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공선조님의 연보(年譜)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9년 병진(1376년)
고려 우왕 2년 1376년 8월 13일 을미 해시에 선생이 진주 이구산 아래 여사촌에서 출생 했다. 이구산(尼丘山)은 진주 서쪽 사십리 지점에 있는데 물가에 높이 서 있다. 하씨가 대대로 그 밑에서 살았다. 전설에 예의(禮儀)가 노(魯)나라 궐리(闕里)와 같다고 하므로 이름하였다. 여사촌은 지금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라 부른다.
(1376년) 12월에 할아버지
진산 부원군 고헌공(苦軒公휘允源)께서
돌아가셨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13년 경신(1380년)에 선생 5세 8월에 증조부 진천 부원군 송헌공(松軒公휘楫)께서 돌아가셨다 선생이 여러 아이들과 정원에서 놀다가 넘어져 상처를 입었다. 어머니께서 어루만지면서
경계하기를 「옛 글에 말하기를
신체 발부는 부모님으로 부터 받았으니 감히 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극치라」하였다. 선생이 그 말씀을 들으시고 근심하는 안색을 하더니 그 뒤로 망년스런 행동을 하지 않고 손에는 노리개 물건을 가지지 아니하시고 입으로는 거칠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14년 신유(1381년)에 선생 6세 그 해 가을에 아버지 목옹공을 따라 풍해영에 가다 그 때 목옹공이 해서(海西) 관찰사가 되었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15년 임술(1382년)에 선생 7세 그 해 가을에 목옹공을 따라 풍해로부터 서울집에 돌아오다. 집이 송경에 있었다. 이 앞에 송헌공이 송악(松岳) 동쪽 산을 점령하여 살다가 만년에 시골로 돌아왔다. 목옹공이 서울에서 벼슬하고 계실 때 송악 옛 집을 수리하여 거처하였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16년 계해(1383년)에 선생 8세 처음으로 소학에 들어가다. 아버지 목옹공이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르치시니 선생이 말씀하기를 「경(敬)은 어찌 말하지 않습니까」하였다. 목옹공이 말씀하기를 「효.제.충.신을 다하면 경이 그 중에 있다」하였다. 이 일은 어느 때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여기에
붙여둔다. 정월에 조비 정경
부인이 돌아가셨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17년 갑자(1384년)에 선생 9세 봄에 백이전을 읽다.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먹었다는 구절에 이르러 백형인 군사공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수양산이 즉 주나라 땅이요, 고사리도 주 나라 물건인데 어찌 주 나라 땅에 숨어 주 나라 물건을 먹습니까」하였다. 목옹공이
들으시고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18년 을축(1385년)에 선생 10세 문장이 크게 진보하고 필법이 단정하다. 목은 이색이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압록강 동쪽의 재주가 아니다. 일찍 성취한 것이 비록 당 송의 모든 선비라도 이 아이보다 낫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여름에 목옹공을 따라 청주 임소에 가다. 그
때 목옹공이 상제를 마치고
나가서 청주 목사가 되었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19년 병인(1386년)에 선생 11세 그 때 욱원국 사람 남녀 합하여 삼십 여명이 풍파에 표류하여 울산 진에 도착하여 청주로 지나가게 되었다. 선생이 노상에서 구경하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선생을 보고 말하기를 「거룩하다. 참으로 대인의 기상이로다.」하고 그 중
여인이 패물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선생이 웃으며 답하기를 「나는 본래 노리개를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구나 여자의 패물을 장부가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0년 정묘(1387년)에 선생 12세 가을에 목옹공을 따라 청주로부터 서울에 돌아오다. 그 때목옹공이 청주로부터
서울에 돌아와 병조판서를 임명 하여도 나가지 않으셨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1년 무진(1388년)에 고려 창 원년 선생 13세 이월에 목옹공을 모시고 춘당에 가 야은 길재 공을 뵙다. 목옹공이 야은 길재 공과 함께 춘당에 소풍하면서 국가의 위기를 말씀하셨다. 선생이 말씀드리기를 「두 성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신하된 도리입니다.」하니 야은이
목옹공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 한 마디 참으로 우리들이 해야 될 직분이다.」하였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2년 기사(1389년)에 공양왕 원년 선생 14세 포은 정선생에게 수업하다. 목옹공이 포은선생과 도가 같고 뜻이 합항였으며, 또 집이 가까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상종하셨다. 이 때에
선생에게 명하여 가서 배우라
하였다. 선생의 천생자질이 도에 가깝고 뜻 세움이 매우 높아 어진 스승을
얻어 더욱 힘써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3년 경오(1390년)에 선생 15세 목옹공을 따라 청풍 임소에 가다. 목옹공이 대사마(大司馬) 벼슬을 사양하고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여러 번 청하였더니 이 때서야 청풍군수가 되었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4년 신미(1391년)에 선생 16세 가을에 목옹공을 따라 청풍으로부터 시골에 돌아왔다. 그 때 고려 운수가 다 되어 가고 왕실이 위태하였다. 목옹공이 나라 망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여 직소(職所)로부터 병을 칭탁하고 시골에 돌아왔다. 시월 달에 서울에 들어가서 포은
생을 뵙다. 뵙고 돌아올 때
포은 선생이 동구밖까지 전송하고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남으로 가니 우리
도가 남으로 간다.」하였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5년 임신(1392년)에 우리 태조 대왕 원년 선생 17세 사월에포은선생이 돌아가셔서 슬퍼했다,
생이 일찍 문하에 가서 도의를 배워 교육하는 은혜를 가장 많이 입었다. 이 때 시골에 있다가 부고를 듣고 슬퍼하며
마지 않았다. 그 후에 아들 종본에게 한 만사에 사귐은 추정한 뒤에 결탁하였고,
정념은 골육 지친과 같다는 글귀가 있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7년 갑술(1394년)에 선생 19세 2월에 부인 성산(현성주) 이씨를 맞이하다. 중대광 개성 부윤존성(存性)의 따님, 월성 부원군 경주 이성림(李成林)의 외손녀이다. 상고해 보니 강(姜)
통정 회백(淮伯)은 송헌공의
외손이요, 그 부인 이씨는 선생 부인의 언니
이다. (강회백 선생과 경재선생은 동서관계임)그 손자 진산군 희맹(希孟)이 통정공 행장을 지음에 희맹이 나이 3살 때 조모에게 길러왔다. 조모가 항상 나를 가르쳐 말씀하기를 너의 조부가 일찍부터 조카벌인 하모(河某)의 위인을 높이 보아 나의 동생으로 아내를 삼아주셨다. 하공(河公)이 진주 진곡(晉曲)에서 집을 지으려 하니 너의 조부가 말하여 이르기를 「자네는 좋은 벼슬을 지내어 나라에 큰 정승이 될 것이고, 향곡(鄕曲)에서 늙을 사람이 아니다」하고 서울에 가도록
권하였더니 뒤에 보니 그 말씀이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하더라고 하였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8년 을해(1395년)에 선생 20세 가을에 사마시와 향시 양장 및 문과 한성시에 합격하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29년 병자(1396년)에 선생 21세 봄에 사마시와 복시 양장에 합격하다.
황명 태조 고황제 홍무 30년 정축(1397년)에 선생 22세 정월에 종사랑 봉상시록사 벼슬을 주어 예문관을 지키다. 가을에 진주로부터 서울 주동에 옮기다.
뒤에 돈의문 밖으로 이사하였다.
건문황제 원년 기묘(1399년)에 정종대왕 원년 선생 24세. 12월에 통사랑 춘추관 수찬관에 승진하다.
건문황제 2년 경진(1400년)에 선생 25세 12월에 무공랑 문하주서에 승진하다. 조야기문에 참고해 보니 이해에 선생을 명하여 관제를 개정하여 문하 및 도평의사를 합해 의정부를 만들고 다른 것도 이에 따라 했다 하였다.
건문황제 3년 신사(1401년)에 태종 대왕 원년 선생 26세 4월에 선무랑 제용고 부사에 승진하다. 5월에 선교랑 공정고 부사에 옮기다.
건문황제 4년 임오(1402년)에 선생 27세 5월에 승훈랑을 가자하며 사헌부 감찰을 제수 하다. 선생이 연소 신진으로 전중에 들어가니 여러 관료가 정숙하였다
.
