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헌공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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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공 詩

고헌공 詩

 

고헌공(允源)선조님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진영의 출입문에서 우연히읊음

원문

 

양성정(養性亭)
 

養性亭西 矗石東
 

竹林深處枾垂紅
 

秋光萬院還無主
 

長人征夫一夢中

 

번역

" 양성정 서쪽 촉석루 동쪽에
 

대숲은 짙게 푸르고 감은 드리워 붉었구나
 

가을빛은 동산에 가득한데
 

언제나 나그네의 꿈속에 들어오나니."

 

위 詩는 고헌공(휘允源)선조님께서 강주원수로 계실때 이성계 정세운 등과 같이 홍건족을 토벌하기 위하여 出征 중에 고향을 생각하며 읊은 詩이다

 

 

목은(牧隱)이색(李穡)이 답장 하기를

 

원문
 

 雁榮相聯又北飛

數行書札落柴扉

琶琶莫弄投壹處

月白江州淚濕衣

幾見落花 枝上飛

春風旋柴擁黃扉

遲公一辨龍頭會

白髮更聞金樓衣

번역
 

" 기르기 떼 나란히 북쪽으로 날더니
 

몇줄의 편지가 사립문에 떨어졌네.
 

비파를 투호 자리에서 희롱하지 마소.
 

달빛 흰 강주(江州)에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리니
 

낙화가 가지위에 흩날림을 몇 번이고보았는데
 

봄바람에 깃발이 정승집을 알았네.
 

공과 한번 용두회(龍頭會)를 못 가졌는데
 

백발되어 또다시 좋은 소식 들었네."

 

목은 이색 선생은 고려말 대학자 이시며 포은 정몽주 와 야은 길재선생 과 더불어 삼은(三隱) 선생중에 한분이시며 이세분들은 고헌공 선조님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며 목옹공 휘 (自宗) 선조님 군사공 휘 계종(啓宗)선조님과도 가깝게 지내셨다고 한다 현감공 휘 하척 (河 滌)선조님은 이분의 제자이자 사위이시다

 

 

고헌공께서 상주(尙州)에 계실 때 재상 안축(安軸)의 판상운(板上韻)詩 에 차운(次韻)하기를

 

원문
 

爲州忽忽己三年 

政拙安能及古賢

縱被推臍猶不去

自將尺素傀蒼天

번역

"고을을 다스린 지 어느새 3년이 되었건만
 

정치가 졸하거니 어찌 옛날의 현인에 미치랴
 

배척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가지 않으니
 

스스로 시소(尸素)로 저 푸른 하늘이 부끄럽구나
 

하윤원(河允源)

 

 

주D-001]시소(尸素) : 시위소찬(尸位素餐)이란 말인데, 송장처럼 일은 못하고 자리만 지키는 것을 시위(尸位)라 하고, 밥값을 하지 못하고 공밥을 먹는 것을 소찬(素餐)이라 한다.
성호사설 제25권

 

포은(圃隱)정몽주선생의 詩

 

" 나라에서 동쪽을 중요시하여 왕의 명으로 하공(하윤원)에게 원주목사로 명하였네.
 

부임 삼년만에 명성을 떨치니 왕의 말씀이 나 그대를 가상하게 생각하노니
 

이어서 불러 맑은 조정에 드시니 원주 백성은 이제 남긴 사랑 찬양하네.
 

승 운감이 어찌 뜬 세상의 인정이뇨  노래지으니 뜻이 거기있었네
 

원주 사람들이 보고 참지 못한 젖먹는 아이가 부모같이
 

사모한 마음 차마 보지 못하겠네."

 

하윤원公이 원주 목사(原州) 임기를 마치고 소환되실 때 포은 정몽주가

 

 

치악산의 중 운감(云鑑)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 어린애가 즐거워하며 어머니의 곁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의 은혜와 사랑을 미처 다알지 못하더니,
 

어머니가 가니 어린애는 울부짖는구나.
 

