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陽河氏 세보서문(世譜序文)
위에 세보 서문(世譜序文)은 문효공할아버님께서 문종2年 1451年 정월달에 편찬하신 경태신미보(景泰辛未譜) 서문입니다 경태 신미보(景泰辛未譜)는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오래되었다 고 하는 권씨가의 성화보(成化譜)보다 25年이나 앞서고 세종 5年 (1423年)에 만든 문화류씨 영락보(文化柳氏永樂譜)에 이어 두번째로 1451年에 문효공 할아버님께서 편찬 하셨으나 후손들이 불민하여 전승 보존하지 못하고 현재 그 서문만이 모헌(河渾)선조님께서 편찬하신 만력 병오보 와 진양지(晉陽誌)에 남아 있습니다
위에 세보서문(世譜序文)은 국립중앙 전자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는 진양지(晉陽誌) 원본에서 발취하였으며 제가 약간 포토샵으로 편집했습니다
출처:국립중앙 전자도서관
敬齋先生文集卷之二
序
世譜序 008_446a
蓋自太古開闢以來。土地之宜。自有美惡。人物之生。各有貴賤。吾鄕晉州。雄據智異。壓帶長江。英靈之氣。降鍾毓秀。人才輩出。無世無之。舊在陁州之域。富庶強大。新羅新文王分置菁州。景德王時。改號康州。迄于高麗顯宗之世。州人將軍姜民瞻討賊撥亂。賞以大功。昇爲晉州牧。至今因號。土姓出自三韓者四。曰河曰鄭曰蘇曰姜。立州之後。又有三姓。曰柳曰任曰康。其他雜姓。庶人也。吾家舊姓。四家之一。從古陀州。元來士族。世系無傳。獨於麗史。有河侍郞拱辰。聞說爲同源。而分派未明。又有姜給事贈詩我先世。稱之以河僕射。諱亦不知。悲嘆也夫。有諱珍。司直。司直生諱永尙。主簿。主簿生諱孟恭。參軍。參軍生諱元慶。進士。慈祥豈弟。進上生諱白富。司正。司正生諱義。有才早歿。贈參知。參知生諱保。司直。行修家庭。罕出洞門。卒有影堂。贈判書。高祖諱直漪。護軍贈政丞。政丞生諱楫。晉川府院君。諡元正公。元正生諱允源。晉山府院君。曁我先考左議政府君。歷敭中外。子孫衆多。祖宗積累之德。可謂至矣。人傑地靈之說。亦豈誣哉。第以倭寇。文書漫失。姑以遺錄所存。著爲圖籍。名之曰上集。年代久遠。旁親愈多。以祖宗觀之。均是子孫。固無親疏也。故別爲一圖。名之曰下集。嗚呼。念祖宗之積德。俾熾俾昌。戒子孫之愼行。相安相樂。蓋爲書記以示後來。景泰二年辛未正月上澣。領議政府事敬齋河演。謹述
경태 신미보 서문 번역문
대개 천지가 처음 생긴 뒤로 땅의 됨됨이엔 좋고 나쁨이 있고 사람의 태어남엔 귀하고 천함이 있는법이다
우리본향 진주는 지리산을 등지고 남강이 밑에둘러 있어 신령한 기운이 모여 빼어나서 어느 시대에도 인제가 배출되지 않은적이 없었으며 옛날에는 타주(陀州)의 지역에 속하였는데 번성하여 강대하였다
신라 신문왕이 일부를 나누어 청주(菁州)를 설치 하였고 경덕왕 때 강주(康州)로 고쳐 졌으며 고려 현종 때에 이르러 이고을 사람이었던 장군 강민첨(姜民瞻)이 도적을 토벌 하여 난을 평정한 공로로 진주목(晉州牧)으로 승격 하였으므로 오늘 의 이름이 생기었다 토성(土姓)으로 삼한 시대부터 내려온 씨족에 넷이 있으니 하(河)정(鄭)소(蘇)강(康)씨이고 기타는 잡성과 서민들이다
우리하씨 집안은 옛성씨 중의 하나로 타주 시대부터 선비 집안이었으나 세계(世系)의 전해짐이 없고 다만 고려사에 시랑(侍郞) 하공진(河供辰)이란 분이 적혀 있는데 들리는 말로는 근본이 우리와 같다고 하나 분파가 명확하지 못하고 또 강급사(姜給事)라 는 분이 우리선조에게 시를지어 주면서 하복야(河僕야)라 일컫은 일이 있는데(하복야공) 이름자를 모르니 한스럽다
이름자가 진(珍)이란분이 계시었는데 벼슬이 사직 (司直)이셨다 사직의 아드님 영상(永尙)은 벼슬이 주부(主簿)이셨고 주부의 아드님은 맹공(孟恭)은 참군(參軍)이셨으며 참군의 아드님은 원경(元慶)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는데 인자하고 자상하고 태연한 성품이셨다
진사의 아드님은 백부(白富)는 사정(司正)이셨고 사정의 아드님은 의(義)는 제주가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셨는데 참지(參知)벼슬로 증직(贈職)되셨다 참지의 아드님 보(保)는 사직(司直)이셨는데 가정에서 덕행을 닦고 동네밖에 나가는일이 드물었으며 돌아가신 뒤에 영당(影堂)이 세워 졌고 판서(判書)증직(贈職)되셨다
고조부(高祖父)의 이름자는 직의(直의)인데 벼슬이 호군(護軍)이었고 정승(政丞)으로 증직 되셨다
정승의 아드님 즙(楫)은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이셨고 시호 는 원정공(元正公)이시다
원정공 아드님 윤원(允源)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셨으며 나의선고(先考) 자종(自宗) 좌의정부군(左議政府君)에 이르기까지 중앙과 지방에서 벼슬을 차례로 하셨고 자손이 많았다 조상들께서 덕을 쌓으심이 지극하다 할 만하니 인걸지령설(人傑地靈說)이 어찌 거짓말이 겠는가?
그러나 왜구(倭寇)의 난리로 문적(文籍)을 잃었으므로 남아있는 기록으로 도서(圖書)를 만들어 상집(上集)이라 하고 연대가 오래 내려올수록 방계 친족이 더욱 많아 졌는데 조상께서 보시면 다같은 조상이라 가깝고 먼것이 없을 터이므로 따로 한책을 만들어 하집(下集)이라 이름하였다
아 ! 조상들께서 덕을 쌓아 번창을 이루심을 생각하고 자손 들이 조심하고 서로 안락할것을 일깨움에 있어서 어찌 이를 기록하여 후손에게 보이지 않을수 있으리오
경태2년 辛未 정월 (1451년문종2년) 영의정부사 敬齋 河演(경재 하연)삼가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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