태종문황제 영락 원년 계미(1403년)에 선생 28세 5월에 승의랑 전농시 주부를 제수 하다. 6월에 승훈랑 봉상시 주부에 옮기다. 윤 11월에 승의랑으로 돌리어 봉상시 주부로 상서원 녹사를 겸임하다. 12월에 예조좌랑으로 상서원 직장을 겸임하다. 장남 효명이 태어났다.
태종문황제 영락 2년 갑신(1404년)에 선생 29세 정월에 예조좌랑으로 상서원 주부를 겸임하다.
7월에 돌아와 직장이 되다. 10월에 병조좌랑에 옮기고 상서원 주부를 여전히 겸임하다. 12월에 봉훈랑에 승급하여 형조좌랑에 옮기고 다시 공정고사에 옮기다.
태종문황제 영락 3년 을유(1405년)에 선생 30세 정월에 봉직랑을 가자하여 이조정랑을 제수 하다. 12월에 병조정랑에 옮기고 통선랑을 가자하다.
태종문황제 영락 4년 병술(1406년)에 선생 31세 2월에 이조정랑에 옮기고 통덕랑을 가자하다.
윤 7월에 이조정랑으로 지제교를 겸하다. 12월에 조산대부에 승급하여 봉상시 부령으로 집현전에 입직하다.
태종문황제 영락 5년 정해(1405년)에 선생 32세 12월에 봉열대부에 승급하여 안악 군수로 권농병마단련 부사를 겸임하다
.
태종문황제 영락 6년 무자(1408년)에 선생 33세 봄에 안악으로 부임하다. 선생이 처음으로 군수가 되어 오로지 백성 일에 뜻을 두어 은혜와 주휼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며, 농사일 권하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영춘정(迎春亭) 편월정(片月亭)
대수정(大樹亭) 어약정(魚躍亭) 필봉정(筆峯亭) 등 정사를 지어 사무를
본 여가에 올라가 놀기도 하며 돌아다니면서 순찰을 하여 농사를 독려하고 또 농사 노래 두어 장을 지어 부르게 하니 백성들이 즐겨 농업에 힘을 서 정치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태종문황제 영락 8년 경인(1410년)에 선생 35세 봄에 안악에 기한이 차 조정에 돌아왔다. 7월에 봉직대부 예빈시 소윤을 제수 하다.
태종문황제 영락 9년 신묘(1411년)에 선생 36세 봄에 둘째아들 제명이 태어났다.
태종문황제 영락 10년 임진(1412년)에 선생 37세) 7월에 봉직대부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경력소 경력을 제수 하였으나 부임하지 아니하다. 8월에 내자시 소윤으로 보문각에 입직하고 봉적대부를 가자하다. 12월에 전사시 부령으로 옮기어 집현전에 입직하고 세자우문학에 승진하다. 필원잡기에
「선생이 집에 계실 때,
항상 오사모(烏紗帽)에 연각을 빼 버려 쓰시고 향을 태워 고요하게 앉아
종일토록 시를 읊었다. 시가 기고하고 필법이 굳세었고, 춘방에 있을 때 시를 지어 손수 쓰니 하(河) 호정 륜(崙)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하문학(河文學)이 지어 하문학(河文學)이 쓰니 또한 인간에 한가지 보물이라하였다.」이로부터 당대의 사대부들이 시문을 구하는 자가 모두 선생이 지어 선생이 써 줄 것을 원하였다.
태종문황제 영락 11년 계사(1413년)에 선생 38세 4월에 전사시령을 제수 하여 집현전에 입직하고 세자좌문학에 승진하다. 5월에 셋째아들 우명이 태어났다. 벼슬은 동지중추요, 호는 연당이다.
뒤에 신천서원에 배향했다.
태종문황제 영락 12년 갑오(1414년)에 선생 39세 정월에 전사시 소윤에 옮기다. 3월에 경승부 소윤에 옮겨 세자좌문학을 겸하다. 9월에 사헌부 장령으로 집현전에 입직하다.
태종문황제 영락 13년 을미(1415년)에 선생 40세 2월에 중훈대부에 승급하여 중화군수 겸 평안도 좌익병마단련 부사를 제수 하였으나 부임하지 아니하다. 3월에 서운관에 옮겨 보문각에 입직하다.
태종문황제 영락 14년 병신(1416년)에 선생 41세 6월에 중직대부를 가자하여 사헌부 집의를 제수 하다. 선생이 사헌부에 있으면서 풍기를 가지고 일을 의논함이 임금 뜻에 들어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기었다.
태종문황제 영락 15년 정유(1417년)에 선생 42세 4월에 통정대부에 승급하여 승정원 동부대언 경연 참찬관 보문각 직제학 지제교 춘추관 편수관으로 군기감사 공조사를 겸임하다.
선생이 모든 대언들과 들어가 은혜를 사례하니 태종 임금이 선생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이 이 자리에 온 것을 아는가?」하였다. 선생이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또 말하기를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홀로 그 직책을 다 하므로 그 때부터 내가 잘 알았다.」하니 선생이 절하여 사례하고 나왔다. 6월에 우부대언에 승진하다. 경연 보문 춘추 제교의 직책은 그대로 하였다. 군자감사 호조사를 겸임하다. 9월에 좌부대언 집현전 직제학을 제수 하다. 경연 제교 춘추 직책은 그대로 하였다. 사재감사 형조사를 겸하다. 12월에 우대언을
제수 하다. 겸임은 이전과 같다. 돌아와 군자감사와 호조사를 맡다.
태종문황제 영락 16년 무술(1418년)에 선생 43세 7월에 좌대언을 제수 하다. 겸직은 이전과 같다. 사복시사 병조사를 겸하다. 8월에 사연에 참석하다. 세종실록에 「무술 8월 10일에 세종이 즉위하여 상왕께 헌수할 때 효령대군 보(補)와 영돈령
유정현, 영의정 한상경, 우의정 이원 및 종친, 부마, 여섯 대언들이
모시고 연회 하면서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시는 본 문집에 나타나 있다. 지신사에
승진하여 상서윤 수문전 직제학을 겸하다. 경연 제교는 그대로 겸임하다. 춘추관 수찬관으로 전사시사 이조 내시 다방 일을 겸해보다. 그 때 국가가 다사하여 계략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선생이 그 중간에서 주선하여 조심하며 삼가니 두 임금께서 대우가 높아 상을 내리심이 여러 번이었다. 광나루에 호종하다. 국조보감에 「공정 대왕이 광나루에 가 피서하고 있을 때, 상왕(上王)이 금상(今上) 전하와 동교대산(東郊臺山)에 가서 공정대왕을 맞이하여 주석을 베풀어 기쁨을 다하고 날이 저물어 연회를 파했다. 상왕이 흰말을 타고 돌아오시다가 중도에
내리어 지신사 하연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이 말이 순량함을 사랑하여 이제 임금에게 물려준다』하고 또 말하기를『우리 부자의 일은 역대에 없는 바라』」고 기록하였다.
태종문황제 영락 17년 기해(1419년)세종대왕 원년에 선생 44세 경연에 들어가 대학연의를 강론하다. 선생이 정도를 부식하고 문학을 흥기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았는데 정책을 토론하고 연구하는데 더욱 성학에 힘쓰셨다. 이 해에 세종대왕이 새로 즉위하여 경연을 열어 도를 물으니 경연
신하들이 뽑혀 들었다. 선생이
참찬관으로 동료들과 함께 토론하여 아뢰는 것이 명확하며 간결하고 해석하는
것이 정밀하며 자세하여 매일 해가 저물어서 자리를 파하였다. 국조보감에 이르기를 「원년에 처음으로 경연을 열었는데 영경연사 박은, 이원, 지경연사 유관, 변계량, 동지경연사 이지강, 참찬관 하연, 김익정, 이수, 윤회, 시강관 정초, 유영, 시독관 성개, 검토고나 김자, 부검토관 권도 등이 대학 연의를 강론하니 세종께서 배우기를 좋아하여 매일 경연에 나와 잠시라고 폐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2월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강원도 도관찰 출척사를 제수하고, 병마절제사 감창 안집 전수 권농 관학 등 사무 제조형옥 공무를 겸임하다. 원주는
할아버지 고헌공이 사랑을 남긴 곳이라 선생이 성의를 다하여 정치를 하여 가성(家聲)을 이었다. 10월에 조정에 들어와 우군도총부 동지총제 보문각 제학이 되다.