추위와 굶주림이 몸에 다가옴을 어찌하리요,
 

북원(北原)의 지난날 정치는 어질고 덕이 있음이 곧 이와 같았네. 빛나도다.


몇 천년 지난 뒷세상에서,
 

다시 소남(召南)의 시같은 송가(頌歌)를 부르네."
 


하시었다. 하윤원公이 원주(原州)에서 임기를 마치고 소환되실 때 중 운감(云鑑)이 시를 지어 칭송하니 고관들이 운(韻)을 나누어 화운(和韻)할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내(乃)자」를 얻고 봉익대부(奉翊大夫) 이구(李玖)는「하(下)자」를 얻었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이구(李玖)의 시에 이르기를,

 

" 여산(廬山)의 혜원(惠遠)이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며,
 

한가하게 동림(東林)을 향하여 일찍이 결사(結社)하였었네.
 

사귀는 도리가 도리어 세상의 도의를 따라 쇠퇴하니,
 

그 뒤로는 선비와 중의 서로 추증함이 적어졌다
 

운감 스님이 옛것을 좋아하나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어서,
 

원성(原城)의 의로운 절에 홀로 누웠었네.
 

글 잘하는 태수가 왔다는 것을 기뻐하고
 

석장(錫杖)을 날려 밝은 달 아래에서 문을 두드렸네.
 

함께 강루(江樓)에도 오르고 절의 누에도 오르면서,
 

넉넉히 시와 술을 갖고 한가하고 맑은 정취 배불렀다.
 

태수의 임기는 차[滿]고 정치는 흐뭇하여 조정으로 떠나가니,
 

원숭이와 학(鶴)있는 산언덕에서 스님은 누구와 더불어 밤을 보낼까.
 

바람편에 시를 부치어 고을에 남긴 사랑을 칭송하니,
 

맑은 시사(詩詞)와 아름다운 정서가 고가(高價)함을 다투네.
 

내 이 시를 보고 머리를 돌려 이 사람을 생각하노니,
 

치악산 그윽하니 거마가 멀구나.
 

벼슬을 그만두고 내 가서 그와 추종하고자 하나,
 

갈포(葛布) 두건(頭巾)과 들사람의 옷을 누구에게서 빌릴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46권 江原道 原州牧 名宦 高麗≫

 

 

고헌공 하윤원(河允源)선조님은 사직공 10세손이며 원정공 휘 즙(河楫)선조님의 외동아드님이시다. 고려시대때 충혜왕 말년에 과거에 올랐다. 공민왕 조에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써 여러 장수를 따라 경성을 회복하여서 2등 공신이 되었다. 신돈이 정사를 마음대로 할 적에 홀로 아첨하지 않았다. 

신우 초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知非誤斷 皇天降罰 그릇된 줄 알면서 잘못 처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라는 여덟 글자를 목판에 써서 헌대(憲臺) 위에 걸어 놓고 보았다.반남 박상충(潘南 朴尙衷)이 서(序)에 말하기를 '판전교시사 우문관 직제학 하공 (判典校寺事右文館直提學 河公)이 원주에 목사 되어 오니 백성이 편안하고 관리는 정숙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높더니 소환됨에 이르러 원주 백성이 공을 사모하는 깊이가 어린 아이가 부모를 사모함보다 더하였으니 공이 원주 백성의 부모 된 소이를 알 만 하다' 고 하였으니 1375년에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보국 진산부원군(輸忠佐理功臣 重大匡輔國崇祿大夫 晉山府院君)에 봉해지시고, 이듬해에 모친상에 계실 때 슬퍼함이 지나쳐 병환을 얻어 12월27일 율곡(栗谷) 여묘살이에서 병을 얻어 동사로 돌아가시니 향년이 55세였다.
우왕이 조서(詔書)를 내려서 불렀으나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여묘살이에서 세상을 떠나셨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30권 慶尙道 晋州牧 人物 高麗≫
현 원정공선조님 묘 밑에 장사하고 유상(遺傷)을 응석사 영당(影堂)에 봉안하였다.

