 효자가 서로 차례로 다니어 三년 동안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묘 옆에서 시묘하였다. 또, 유문을 모아 책 한 권을 만들어 당세의 이름난 선비에게서 글을 받아 찬양하였다. 셋째 아드님 입은 재예가 더욱 아름답고 풍채가 매우 훌륭하였는 바, 글을 지으면 좌중을 압도하였고, 사람을 접함에 마음으로 복종하게 하였다.

일찍이 한양에 있을 때 이름난 재상과 큰 선비들이 그 풍범을 듣고 사귀기를 원하되 한 번 만나면 서로 허교하였다. 입의 부인 김씨는 총명하고 경민(警敏)하며 곱고 온순하고 정숙하여 미혼 때나 출가하여서나 모두 그 도리를 다하였다. 일찍 집안 가르침을 받아서 경사(經史)를 섭렵함에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으므로, 문장과 생각이 물이 솟고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금같이 정밀하고 옥같이 아름다운 문장은 비록 허난설헌(許蘭雪軒), 이옥봉(李玉峯)일지라도 이에 더함이 없었을 것이다. 의리처(義理處)와 사기(辭氣)의 삼엄함으로 말할진대 대장부도 미치기 어려운 바가 있었으니, 하씨의 가문은 길사(吉士)들의 꽃숲이라 이를 만하도다. 이에 찬(贊)한노라.

한 집안에 한 분 효자 나기도 어렵거든, 허물며 다섯 분이랴? 대수(代數)를 달리하여 다섯 분이 있기도 오히려 가능한 일이 아니거든, 하물며 한 형제간임에랴? 한 분의 문장도 용이하지 않거늘 연하여 다섯 문장을 두었음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장부(丈夫)의 능한 문장도 많이 얻지 못하거늘 부녀의 웅문(雄文)이 세상에 과연 늘 있겠는가? 아드님과 며느님이 이와 같으셨으니, 봉촌공은 걱정 없던 늙은이었다 하겠네. 고을 목사의 천거와 암행어사의 찬이 한 두 번뿐이 아니었으되 나라의 포상이 내리지 않았음은 아마도 유사(有司)의 불명(不明)으로 명성이 임금에게 품달되지 못했음인저! 반드시 끼친 음덕이 있어 장차 자손에게 그 영화 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