태종문황제 영락 18년 경자(1420년)에 선생 45세 정월에 예조참판으로 보문각 제학을 겸임하고 지물을 진공하고 금은을 면제하도록 신청하는 일로 사명을 받들어 중국 서울에 사신으로 갔다. 임금 앞에 하직하던 날에 선생이 청하기를 「만약 중국 조정에서 어떤 물품으로 대체할 것인가 물으면 무어라
대답해야 되겠습니까」하니
상왕이 말씀하기를 「국가에서 경을 뽑아 보내니 경의 생각여하에 있을
뿐이다.」하였다. 3월에 돌아와 잇달아 예조참판을 재수하다.겸직은 이전과 같다. 당시에 거제도 백성들이 왜적을 피해 거창 가조현에 몰려왔다. 상왕 및 임금께서 특별 명령으로 바다 안 본토로 옮기게 하고 선생을 명하여 그 일을 주장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계유년에 선생이 이(李) 중추에게 시를 지어주는 서문에 말씀하기를 「기해년 봄에 내가
예조참판으로 그것을 주장하여 시행했다.」하였고, 정안을 보면 선생이 기해년
봄에 처음으로 가선대부에 승진하여 아직 예조참판이 되지 않았고 행장에도 경자 정월에 예조참판이 되었다 하니 다시 상고해 봐야 될 일이다. 또 상고하건대, 동국역대편년에는 이 해에 집현전을 처음 설치하였다 하였으니 선생이 태종 대왕 병술년에 집현전에 입직했다 하고, 태종 무술년에 경연을 처음으로 열었다 하였는데 선생이 정유년에 경연의 관직을 가졌다 하니 편년과 정안이 서로 틀렸으니 다시 상고해야 될 일이다.
태종문황제 영락 19년 신축(1421년)에 선생 46세 10월에 전라도 도관찰 출척사로 병마 도절제사 권농 관학 사무와 제조 형옥 공사를 겸임하다.
태종문황제 영락 20년 임인(1422년)에 선생 47세 봄에 고산 삼기정 기문을 짓다. 이 해에 선생이 열 읍을 순찰하다가 고산현에 이르렀다. 현 동쪽 수리 지점에 조그마한 산이 있고, 경치가 매우 좋다. 그 중에 수석 및 늙은 소나무가 더욱 기이하였다. 선생이 올라가 구경하고 나무를 깎아 삼기라고
써 붙었더니 돌아온 뒤에
현감 최득지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선생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그 기문에
이르기를 「물 맑은 것을 보면 나의 마음 본연의 밝은 덕이 더욱 밝아질 것이요, 돌이 암암한 것을 보면 확연불발한 의지가 더욱 굳게 될 것이요, 소나무가 늦게 푸른 것을 보면 그 곧은 절개가 더욱 높아질 것이니 이 산의 세가지 무럭ㄴ이 마음을 잡고 천성을 수양하는 기틀이 될 것이다,」하였다. 장흥에 도착하여 장녕성 기문을 짓다. 성(城)은 곧 장흥부 성안에 수령현과 합한 까닭에 장(長) 녕(寧) 두 자로 이름하였다.
9월에 남원에 도착하여 산동에
유람하고 시를 지어 돌에 새겼다. 시는 본 문집에 나왔다. 그 뒤 을축년에 감사 한전이 그 글자가 다 떨어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어 석공을 명하여 다시 새기고 그 사실을 기록하기를 「산동(山洞)은 남원 중방현에 있다. 하(河) 감사가 마침 중방현 객사에 잠자는데 어떤 노인이 꿈에 나와 고하기를 나의 다섯 손자가 그대의 반찬감으로 잡혔으니 살해하지 말기를 원한다」하고 시를 지어 주는 것이다. 놀라 깨어 좌우 사람에게 물어보니 과연 다섯 마리 산 잉어가 있는지라 곧 명령하여 놓아주고 그 못 위에
가보니 구름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황룡이 처음에는
왼쪽을 들어내고, 그 다음은 오른쪽을 들어내고, 끝에 머리를 들어내니 말머리 같으며 흰 수염에 검은 뿔이었다. 오랫동안 쳐다보고는 흔연히 가 버렸다는 전설이 낭자하다. 그러나 선생의 시에는 그 말씀이 없으니 선생의 도량을 더욱 상상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봉류설에 보면 이 사실을 기록하기를 감사 하모(河某)라 하고 이름은 말하지 않았으며 또 말하기를 「감사가 용을 보고 죽을까 두려워했다」하니 이 것은 잘못 들은 것이다.
12월에 병조참판으로 소환되어 돌아왔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수래채를 잡고 만류하며 흙과 돌로써 길을
차단하니 은덕을 이루었다.
태종문황제 영락 21년 계묘(1423년)에 선생 48세 3월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 하다. 선생이 사헌부 장관이 되어 탁한 무리는 격감하고 맑은 사람은 등양하며 간사한 무리는 배척하고 정대한
군자는 부식하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하여 무릇 사대부로 물질을 탐하고
여색에 음란하여 행실이 없는 자는 조금도 용서없이 공격하니 조정이 그 관계로 엄숙하게 되었다. 글을 올려 불교를 배척하다. 그 때 고려 말년의 폐단을 이어 불교를 신앙하여 벼슬과 토지를 주는 규정이 있었다, 선생이 분개하여 글을 올려 절을 널리 짓고 토리를 시주하고 노비를 주는 것이 그릇됨을 말하고 서울에는 두 절만 두고 각 도에는 두 세 곳에 지나지 못하게 하며, 시험보이는 범을 없애 버리고 승직에 대한 교서를 내리지 말기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그 의논을 내리니 대신들이 다 옳다 하여 곧 명령하여 조계, 화엄 등 칠종을 합해 선·교
양종을 만들고, 각 도에는 36개소의 사찰만 남겨두어 토지를 요량하여 주고,그 나머지는 다 없애버렸다. 진산군 강희맹이 선생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 때 세종대왕이 정치에 뜻을 두시고 모든 대신들이 임금을 도와 선생의 말씀대로 시행하였으니 어찌 우리 도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육충경공 묘지를 짓다. 유 공의 이름은 량인데 선생의 사위 경생의 아버지이다.
태종문황제 영락 22년 갑진(1424년)에 선생 49세 4월에 형조참판을 제수 하다. 12월에 중군 도총제를 제수하고 동일에 또 경상도 도관찰 출석사를 제수 하여 병마 도절제사를 겸임하다. 충간공 남지가 지은 선생 신도비문에 말하기를
「세종께서 정치에 정신을 가다듬고 모든 옥사를 더욱 삼가 조정 관료 중에
크게 쓸 만한 사람을 골라서 마음 속에 두어 반드시 지방장관을 시켜서 그 재능을 시험하였다. 영남지방은 신라의 옛 강토로 지대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다스리기 어렵다는 곳이다. 을사년에 대사헌 하공(河公)을 명하여 가게 했는데 부임하자 정치가 밝아 성적이 드러나게 되었다」하였다. 정안을 상고해 보면, 선생이 경상도 도관찰사가 된 것이 갑진년 12월 4일인데 비문에는 을사라 하였으니 그 이듬해에 부임한 것을 말한 것 같다.
인종 소황제 홍희 원년 을사(1425년)에 선생 50세 봄에 경상도 관영에 부임하다.
그 때 선생 양친이 다 팔십 가까운 연세였다. 선생이 경상도에 관찰사가 되었고, 그 아우 부가 또 고양 현감으로 말미를 받아 함께 오니 사람들이 다 영화롭게 여겼다. 막하의 보좌관을 골라서 보내주기를 조정에 청하다. 조정에서 남지를 선택하여 경상도 도사로 보냈다. 남공이 지은 신도비문에 말하기를 선생이 이미 부임하여 판결이 모두 적당하였다, 하루는 오래 된 문적을 열람해보니 크고 작은 일이 밀려 있는 것이 한 상자나 되는 지라 조정 관료 중에
재간이 있어서 판결이 참여할 만한 사람을 선택해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의심나는 일은 판결하는데는 선생이 아주 넉넉한 것인데, 특히 겸손하여 자신이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은 혹은 하나의 일이라도 잘못되어 임금님이 부탁한 바를 저 버릴 까 걱정한 것이다. 불민한 내가 막하판으로 가게 되어 예가 끝난 뒤에 내가 할 만한 일은 내가 하고 의심나는 일은 선생에게 품신하니, 선생도 이의가 없었다. 이리하여 기국이 있다는 칭찬을 받고 나이를 가리지 않고 사귐을 허락하여 주는 것이다. 비록 선생은 나를 잘못 알았지만 나는 영남이 다행함을 얻은
것이 크다 하였다.