 

 

포은(圃隱)정몽주선생의 詩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 23년(1374년) 갑인(甲寅)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이 영남지방 안렴사(按濂使)로 왔을 때 진주 비봉루에서 쉬어 간적이 있는데 이때 이러한 시 한 수를 읊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봉산(飛鳳山)

비봉산전 비봉루 飛鳳山前 飛鳳樓

누중숙객 몽유유 樓中宿客 夢悠悠

지령인걸 강하정 地靈人傑 姜河鄭

명여장강 만고류 名勵長江 萬古流

번역

진주의 상징인 비봉산 앞에 있는 비봉루에 들렀더니.
 

때마침 여름철이라 누각에서 잠자는 나그네들 꿈속을 헤매누나.
 

생각 해보니 진주의 인걸은 역시 강.하.정씨 문중에서 배출되었구나.
 

기나긴 남강은 옛 명성대로 만고로 부터 유유히 흘러 가는구나."
 

 

고헌공께서 시묘살이하고 있을때 우왕이 글을보내와 말하기를

 

" 三年의 상제 비록 고금에 행해지는 법이나
 

百日만에 상복을 벗는 것은 그대의 행세를 따르는
 

일이니 마땅히 효성을 옮겨 충성을 하기 위해  
 

슬픔을누르고 부름에 응하오"

 

하였으나 1376년 12월27일에 이 글이 도착 하기전 어머니 철성이씨 시묘살이(진주시 명석면 외율리 내율산 밤실)에서 추운 겨울에 병을 얻어 동사로 55세에 돌아가시니 모두 안타까워 했다 원정공 께서도 4년뒤 1380년 우왕7년 8월9일에 78세로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동문선 제9권에서 발견한 詩시

 

오언율시(五言律詩) 이강(李岡) 詩
 

낭중 하윤원을 시로 초청하며[詩邀河允源郞中]

 

혼자 앉으니 그윽한 흥(興)이 도네 / 獨坐成幽興

텅 빈 집안에 이끼[苔] 깊은데 / 苔深四壁空

연못에 비 내리니 우거진 고미[菰蒲] / 菰蒲一池雨

다락에 바람 오니 서늘한 베개 / 枕簟滿樓風

병 속에는 얼음 같은 술이 있고 / 壺底氷漿冷

소반에는 빨간 들 과일이 있도다 / 盤心野果紅

이 사이의 한가한 멋을 / 此間閑氣味

그대와 함께 하길 생각하네 / 思與阿兄同

 

 

목옹공(自宗)께서 집수리 하시면서 지은 詩

 

" 한채의 초가집이 작은 山을 의지 한바
 

남쪽을 향했기로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네.
 

공경스레 수리하여 후손에게 물리니.
 

유유한 사모의 정 그지 없이 솟아 오른다."

 

아래의 詩는 獨谷(성성린)선생 문집에서 발견한 詩입니다 목옹공선조님과 연관된 詩로 밑에 시번역은 제가 성균관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려 번역을 부탁 드렸는데 성균관.김정곤씨 께서 고맙게도 번역을 해주셨네요. 

拙譯을 海諒하시기 바랍니다.

 

붓을 놀려 諸公의 시에 次韻하다.

 

황해감사 河自宗을 餞送하며

 

원문

人固有願爲漁師。

日與鷗鷺相追隨。

魚蝦換酒蓬底醉。

疑乃聲中無所思。

願爲卿相得行道。

致君澤民心自期。

羨侯少抱經濟志。

攬轡慷慨遭淸時。

번역

사람이 정녕 어부를 원할까
 

날로 갈매기와 짝하네.
 

고기로 술 바꿔 봉래아래 취하니
 

이는 명예에 뜻이 없음일세.
 

원컨대 재상의 도를 터득하시어
 

백성의 윤택함을 기약하소서.
 

선망하는 경세의 뜻 품으시고.
 

고삐를 당기어 태평성대를 맞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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