윤 7월에 본 도의 영주제명기에 서문을 짓다. 서문은 본 문집에 나왔음. 8월에 예안에 도착하여 추흥정 기문을 짓다. 정자가 그 고을 객사 동편에 있는데 군수 박결이 건축하였다. 선생이 추흥정이라 명명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함안에 도착하여 청범루에 오르다. 누는 곧 우승범이 건축한 것이다. 우 공이 선생에게 누 이름을 청하니 선생이 청범이라 명명하였다. 홍여방이 기문에 말하기를 「군수의 이름을 따서 누 이름을 한 것은 그 사람이 잊어 버리지 말라는 것이요, 청을 덧붙인 것은 그 사람의 덕을
사모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의령 현에 도착하여 기문을 지은 것이 있다. 여지승람에 상고하면 푸른 강, 큰 들, 높은 산, 무성한 숲이라는 기문에 말을 하였으나 전문은 전하지 않음. 시는 본 문집에 나왔다. 거제 무이루에 올라 시를 짓다. 이에 앞서 거제 백성들을 다시 옮길 때 선생이 예조참팜으로 그 일을 주장하여 시행하였다. 이 때에 선생이 감사가 되자 임금 뜻을 받들어 본 현에 군인이나 민간이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일체 편의에 따라 조처하여 무마를 잘 하니 고을 안이 크게 소생되어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았다.
선생이 시를 지었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바닷물이 고요하니 요망한 기운이 쉬고, 시절이 맑으니 교화가 날로 새롭구나. 한 고을 안에 밥 짓는 연기 풍족하니 다 태평시절의 백성이로다.
진주에 도착하여 도사 남지와 촉석루에 오르다. 촉석루(矗石褸)가 고을 남강
위에 있다. 명신록에 상고하건대,
선생이 남공과 진주에
와 산천과 운물의 경치에 놀라니 남공이 용모를 바루고 말하기를 「산천 경치는 비록 좋으나 높은 관리가 너무 악하다」하니 선생이 크게 웃을 뿐이었다. 이 것으로 사람들이 그 아량을 탄복하였다.
임금 명령을 받들어 경상도 지리지를 편찬하다. 그 때 임금께서 춘추관에 하교하여 각 도 감사를 시켜 지리지를 수집하여 올리라 하였다. 선생이 그 뜻을 받들어 대구 군수 금유와 인동 현감 김빈으로 하여금 열 벌을 편찬하여 올렸다, 이 때 경력 남지, 판관
정보개, 동도 윤 오식 등이 한 벌을 등사하여 본영에 비치하기를 청하니
선생이 그 말에 따르고 서문을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왕명을 받들어 사서오경대전 및 성리대전 등 서적을 출판하다. 일부는 교서관에 올려 보내고 일부는 본영에 미치하였다. 12월에 이조참판으로 소환되어 돌아왔다.
선종장황제 선덕 원년 병오(1426년)에 선생 51세 정월에 충청도 도관찰 출척사를 제수 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므로 예조참판에 전임하다.
선종장황제 선덕 2년 정미(1427년)에 선생 52세
8월에 인순 부윤을 제수 하였다가, 동일에 평안도 도관찰 출척사 관학권농사를 제수 하여 평양 부윤을 겸임하다.
선종장황제 선덕 3년 무신(1428년)에 선생 53세 봄에 어떤 일에 연좌되어 천안 군으로 귀양가다.
비문에 말하기를 「천안에 귀양간 것은 말한 자의 과실이고 선생의 과실이 아니나 선생은 조금도 기미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하였다. 선생이 두 번 군수가 되었고, 네 번 감사가 되어 정치가 청렴하고 공평하여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을 첫째로 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사랑하고, 간 뒤에도 사모하여 마지 않는다.
선종장황제 선덕 4년 기유(1429년)에 선생 54세 봄에 천안으로부터 불려 돌아오다. 비무에 말하기를 임금께서 선생의 충성을 알고 일년이 못되어 불려오고 귀양살이할 때도 넉넉하게 하시니
대개 특이한 은혜로 한 것이다. 4월에 가정대부로 승급하고 병조참판을 제수 하다. 8월에 황해도 관찰출척사를 제수 하여 부임하지 않고 우군도총부 총제에 전임하다.
선종장황제 선덕 5년 경술(1430년)에 선생 55세 윤 12월에 자헌대부로 승급하여 형조판서를 제수 하다. 상공 허조와 명령을 받들어 오례의를 편찬하다. 명 나라
홍무의 옛 제도 및 동국의례를
참작하고 품신하여 재가를 청하였다.
선종장황제 선덕 6년 신해(1431년)에 선생 56세 2월에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 하다. 그 때 임금께서 즉위하신 지 오래 되어 국가 일에 익숙하여졌다. 선생의 재주와 기국을 알아보고 매양
장려하고 발탁하여 대우가 날마다 높아졌다. 선생의 문장은 전아 하였고,
학문은 정밀하여 당세 선비의 종주가 되었더니 이 때에 곧 문병을 잡게 되었다. 6월에 어머니 정경부인 상을 당하다. 정경부인이 원 나라 지정 정해년에 출생하여 이 달 2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5세 였다. 가을에 정경부인 장례를 양주 풍양 팔현동에 지내다.
선종장황제 선덕 8년 계축(1433년)에 선생 58세 8월에 삼제가 끝나자, 삼군 도진무 장금부를 제수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대사헌을 제수 하다. 선생이 사헌부
장관이 된 시일은 정안에는
8월이라 하였고, 행장에는 12월 이라 하니 다시 상고해야 될 것이다. 12월에 아버지 목옹공 상을 당하다. 목옹공이 임신년 고려가 망한 뒤로는 세상일을 사절하고 숨어 있기를 결심하였다. 모든 아들이 서울에 벼슬할 때에 봉양하기에 편리를 위해 모시고 서울에 이르자 목옹공이 의리상 성안에 들어오지 않고 돈의문밖에 집을 빌려 있었다. 선생이 거주하는 주동이 거리가 멀다하여 곧 집을 옮기어 모든 형제들과 성의를 다해 봉양하고, 그 옆에 집 한 간을 지어 구경당이라 하였다. 양친이 다 건강하여
병환이 없고, 나이가 다 팔십이 넘았다.
세시 명절에 술잔을 받들어 헌수하고, 부모님 마음을 즐겁게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시의 사대부들이 흠탄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어 시를 지어 노래부르기도 하였다. 국로인 교은 정이오 같은 이는 절구 시를 지어 앞장서니, 양촌 권근, 제학최흥효, 판원 조말생, 참판 신인손 등이 연달아 화답하였으며, 청향 윤회가 서문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목옹공이 지정(至正) 경인(1350년)에 출생하여 이 달 12일에 돌아가니 향년이 84세, 선생이 잇달아 상주가 되어 방금 쇠하여 가는 연세이지마는 전후에 거상 하는 정(情)례를 다 지극하게
하니 사람들이 효자라 하였다.
선종장황제 선덕 9년 갑인(1434년)에 선생 59세 봄에 목옹공 장례를 정경부인 묘소 오른 편에 지내다. 여묘살이는 삼년 했다
영조예황제 정통 원년 병진(1436년)에 선생 61세 2월에 상복이 끝나다. 3월에 구경당을 수리하여 영모라고 현판을 고치다.
선생이 이미 외직에 있을 때 목옹공이 거처하던 집을 수리하여 띠로써 위를 덮고 거기에 거처하였더니 다시 영모라 이름하여 부모를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아들과 조카들이 기와로서 덮기를 청하니 선생이 탄식하면서 말씀하기를 「선인(先人)이 거처하던 그대로 뒤 사람에게 물려주어 선인의 검소한 덕을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않은가 고치지 말라」하였다. 목옹공이 송도 서울에 벼슬할 때 송헌공이 거처하던 옛 집을 수리하여 영모라 현판을 붙이고 그림을 그리어 족자를 만들어 선세(先世)에 검소한 덕을 표현하고,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뒤에 다시
수리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옛 제도에 따라 하라』하였다. 선생이 영모라 현판하고 기와로 덮지 못하게 한 것이 유래가 있는 것이다. 4월에 형조판서를 제수 하다.
6월에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하다. 부윤 홍여방이 시를 지어 하례하기에 선생이 그 시를 차운하다. 강르에 의금부 제조가 되다. 판서 황보인, 판서 심도원과 함께 제조사 되어 겨울이 지나도록
일을 보았다. 11월에 수문전에 제학을 겸임하다. 선생이 김학사 시를 차운한 글에 「선조께서 갓 끈을 날리던 곳에 이제 내가 뒤를 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 고헌공이 일찍 수문전 제학을 지낸 까닭에 한 말이다.12월에 예조판서로 수문전 제학을 겸임하다.
영조예황제 정통 2년 정사(1437년)에 선생 62세 8월에 이조판서로 수문전 제학을 겸임하다.
10월에 정헌대부에 가자하다. 12월에 이조판서로 보문각 대제학을 겸임하다. 이 해에 양남지방 공세법을 정하다. 그 때 국법이 일정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재상 몇 사람과 함께 공세 연분법을 결정 시행하였다. 토지는 육등분으로 연사는 구 등분으로 하여 그 공세를 높이고 낮추게 하여 전라도.경상도 양남부터 시행하였다.
영조예황제 정통 3년 무오(1438년)에 선생 63세 시를 지어 부윤 류사눌의 편지에 답하고 겸하여 안주며 술을 보내다. 유공(柳公) 편지에 말하기를 지난 병진년에 운수가 크게 흉하였다 하니 신자근이 이 말을 듣고 상화를 찌고 좋은 술을 보내 주어 그 해는 무사히 지내셨다. 운수를 점치는 사람이
또 말하기를 올해 무오 운수도
어렵다고 하니 합하(閤下)가 신공(申公)의 은혜와 같이 하여 주면 면할
수 있다하기로 선생이 술과 고기를 보내면서 시를 지어 희롱하였다. 그 시에 어찌 무오년만 잘 지낼 뿐인가, 감히 안주와 술을 보내어 기리 수 하기를 비노라고 한 말이 있다. 10월에 의정부 좌참찬에 승진하여 수문전 대제학을 겸임하다. 그 때 북쪽 오랑캐가 해마다 침범하는지라 조정에서 최윤덕, 이순몽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였으나 남은 걱정이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변방 일에 유의하여 날마다 삼사, 육경 등 문무대신을 대리고 군사
일을 강구하여 아침이나 저녁으로 쉬지 않았다. 영상 황희, 좌상 맹사성, 우상 권진, 찬 중추 하경복, 이판 허조, 병판 최사강, 호판 안순, 예판 신상, 공판 조계생, 찬성 이맹균, 성억, 참찬 신개 및 선생, 함길도 관찰사 정흠지, 절제사 김종서 등이 혹은 어전에서 직접 대답하기도 하고 혹은 차자로 의논하여 마지않았다. 12월에 세자 좌빈객을 겸임하다.
영조예황제 정통 4년 기미(1439년)에 선생 64세 6월에 좌참찬으로 이조사를 겸하고, 세자 좌빈객도 그대로 겸임하다. 그 대 임금이 사형수를 용서하려 했다. 선생이 정승인 황희, 신개, 찬성인 이맹균 등과 형벌을 가볍게 하면 선량한 백성에게 해가 미치는 폐단을 아뢰면서 정 나라 대숙이 관대하게
하다가 해를 입는 것과
자산이 관대하고 맹렬한데 대하여 비유한 사실을 들어 말하고, 법률조문에
따르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그 말대로 따르셨다. 사맹삭 반록의 제도를 시행하다. 선생이 모든 재상과 더불어 임금에게 품신하여 정했다.
영조예황제 정통 5년 경신(1440년)에 선생 65세 5월에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에 승진하여 수문전 대제학 판이조사를 겸임하다. 그 때 이판 최부가 사람을 잘 못 추천하여 벼슬을 주었다. 임금께서 사정전에 나와 상참례를 받으실 때 다사헌
정갑손이 아뢰기를 「판서 최부는 본래 전형을 잘 못 하지마는 하모(河某)는
사체를 잘 알면서 이런 과오가 있으니 국문하기를 청합니다.」고 하는 것이다. 선생이 최부와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의 책임이 판이조사에 있으니 감히 알지 못했다 하겠습니까?」하고 죄(罪) 주기를 청하니 임금게서 과오가 없음을 알고 화한 얼굴빛으로 두 사람 사이를 풀 게 하였다.
영조예황제 정통 6년 신유(1441년)에 선생 66세 5월에 장자 효명이 세상을 떴다. 선덕 말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 때에 군자부정으로 세상을 떴다. 나이는
겨우 39세 였다. 뒤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9월에 좌찬성에 승진하다. 겸직은 전과 같다. 이운의 편지에
답하다. 또 시를 지어 보냈는데 「가을 바람 8월이 아직도 염천 같은 곳에 있구나. 나 같은 게으른 사람이 찬성 벼슬이 부끄럽다」는 구절 있다.
영조예황제 정통 7년 임술(1442년)에 선생 67세 3월에 임금께서 이천 온정에 행차할 때 모시고 가다. 이(李) 승지 승손(承孫)에게 하례 하는 시가 있다. 비해당 시첩에 잇달아 화답하다. 비해당은 곧 안평대군 용(瑢)의 호이다. 대군이
동서당 고첩실에서 송(宋) 나라 영종(英宗)이 쓴 팔경시이라 하고 당세에
시 잘 짓는 사람에게 청하여 시를 지어 노래부르기를 하였다. 선생이 집현전 예문관의 모든 학사 성삼문, 최항, 정인지, 남수문 등 17인과 함께 시를 지어 친필로써 시첩을 만들었다. 중국 사람 옹정춘이 팔분체로 그 위에 쓰기를 해우기관이라 하였다. 각품 행 수법을 정하다. 이것도 선생이 모든 재상과 임금 뜻을 받들어 정한 것이다. 그 때 임금께서 정치체통을 더욱 밝혀서 무릇 나라의 크고 작은 사무는 정부에 위임하고, 인물을 전형하여 벼슬 주는 사무는 이조에게 전임하였다. 선생이 들어가서는 정부에 협찬하고, 나와서는 이조 사무를 맡았다.
청백한 것으로 스스로 격려하여 공무 이행에 마음을 다 하고, 관직을 중하게 여겨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을 억제하였다. 일을 처리하는데, 미리 계획을 세우고 시행한 뒤도 생각해봄으로 과실이 없었다. 임금에게 무엇이든지 아뢸 때는 언어가 정당하여 임금 뜻에 들어 사랑이 날로 높아졌다.
영조예황제 정통 8년 계해(1443년)에 선생 68세 3월에 임금을 모시고 온양에 갔다. 7월에 좌찬성으로 호조 일을 겸해 보았다. 선생이 평소에 사대부를 예로써 접대하므로 하여 문전에 기다리는 손님이 없었다. 이조 일을 전후 5년 동안에
맡아봄에 일체 사처에서 면회를 받아들이지 않아 공론에 배척을 당하기까지
해도 뜻을 움직이지 않았다. 성품이 청탁하는 일을 싫어하므로 「널리 맞아들이는 것은 다만 밝은 시대에 도움이 될까 한 것이요, 쓰고 버림을 어찌 한 사람의 보고 듣는 것으로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시를 지은 것이 있다. 이 때에 호조로 옮긴 것이다. 전품을 개정하다. 즉 토지는 오 등분, 연사는 육 등분으로 하는 법이다. 선생이 호조 일을 보면서 모든 재상들과 함께 임금에게 품신하여 정했다.
영조예황제 정통 9년 갑자(1444년)에 선생 69세 3월에 임금을 모시고 초정에 갔다. 그 때 임금께서 풍환으로 청안 초정에 거동하셨다. 선생이 이개, 신숙주, 황수신, 이사철 제공 및 안평대군 용(瑢)과 함께 시종 하여 서로 화답 한 시가
있다. 초정에서 일로 인해 먼저 돌아와 예천을 축하하는 시를 지어 시종
하는 모든 친우에게 부치다. 시는 본 문집에 나와 있다. 윤 7월에 좌찬성으로 승정원 도승지를 겸임하다. 행장에 기재된 바의 이력은 이러하다. 정안인즉 이 해에 도승지를 배수하였다는 비목이 없으니 의심스런 일이고, 또 정안에 정통 팔년 칠월을 윤달이라 하였으니 잘 못된 것이다. 12월에 숭록대부에 승진하고 좌찬성은 그대로 이다.
영조예황제 정통 10년 을축(1445년)에 선생 70세 정월에 대광보국 숭록대부를 가자하여 의정부 우의정 영 집현전경연사 감 춘추관사 세자부에 승진하다. 선생이 처음 벼슬할 때부터 재상 물망이 있었다가 이 때에 정승이 된 것이다. 임금께서
근심하고 부지런하므로 병이 나서 세자에게 명하여 모든 정사를 참관하게
하였다. 선생이 수장 황희, 좌상 신개와 일심으로 협조하여 임금께서 마음을 기우려 위임하였다. 나이가 70이 됨으로 궤장을 내려주다.
영조예황제 정통 11년 병인(1446년)에 선생 71세 수릉관 남지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이월에 소헌왕후가 돌아가 인산(因山)을 치루고 수릉관 할 만한 사람이 어려웠다. 남공이 친상을 마치고 대궐 앞에 엎드려 수릉관을 자청하다가 물의를 크게 입게 되었다. 선생이 시를 지어 이해를 시키니 일시
명공들이 잇달아 화답하고 참의
유의손이 서문을 지어 칭찬하니 물의가 그쳤다. 남공이 선생 비문에 말하기를
「지난 병인년에 내가 소헌공왕후의 능소를 지킬 때 선생이 시를 지어 주니 함께 벼슬하던 제공들이 모두 화답하여 시축이 이뤄져 상자 안에 간직하여 가보로 삼으려는데 이제 선생의 비문을 지으려 하니 더욱 감개가 깊다」하였다. 명신록 정문성 인지전에 소헌산릉 때 일을 기록하면서 영의정 하모라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영의정이 된 년월이 그 뒤 네 해만 인 경오 인즉 명신록에 잘못 된 글자가 있는 것이다.
영조예황제 정통 12년 정묘(1447년)에 선생 72세 봄에 문과 독권관이 되다. 6월에 좌의정에 승진하다. 겸임은 전과 같다. 정안에는 선생이 좌의정이 된 것이 유월이라 하고, 행장에는 정월이라 하니 참고해야
할 것이다. 가을에 전시 독권관이
되다. 강희맹 등 25인을 뽑았다. 강공이 선생의 막내아들 동추공 정려
기문을 지어 말하기를 「정묘년 가을에 문효공이 과거를 말아 보일 때 희맹이 장원이 되어 문하에 있으면서 후덕하심을 흠앙하고, 동정을 모범으로 한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였다. 중시 독권관이 되다. 집현전 수찬 성삼문 등 19인을 뽑았다. 용제총화에 말하기를 「정묘중시에 성 근보 삼문이 장원이 되고 김돈, 이개,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석형, 유성원, 이극증, 이윤보, 이성, 정창손, 김례몽 등은 다 삼 등이 되었다」운운 하였다. 9월에 정부 육조대신과 함께 성균관 명륜당에 모여 시를 지어 임금이 내려 주신 술병 술잔을 찬송하다.
판서 신석조가 성균관에서 준종을 받은 기문에 말하기를 「성균관에 청화종 술잔한 벌이 예전부터 있었는데 품질이 매우 기절 하였다. 태종대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갑에 넣어 감춰 버렸다. 정묘년 8월에 대사성 정인지가 조용한 틈을 타서 아뢰니 임금께서 흰 병 두 쌍과 흰 술잔, 그림 있는 술잔 각각 두 쌍을 임금이 잡수시는 술과 함께 내려주시는 것이다. 수일 후에 9월 9일 에 정부 육조대신들이 명륜당에 모여 모든 유생을 시험보이고, 하사하신 술잔으로 술을 돌려 서로 경축하였다. 술이 반취 되자 우의정 하공이 시를 지어 찬송하고 경대부들이
잇달아 화답하였다.」고 하였다. 행장에나 정안에는 선행이 좌의정 됨이 벌써 이 해 봄여름 사이인데 신공은 우의정이라 하였으니 의심스럼 일이다.
영조예황제 정통 13년 무진(1448년)에 선생 73세 그 때 국가가 태평한지 오랜 세월이었다. 선생이 우의정 남지와 함께 의정부에 있으면서 문화 정치를 빛나게 하여 세상 사람들이 태평시절 어진 재상이라 일컬었다. 하루는 선생이 남공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감사가 걸음이 빠르지 않았더라면 도사에게
짓밟힐 번했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경상 감사로 계실 적에 남공은 도사로서 서로 잘 지냈고,
자신이 먼저 정승이 되었다는 뜻이다.일시에 전해서 좋은 이야기가 되었다.
영조예황제 정통 14년 기사(1449년)에 선생 74세 진주 향교 사교당 기문을 짓다. 사교당은 진주 동편삼리(三里) 지점에 있다. 교관 강원량(姜元亮)이 건축하고 편지를 보내어 선생에게 기문을 청했다. 기문은 본 문집에 나와 있다. 세종31년(1449년)8월에 막내아들
우명을 군대에 보내시다 중국에 북쪽에 오랑케 경보(警報)가 있으므로 세종임금께서 걱정하여 장수(將帥)를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다 선생 자신이 정성 지위에 있어 의리상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여야 하므로 아들을 보내어 군대를 따라가게 하고 시를 지어 격려 하였다. 선생이 정승 지위에 있으므로 의리상 국가의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모두 같이 해야 된다고 생각하여, 막내아들을 군대 모집에 응하게 하여 막하에 보좌하게 하고 시를 지어서 「충성을 분발하여 나라 일을 도와 부모를 저 버리지 말라」는
말씀으로 격려하였다. 세종 31년1449년10월 05일 에 영의정 부사 영 경연 예문관 춘추관 서운관사 세자사에 승진하셨다
공종 경황제 경태 원년 경오(1450년)에 선생 75세 정월에 예시강 겸(謙) 사마 급사 순(恂) 두 중국 조사를 전송하다. 사중 사마공이 조서를 받들고 왔다가 돌아갈 때 선생이 하동 정인지, 하양 허익, 파평 윤형, 창녕 성념조, 광산 이서네, 완산 이사철, 진양 정척, 도산 고득종, 여강 이심, 한산 이계전
및 이개, 동래 정창손, 단성
김구, 취산 신석조, 동량 최항, 함종어효첨, 연산 이석형, 진산 강맹경,
단계 하위지, 양성 이예 및 이승소, 노산 이영서, 달성 서거저으 서원 한계희, 평양 박팽년 등이 각각 시를 지어 주는데 고령 신숙주가 서문을 짓고, 창녕 성삼문이 발문을 지었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중국에 가서 요해편이란 서적을 구입하여 보니 곧 예시강과 사마급사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 제공들과 지은 글이었다. 중국에 전파되어 절세의 기관이 되었다 한다. 2월에 대자암을 중수하는 것이 그르다고 논주 하다. 선생이 고려 말기에 불토를 숭상하던 폐단을 본 까닭에 항상 정도를 붙들고 사도를 물리쳐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매양 불도나 노자의
도를 숭배하는 일을 보면 극력 배척하였다. 이 달에 세종대왕이 돌아가시고 문종 대왕이 즉위하여 대자암을 중수하려 하니 선생이 첫 정사에 사도를 숭상하여 벌써 철폐한 사찰을 수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해서 굳이 논쟁하였다. 임금께서 선생을 사부로 있을 때부터 존경하였으므로 대자암 수리를 하지 않았다. 선생이 문종 대왕이 즉위할 때 정승 있으면서 새로운 정사를 보좌하였다. 서회 시에 「정일한 마음을 주고받을 때, 처음 뜨는 해를 부축하여 함지에서 올라온다. 덕이 모자라 물론에 어긋남이 혐의 이지만 나이가 높아 조정 체모에 맞는
것이 다행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가을에 과거를 맡아 보이다. 권람 등 33인을 뽑았다. . 서대를 신군 석조에게 전해주다. 필원잡기에 기록하기를 「국초부터 의정부에 삼 정승이 차례로 전해 주는 서대 한 벌이 있었다. 반드시 문생에게 전해 주는 것이 예가 되어 좋은 사람을 얻지 못해 실수하면 세상에 비방을 받게 되므로 경솔하게 전해 주지 못한다. 익성공 황희로부터 문경공 허조에게 전해 선생에게 이르렀고, 또 문희공 신석조에게 전해주었다. 그 뒤에는 전하지 않았다.」하였다. 선생이 서대를 전해 주는 시가 있으니 본 문집에 나와 있다. 늙고
병으로두 번이나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빌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다.
공종 경황제 경태 2년 신미(1451년) 문종대왕 원년에 선생 76세 정월에 진양하씨 세보(世譜)를 편수하다.
선생이 선세에 쌓아온 음덕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되고 종손과 지차의 친소는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세보 두권을 편수하여 상집.하집이라 이름하여 후세에 물려주고 서문을 붙여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2월에 자경잠을 짓다. 선생이 소시로부터 학문할 때 공경에 종사하여 경재라 호를 하고, 벽에 주자의 경재잠을 써 붙이어 항상 눈에 보이도록 하였다. 일용 행사에 고인으로 스스로 기약하여 재산도 모으지 않고, 성색에도 동요 않아 집안이 화목하였다.
언제나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사당에 절하였다. 수상이 되고 늙어서도 폐하지 않았으며, 사무가 복잡하거나 큰 추위 큰 더위라 해서 변함이 있지 않았다. 앉으면 반드시 대궐을 향하고, 손에는 책을 놓지 않아 좌우에 도서를 쌓아 두고 담박한 생활을 하였다. 청소 검약함이 천성에서 우러났으며, 더욱 이욕의 마음이 사람을 해하는 것을 경계하여 잠(箴)을 지어 스스로 깨우쳤다. 그 대략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귀하게 되면 화가 가까워지고 부하면 어질지 못하게 되나니
어찌 운학에서 정신을 수양하는 것만 같으리요.
궁벽한 안자의 마을에도 즐거움은 그 속에 있었으며,
세 갈림길 도연명의 동산에도 밝은 달과 맑은 바람 있었네.
선현들도 그러하였거늘 하물며 소유에 있어서야.
팔 구간 집이면 쇠잔한 몸을 용납할 수 있고,
밭 수십 이랑이면 기갈을 면할 수 있으리니,
나는 내 분수를 편안히 여겨 이욕을 쫓지 않으리라.」
연세가 많고 지위가 높아도 청렴 결백으로 스스로 격려하여 몸을 다스리는 데 게을리 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 3월에 휴가를 받아 진주에 돌아와 응석영당을 중수하여 아버지 목옹공 초상을 함께 모시고 보장고를 세우다. 영당이 집현산 응석사에 있으니 즉 선생의 증조 할아버지 송헌공
및 할아버지 고헌공의 초상을 모신 곳이다. 이 해에 선생의 동생 대간공
결이 벼슬이 갈리어 서추(西樞) 군직인데 다른 벼슬을 할 동안에 봉급을 받게 하는 것에 붙이니 선생이 함께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와 영당을 중수하고, 목옹공 초상을 함께 모시고 재물을 내어 제사 받들 자본을 세워 그 이름을 보장고라 하였다. 시를 지어 벽에 붙이니 대간공이 그 시에 화답하고, 완역재 강석덕, 승지 강맹경, 돈령부사 이명신, 좌의정 황보 인, 찬성 김종서, 참찬 안숭선, 이조판서 정인지, 도승지 이계전, 우찬성 정분 등이 차운했다. 여름에 문과 독권관이 되다. 홍응 등 40인을 뽑았다.
겨울에 노병으로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다가 굳이 사양하여 곧 치사(致仕) 하게 하다. 선생이 다섯 임금을 섬기었다. 은혜에 감격하여 더욱 청백하고 힘써 근신했다. 오년 동안 이조를 맡았고, 칠년동안 정승이 되어 나랏일을 걱정하기를 자기 집일처럼 하여 시종에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비록 벼슬을 그만둘 나이에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임금께서 대우가 더욱 융숭하여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가 이 때에 허락하였다.
공종 경황제 경태 3년 임신(1452년)에 선생 77세 2월에 승은정 기문을 짓다. 금성대군 유(瑜)는 세종대왕의 여섯째아들이다. 임금이 하사한 서운방 화산
밑에 정자를 지어 승은정이라 현관을 붙이고 선생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계시면서 나이 높고
병이 깊어도 날마다 향을 태우고 정좌하여 글 읊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시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붓을 잡아 당장에 써주는데 글 운치와 필법이 다 묘한 지경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보배와 같이 귀중하게 여겼다.
공종 경황제 경태 4년 계유(1453년) 단종대왕 원년에 선생 78세 7월에 병환이 났다. 임금께서 와보시고 국사를 물은 뒤에 또 「집안에 무슨 한이 없는가」고
물었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국가가 태평하고 조야가 무사하며 외람 되게 은혜를 입어 영화가 지극하오니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어리신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아서 일이 어렵고도 크니 신이 죽더라도 잊어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8월 15일 신해에 성서 정침에서 고종 하시다. 불사(佛事)는 하지 말기를 유언하였다. 부고를 들으시고 임금께서 슬퍼하시어 삼일간조회를 걷어치우시고 부의를 보내고 제사를 내리시다. 10월에 인천 소래산 남향 자리에 장사지내는데 임금께서 명령하여 관에서 일체를 준비하게 하시다. 그 때 맏아들 효명(孝明)은
벌써 죽었고, 둘째 아들 제명(悌明), 막내 아들 우명(友明), 승사손자 복산(福山)이 예문에 의하여 장사지내고, 우명은 삼년 여묘살이를 하였다.
공종 경황제 경태 5년 갑술(1454년) 시호를 문효(文孝)라고 하였다.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결의해 올리기를 근학호문이 문(文)이고, 자혜애친을 효(孝)라 한다. 문종대왕 묘성에 배향 하다. 사부가
되었던 옛 은의로써 한 것이다.
영종예황제 천순 7년 계비(1463년)
세조대왕 9년. 9월에 행장이 이룩되다. 진산군 강희맹이 지었다. 임금이 명하여 청백리에 기록하고 충효문(忠孝門)이라고 정려(旌閭)하다. 광묘(光廟)가 즉위하면서 선생의 명덕을 존중하여 막내아들 우명을 첨추에 승진시켜 도진무로 불러 올렸고, 이 때에 명하여 선생을 청백리에 기록하고 또 정려(旌閭)하게 하였다.
헌종순황제 성화 3년 정해(1467년)
세조 13년. 2월에 영당을 건축하다. 막내아들 우명이 천성이 효도하고 또 그림을 잘 그리어 일찍이 선생 및 정경부인 초상을 그려 두었다. 정경부인이 돌아감에 선생 묘소 왼편에 장사지내고 여묘살이 하여 이 해에
삼년상을 끝마치고 선생의 영당을
묘소 옆에 지어 정경부인 초상을 함께 모시고 위토를 두어 춘추로 제사드릴
자료를 삼았다. 이 일이 삼강행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홍치 을묘에 추후해서 우명의 초상을 모셨다.
신종현황제 만력 36년 무신(1608년) 선조대왕 41년. 가을에 영당을 합천 야로 현에 옮기다. 이에 앞서 막내아들 우명이 인천에 살면서 영당을 수호하였으며, 그 후에 후손 세마 혼(渾), 주부 응보가 초상을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합천으로 옮겨 모셨다.
임진년에 인천에 있는 영당이
왜란을 만나 선생 초상을 잃었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후손인 세마 혼이
종질 되는 응보, 경위 등을 데리고 영당에 와 뵈었다. 꿈에 선생이 말씀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소래산 북쪽 바윗돌 사이에서 곤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찾아가 과연 초상을 찾았다. 그 이유는 왜적이 가져가려다가 등이 점점 무거워져 산을 넘어 갈 수가 없게 되자 되려 이곳에 두고 그 바윗돌에 쓰기를 이는 천하에 명재상의 초상이라 하였다.
신종현황제 43년 을묘(1615년) 충효문을 합천에 옮기다. 야로 영당 앞. 10월에 영당을 사액하여 타진이라 하다. 그 때 소래산 정려문이 세월이 오래 되어 퇴폐 해졌다. 일시에 경사(卿士)들이 의논하기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영당
소재지에 옮기는 것이 옳다하여
이 달 14일에 전성군 이준, 지사 이시언, 응천군 박진원, 여성군 이지완,
동중추 송영구, 전 좌랑 하응관, 전 찰방 하혼, 사직령 박채, 봉사 하렴, 판관 하언정, 전 주부 하응보, 전 주부 하종해, 전 참봉 하대의, 사과 하진, 첨지 정진철, 전 현감 유세온, 장사랑 하응호, 전 헌남 조정립, 유학 하경신, 종사랑 하경함, 하립 등이 정려문을 옮길 뜻으로 예조에 글을 올려 임금에게 아뢰니 허가가 내렸다. 이준 등이 잇달아 영당에 사액 하기를 예조에 신청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허락하시고 특지로 사액하여 타진이라 하였다.
희종철황제 천계 4년 갑자(1624년)인조대왕2년 인조대왕2년. 3월에 합천 신천서원을 낙성하다. 이 해에 합천 선비들이 합의하여 사당을 세워 선생의 막내아들 연당공 우명을 배향하였다.
의종황제 숭정 13년 경진(1640년) 인조 18년. 임금께서 관원을 보내어 사제하다.
상신 김류의 아뢴 바에 의해 한 것이다. 이 해에 영남 관찰사 구봉서가 외 후손이 되므로 수찰하는 길로 합천에 와 타진당 초상을 뵙고 초본이 떨어진 것을 안타까이 여겨 봉급을 떨어 다시 화상을 모사 하여 글을 지어 찬하기를 「삼한의 참된 기운이요, 한 시대의 으뜸가는 신하이다. 경륜은 당시에 이룩하였고 공덕은 뒷사람이게 비쳤다」하였다.
숙종대왕 34년 무자(1708년) 봄에 문의에 우륵서원을 낙성하다. 이에 앞서 선생의 종손 증 승지 태수가 서울로부터 문의(文義)에 옮겨왔다. 후손 필청(必淸)이 선생 영당을 건축하고, 합천에 모신 초상을 본떠서 선비들과 의논하여 제사 드리는 곳으로 하였다. 이 해에 임금이 관원을 보내어 묘소에
사제 하다.
숙종대왕 44년 무술(1718년) 2월에 진주 종천서원에 봉안하다. 서원은 즉 선생의 동생 대간공 결의 후손 겸재 홍도, 태계 진을 함께 향사를 받드는 곳으로 이 때에 사림들이 선생의 본 고향에 봉안하는 곳이 있어야 된다 해서 서원 윗자리에 봉안한 것이다.
영조대왕 2년 병오(1726년) 봄에 안악 숙청당을 낙성하다. 안악(安岳)은 즉 선생이 사랑을 남긴 곳이다. 선비와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초상을 봉안하였다.
정조대왕 10년 병오(1786년) 겨울에 장연 반곡서원을 낙성하다. 해서(海西)는 곧 선생의 명성이 남아 있는 곳으로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이기에 숙청당을 옮겨 서원을 세웠다.
정조대왕 21년 정사(1797년) 8월에 임금께서 관원을 보내 묘소에 사제 하다. 임금께서 친필로 제문을 지어 승지 송전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순조 19년 기묘(1819년) 봄에 타진당을 옮겨 세우다. 타진당이 본래 서원 서쪽에 있었는데 지초가 무너졌으므로 사림(士林)들이 합의하여 서원 동편에 옮겨 세웠다. 그 공사에 군수 서봉보가 힘을 도왔다. 타진당에 제물 품목을 만력 을묘년 부터 관에서 제공하는 정식이 있었는데 뒤에
점차로 줄어졌다. 이 해 가을에 예판 김로경이 본 도에 통첩하여 예전 의식대로
복구하라고 지시하여 그 뒤 네 해가 되던 계미년에 군수 이로준이 의식을 복구하였다.
순조 21년 신사(1821년) 봄에 무주 백산서원을 낙성하다. 호남지방은 선생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자취를 남긴 곳이다. 후손 한범, 한영, 지광, 경조가 사림과 합의하여 서원을 세워 봉향하였다.
순조 25년 을유(1825년) 겨울에 우륵 영당의 진상을 다시 모사 하다. 선생과 정경부인 영상을 모사한지가 거의 백여 년이 되어 티끌과 끄름이 쌓이고 종이가 부풀어 허물어지니 자손 된 마음으로 어찌 유감이 아니겠는가? 후손 권(權)과 인혁, 종황이 정성을 다하여 모사하고, 후학
의령 남승원이 삼가 글을 지었는데 글은 문집에 실려있다.
순조 26년 병술(1826년) 여름에 경재문집이 간행 되었다. 선생의 시문(時文)이 병화에 잃어 버린 것이 많은데 오대손 혼(渾)이 수집해서 진양연고에 편입해서 간행하였더니 이 때에 후손 인혁, 달해, 달명 등이 편집해서 원집 세권, 부록 두 권으로 만들어 간행하였다. 혼(渾)이 편찬한
연고의 발문에 대략 말하기를 진산군 통정 강회백이 송헌과 고헌의 시(時)
오륙 절구를 외워서 전하는 것을 우리 경재께서 들으시고 기록하셨고, 나의 선고께서 또 목옹과 경재의 시 약간 편을 얻어서 연당유록과 함께 정서했으나 홀로 한스럽게도 얻은 것이 많지 못했는데 지난 무자년에 재종제 호가 호남 지방에서 놀 때에 경재 선생의 시 백여 수를 얻어 붙여 보내고 간행하기를 청하니 내가 받아 간직하다가 병오년에 다 모아서 한권으로 만들어 「진양연고」라 이름하였는데 이제 이르러 후손 달해, 달명 등이 다시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헌종 대왕 8년 임인(1842년) 여름 4월에 우록 영당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선생의 후손 인환, 기홍, 청주 한기가 오읍(五邑)의 서비들과 상의하여 서원으로 승격하였는데 본 도 관찰사 강시영은 곧 선생의 증조 원정공의 외손인 진산 부원군 공목공의 후손이다. 본읍에 통지하여 현령
이관재가 친히 향사의 제물을 받들 게 하고 또 충훈부와 성균관의 결의에
따라 원생 17명과 보수 하는 노비 20명을 본 원에 하사하여 춘추향례를 행하게 하니 오읍(五邑)은 곧 문의, 청주, 공주, 연기, 회덕이다.
철종대왕 8년 정사(1857년) 가을에 우록서원에서 문집을 다시 간행하다. 우록은 곧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고, 또 병진(1376년)은 선생이 출생하신 해인데 후손 인환, 재구, 기홍, 한기, 재준과 방손 만기 등이 본원에 출판소를 설치한 것과 선생의 출생년을 만남도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종인 귀홍이 기성에서 놀 때에 선생의 31운을 얻어서 함께 추록하고
남(南)판서 병철이 지은 안악구대 비문과 김찬서 수근과 이판서 명적이 지은 남원 산동비각 서문을 함께 책 끝에 붙인다.
끝
※경재 선생은 1453년 8월 15일 향년78세를 일기로 많은 업적을 남기고 별세하시니 단종임금 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면서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1454년 단종 2년에 문효(文孝)라는 시호가 내리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 되셨다. 좌의정 남지(南智)선생이 비문(碑文)을 짓고 1463년 세조 9년에 강희맹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경재(敬齎) 하연(河演) 선생은 태평성대인 태조 시대인 21세 때에 관직에 입문하여 76세에 영의정(領義政)의 벼슬을 물러날 때까지 무려 53년 동안 나라경영에 혼신의 심혈을 기울여 봉사하였으며,조선 개국이후 400여년 동안 청백리에 빛나는 157분 중에 한분이시며 조선의 초창기 국법 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로를 남김으로써, 평화시대의 공복으로써 위대한
사표(師表)를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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